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48
00748 169. 모집 =========================
“후우우…”
규설은 자신도 모르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뿜어냈다. 얼결에 제자가 되기는 했는데,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여러모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힘들어요?
“네? 아, 아뇨. 그냥 좀… 하하…”
파리 떼 마냥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니던 요정들 속에서 귀여운 인상의 요정 하나가 규설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다. 잘난 척 하기 바쁜 다른 요정들 속에서 유난히 착하고 귀여운 아이다. 이름이 릴이라고 했던가.
-힘들면 이것 좀 먹고 하세요.
“아니, 뭘 이런 걸 다…”
대단한 건 아니다. 기름종이로 정성껏 감싸 놓은, 그야말로 콩알만 한 크기의 사탕 하나. 규설에게는 입가심이나 될까 싶은 크기지만, 요정들은 하나만 입에 넣어도 볼따구가 불룩해질 정도의 왕사탕이다.
릴이 건넨 사탕을 까서 입에 넣자 화악하고 상쾌한 느낌이 전해진다. 아무래도 박하 사탕인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그럼 수고하세요.
“네.”
릴은 방긋 웃고는 자신을 부르는 다른 요정들을 따라 어딘가로 가버렸다. 규설은 그 모습을 보고 잔잔하게 웃다가 이내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모처럼 귀여운 요정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긴 했지만, 자신 앞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감자는 줄어들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뭐야! 아직 이것도 다 못했어? 내가 못 살아. 바쁘니까 빨리 끝내야 한다고 그랬잖아!
“죄, 죄송합니다.”
규설을 맡게 된 요정은 다름 아닌 전대 요정 여왕 람. 기본적으로 요정들이 중2병 환자들이긴 해도, 람은 특히나 그 정도가 심한 쪽에 속한다.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권좌에 앉아 있었던 탓인지는 몰라도,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 쪽이다. 어떻게 보면 과거 허세와 망상의 신도였다는 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요정이라고 해야 하나.
-이게 뭐가 어렵다고 그렇게 시간을 끄는지 모르겠네. 봐! 이렇게 하면 되잖아!
람은 감자 하나를 들어 올리더니 감자 칼로 순식간에 껍질을 벗기고 씨눈까지 완벽하게 도려낸 다음 깨끗한 물에 담가 버렸다. 입은 좀 험해도 가사 능력 하나는 정말 일품이다.
-봤지? 어서 마무리 지어! 공주님들 간식 시간이 되기 전에 끝내야 해!
“아, 알겠습니다.”
원래라면 형진에게서 요리를 배우는 시간을 가져야 했겠지만, 그는 요즘 환수들의 마을을 리모델링하는 작업 때문에 상당히 바쁜 편이었다. 물론 적당히 아바타를 하나 더 불러내어 그들을 가르치면 되는 일이긴 해도, 여러 가지로 바쁜 와중에 요리 가르치는 일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 생각은 없었던 터라, 결국 세 명의 환수들은 요정들에게 기초적인 부분을 전수받게 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이 매우 유능한 가사 도우미들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규설처럼 피상적인 면만을 본 이들은 화덕 앞에서 화려한 솜씨로 요리를 하는 모습만을 기억하기 쉽지만, 요리사라는 직업은 의외로 강한 노동 강도를 필요로 한다. 오죽하면 요리 업계에서 이름 난 셰프 가운데 남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가 바로 그러한 엄청난 노동 강도 때문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럼 관점에서 보면, 규설은 여러모로 다른 둘에 비해 불리한 점이 많았다. 원래 그런 부분을 잘 알고 도전을 한 소야는 당연히 논외이고, 규설과 마찬가지로 역시나 요리 초보인 쿠 역시도 완력만큼은 실로 압도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다. 그에 비하면 고아한 아가씨 같은 분위기를 가졌고, 실제로도 그런 식의 생활을 해왔던 규설에게 이런 무지막지한 노동의 연속은 실로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힘내자.”
그래도 릴이 주고 간 박하사탕을 먹고 나니 조금 기운이 솟는 느낌이다. 규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서툰 솜씨로나마 자신에게 할당된 감자를 모두 손질하는데 성공했다.
“저, 다 끝났는데요.”
-그래? 수고했어. 잠시만.
림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규설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그거 들고 따라와.
“네.”
규설은 림이 시키는 대로 감자 소쿠리를 들고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뒤 웬 임산부 하나가 중년 여성 셋과 함께 모여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림은 임산부 앞에 다가가 지금까지와는 명백하게 다른, 실로 공손한 태도로 말을 건넸다.
-유아님. 식재료 손질의 마무리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이리 주세요.”
그 임산부는 다름 아닌 유아였다. 만삭까지는 아니어도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 이제는 누가 봐도 임산부라는 걸 바로 알 수 있는 그런 모습이지만, 그녀는 식재료를 다듬는 일을 빼놓지 않고 있었다.
림이 조심스럽게 대하는 걸 보고 규설은 유아의 신분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채고는 조심스럽게 그녀 앞에 감자 소쿠리를 내려놓았다. 유아는 그런 그녀를 보고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제자 분이 왔다고 들었는데, 바로 이 분이었던 모양이군요. 유아라고 해요. 이름을 알려주겠어요?”
“규, 규설이라고 합니다.”
“예쁜 이름이네요. 잘 부탁드려요.”
“네. 저도…”
간단하게 통성명을 나누는 일이 끝나자, 유아는 가만히 손을 뻗어 자신 앞에 놓인 감자 소쿠리에 대고 희망과 생명의 권능을 발현했다.
“아…”
규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수준의 신성력이 감자에 쏟아져 내리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한 탓이다.
“끝났어요.”
-감사합니다. 유아님. 고생하셨습니다.
“아이들 간식용인가보죠?”
-네. 공주님들이 요새 구운 감자에 푹 빠지셔서.
“한참 잘 먹을 때긴 하죠. 잘 부탁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림은 그렇게 유아와 대화를 나누고는 규설에게 눈짓을 했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규설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감자 소쿠리를 들어올렸다.
인사를 하고 다시 주방 쪽으로 향하던 중에 규설은 앞장선 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그분은… 누구세요?”
-유아님? 우리 스승님의 첫 번째 왕비님.
“헛!”
어쩐지 범상치 않은 느낌이다 싶더니, 그런 중요한 인물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희망과 생명의 성녀이기도 하시지.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얕보지 않는 편이 좋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무, 물론입니다.”
스승이 된 밤의 신의 첫 번째 왕비라는 사실만으로도 놀랄 만한데, 거기에 더해 희망과 생명의 성녀라니. 아무리 그녀가 강력한 환수라도 단순한 추종자를 넘어선 존재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규설은 얼른 유아의 얼굴과 이름을 잊지 않도록 단단히 기억했다. 하지만 그렇게 림과 함께 주방으로 가던 중에, 규설은 또 다른 여성 하나와 마주쳤다.
“흥. 새로 들어온 메이드라는게 바로 너야?”
“…”
누가 봐도 시비조 가득한 느낌. 게다가 어쩐지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범상치 않다.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어물쩡거리고 있는데, 앞서 가던 림이 직각으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한다.
-그렇습니다. 이쪽은 이번에 새로 스승님의 제자로 발탁된 규설이라고 합니다.
“흥.”
림의 태도를 본 규설은 얼른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앞서 보았던 유아와는 달리 새롭게 나타난 여성은 규설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다시 한 번 콧방귀를 뀌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휴우…
림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인가 송글송글하게 이마에 솟아난 식은땀을 닦아냈다.
“저기… 방금 그분은…”
-여신님.
“네?”
-희망과 생명님이셔. 아… 참고로 그분도 스승님의 부인 가운데 한 분이시지. 혹시라도 나중에 만나면 실례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 보는 대로 성격이 보통이 아니신 분이니까.
“…”
규설은 다시금 입이 떡 벌어졌다. 방금 전에 분명 희망과 생명의 성녀가 형진의 첫 번째 왕비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젠 또 아예 희망과 생명까지도 부인이란다. 그렇다면 밤의 신은 여신과 그 여신의 성녀를 동시에 부인으로 맞이했단 말인가.
-우리 스승님이 좀 여성편력이 화려하긴 하시지. 아하하…
그렇게 말하면서도 림은 새로 온 메이드라는 말에 희망과 생명이 그렇게 경계하는 표정을 보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공연히 규설이 헛된 희망이라도 품으면 곤란한 일이기 때문이다. 형진이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 막 부려먹기는 해도, 만에 하나 상황이 바뀐다면 지금의 권력 구도가 완전히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도 다시금 깨달았다.
-크흠. 수고했어. 그건 내가 마무리를 지을 테니, 이만 넘겨주고 가서 쉬도록 해.
“네? 정말요?”
-물론. 싫으면 말고.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럼 전 이만.
혹시라도 말을 바꿀까 두려웠던 규설은 얼른 감자 소쿠리를 림에게 넘기고는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먼저 욕실로 들어가서 몸을 씻었다. 비록 작은 원룸 형태의 숙소이긴 해도, 욕실이나 냉장고처럼 기본적인 설비들은 전부 다 갖추어져 있어서 생활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미지근한 물에 몸을 씻고 나온 규설은 긴 머리를 포니테일 형태로 질끈 동여매고는 간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 일이 끝나자, 곧바로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크아…”
뒷골이 얼얼해지는 그 느낌에 규설은 눈을 꾹 감고는 탄성을 터트렸다. 평소 그녀가 내보이는 고아함을 생각하면, 어쩐지 좀 의외랄 수도 있는 모습.
꼬불쳐둔 감자칩 한 봉지를 꺼내 입으로 가져간다. 고소한 감자칩이 거기에 가미된 짭짤한 소금의 맛과 함께 맥주로 인해 얼얼해진 입 안에서 와삭 부서져 내린다. 어느 새인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피곤에 지친 전문직 OL의 일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잠시 몸을 부르르 떨며 맥주와 감자칩의 조합에 기꺼워하고 있던 그녀는 리모컨을 들어 벽에 걸려있는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능숙하게 채널을 돌려 예능 프로그램을 선택하고는 이내 그것을 보며 박장대소를 터트리기 시작한다.
요리 그 자체를 제외하면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곳의 일상에 적응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그녀를 보고 누가 있어 감히 전설로만 전해지는 환수 가운데 한 명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맥주와 감자칩과 예능이라는 환상적인 조합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헉!”
이렇게 쉬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방을 찾는 일 자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규설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텔레비전을 끄고 맥주와 감자칩 역시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 바로 문으로 달려가려다가 자신이 지금 트레이닝 복 차림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실로 변신에 가까울 정도의 속도로 메이드복을 챙겨입은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을 그 정도 속도로 해치우면 갈굼 당할 일도 없을 텐데.
“누구… 세요?”
그러자 문 밖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시녀장 아란입니다. 만나 뵙고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잠시 문을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시녀장.
그 말을 듣는 순간 규설은 머리 속에서 천둥번개가 번쩍 하고 내리치는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들은 적이 있다. 그녀를 신나게 부려먹고 있는 요정들도 껌뻑 죽는다는, 이 아름답고 드넓은 왕성의 메이드 전부를 살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바로 그 시녀장이 느닷없이 자신의 숙소에 찾아온 것이다!
“무, 물론입니다. 잠시만요.”
규설은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그러자 단아한 느낌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조차 모를 은은한 색기가 감도는 메이드 한 명이 문 앞에 서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쉬던 중이셨나 보군요.”
“네, 뭐…”
“괜찮으시다면, 잠시 들어가서 얘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아란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규설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규설은 나름대로 시치미를 떼고 있는 중이었지만, 방안에 은은하게 감도는 맥주 냄새와 입가에 묻은 감자칩 부스러기를 보고 아란은 방금 전까지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규설은 어쩐지 아란의 시선이 몸에 닿는 순간 자신의 내면이 속속들이 들여다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명색이 하나의 세계를 호령하던 환수의 몸이지만 이 왕성에 머무는 인물들의 면면이 너무나 화려한 탓에 감히 그런 자신감을 드러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어찌보면 야수의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었고, 이번에도 확실하게 들어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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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그럼 아침 식사를 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