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46
00846 196. 추대 =========================
“그러고 보면, 이런 식으로 신들이 전부 모이는 일 자체가 처음 아닌가?”
“맞아.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네.”
전대미문.
굳이 엘리시온의 역사를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곳에 속한 신들이 전부 모여 무언가를 결정한 것은 문자 그대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신들은 그만큼 개인적인 측면이 강했고, 함께 모여서 무언가를 해 본 일 자체가 없다. 의견을 조율하기 위한 행위라고 해봐야, 타나토스의 신들이 추종자를 내세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실행했던 토너먼트가 고작이다. 이쯤 되면 신들에게 과연 사회성이라는 것이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이번 일을 공론화하고 실질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막후에서 움직이는 역할을 맡게 된 세 여신들로서는 과연 회합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저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신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열렬하게 회합을 지지했고, 형진을 신들의 대표자로 옹립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리고 마침내, 회합의 날이 되었다.
“많다.”
“정말.”
막상 모든 신들이 모인 모습을 보니, 정말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지금까지 오디션이니 뭐니 해서 일부의 신이 모인 일은 있었어도 이렇게 모든 신들이 다 모인 건 정말 처음이다.
“모두 수고했어.”
“말로만?”
“물론 아니지.”
형진은 세 여신들을 끌어당겨서 이마에 입을 맞춰 주고는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이후의 일도 기대해.”
“흥. 변변치 않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여부가 있겠습니까.”
만신전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진은 가만히 심호흡을 한 뒤, 세 여신들과 함께 모여있는 신들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리고 있던 신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박수를 치며 환대했다. 이런 식으로 신들이 기립박수를 통해 맞이하는 이가 이 우주에 달리 누가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 회합의 결말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반갑습니다. 먼저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모여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형진이 그렇게 입을 열자, 신들은 박수를 멈추고 자리에 앉아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본래 신들은 이런 식으로 모여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엘리시온 안에서는 달리 의견 충돌이 일어나거나 그것을 조정할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바깥 세상에서의 일은 바깥에서 각각의 신들이 필요에 따라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 신들이 계속 엘리시온 안에만 처박혀 있었다면 이런 자리 역시 만들어지지 않았으리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것은 바꿔 말하면 이번에 자신이 신들의 대표자 자리에 오르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모든 신들은 저마다가 가진 신격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그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중이고, 인간을 비롯한 지성체들은 그런 여러분의 존재를 인정하고 기꺼이 그 추종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여기 모인 수많은 신들이 저 광대한 우주 안에서 저마다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을 보전하기 위해 의견을 조율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형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을 지켜보는 신들을 돌아보았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다른 체제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명확하게 정해진 규율에 의해 모든 사안을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안들을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우주적인 관점에서 살필 필요 또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필요를 합리적으로 만족시킬 만한 방안은, 제삼자의 시각에서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는 대표자를 선임하는 것입니다.”
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자를 뽑는 것이 막연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한 것이다.
“신들의 대표자라는 것은 또한 강대한 권력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대표자의 의무와 책임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상황이므로 자칫 이것을 악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경우 이 우주는 매우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보통은 대표자를 선임하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설명하기 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먼저 설명해야 옳다. 달콤한 꿀을 내놓아, 그것으로 상대를 현혹시켜 권력을 얻는 것. 그것이야말로 권력자들의 보편적인 행태이기 때문이다.
비록 사회적인 소양이나 경험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신들 역시 이런 권력자의 속성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형진의 대표자 선임에 반발하는 이들의 경우 직접적으로 그러한 의견을 드러내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일말의 걱정스러움을 담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자 선임의 위험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나서는 형진의 모습은 신들에게 작은 충격을 선사하고 있었다. 이득보다 리스크를 먼저 언급하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자리에 나서게 된 것은, 그러한 위험성을 명확하게 인식한 상태에서라면 이러한 일련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여기 모인 여러분들에게 더욱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혹시라도 그런 식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는 저 자신에 대한 경계이며, 저에게 힘을 실어주실 여러분들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신들은 자신도 모르게 형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그들은 점차로 그의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나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저는 신이 되고 난 뒤로 한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형진은 한 호흡 말을 멈춘 채 다시 신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제가 신이 되고 난 뒤에 세운 목표. 그것은 너무나도 광대해서 신조차도 질려버릴 것만 같은 이 드넓은 우주를 생명의 빛으로 채워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행성 개발을 비롯한 일련의 과정을 수행함과 더불어, 여러분들의 등을 떠밀어 그렇게 생명의 빛으로 밝혀진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그 결과, 우주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생명력으로 채워져 가고 있으며, 그 모든 세계에 속한 지성체들에게 신들의 영향력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력은 고스란히 여러분의 힘으로 바뀌어 세계는 보다 풍요로워지고 윤택한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습니다.”
당장 참석한 신들의 면면만을 놓고 보더라도, 과거에는 밖으로 나갈 엄두도 못 내던 신들이 이제는 아바타는 물론이고 공헌도까지 나누어 받아 서로 다른 세계에서 그 존재감을 여지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아직 대신이라 불리울 만한 신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세계가 확장되고 인간을 포함한 지성체들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그들의 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갈 것은 또한 틀림없는 일이다.
그 모든 변화가, 지금 자신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이 남자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과연 누가 있어 부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또한 여러분은 알고 계셔야 합니다.”
형진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다소 굳은 표정으로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너무나도 광대해서,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저조차도 그 광대함의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이 우주가 과연 세상의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우주조차 다른 모든 세상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 바깥에 있는 또다른 우주에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저조차도 그 힘의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강대한 존재들이 자리 잡고 있음을 여러분은 또한 아셔야만 합니다.”
형진의 다소 굳은 표정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은 얘기가 나올 거라 생각은 했었지만, 지금 나온 얘기는 신들을 당황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 그런.”
“잠깐. 이건 처음 듣는 얘긴데?”
“이게 무슨 소리야?”
다소 소란스러워진 신들의 반응을 보면서 형진은 그들에게 하나의 형체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거대한 애벌레를 닮은 생명체였다. 그것이 우주의 균열을 뚫고 들어와 형진과 싸우는 광경을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겪어온 우주와는 다른 곳에서 넘어온 생명체입니다. 이번에 여러분이 제작하고 또한 지급 받으셨던 의지의 성채는 바로 이 생명체의 조직을 가공해 만든 재질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우주와는 다른 섭리 하에서 탄생한 생명체. 그 증거가 이미 여러분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그, 그런…”
단순히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었다. 이미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접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신들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형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단순히 이 우주에 생명의 빛을 가득 채워나가는 목표만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지금과 같은 상태로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우주 바깥에는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경계를 허물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에게 적대적일지, 그렇지 않을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과 마주했을 때, 우리가 그들보다 약하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훨씬 작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의견을 나누고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와 대등 또는 그 이상의 힘을 갖추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상대가 힘을 통해 강압하더라도 우리는 감히 그것을 거스르지 못하게 될 겁니다. 이 세상이 마냥 호의로만 채워져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
신들은 침묵에 잠겼다.
형진의 말대로 우주에는 호의나 선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당장 그들이 엘리시온에만 처박혀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엘리시온 바깥에 존재하는 악의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던가. 아무런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 악의와 직면했을 때 대항할 수단조차 가지고 있지 못해서가 아니었던가.
어떻게 보면 형진의 말은 그들이 처했던 상황을 엘리시온이 아닌 우주로 확장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충분한 힘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라면, 엘리시온 바깥으로 나가길 주저했던 때와 같은 상황이 지금 우주라는 공간을 대상으로 똑같이 벌어질 수 있음을 신들은 분명하게 납득했다.
“이 우주를 생명력으로 가득 채우는 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합니다. 이 우주에 생명이 충만하면 할수록 여러분의 힘은 더욱더 강대해질 것이고, 그것은 또한 외부로부터의 위협으로부터 전해진 악의를 견뎌내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형진은 가만히 심호흡을 하고는 다부진 목소리로 신들에게 외쳤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이 우주를 생명의 빛으로 가득 채우는 일에 여러분의 의지를 보태 주십시오! 여러분의 힘을 보태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우주에 속한 모든 이들이 풍요롭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그 모든 것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바로 여기 서 있는 저에게 힘을 보태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신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외쳤다.
“네!”
“돕겠습니다!”
“당신의 뜻!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진은 다시 외쳤다. 그리고 신들이 그 말을 따랐다.
“이 우주에 생명의 빛이 충만하도록!”
“이 우주에 생명의 빛이 충만하도록!”
“이 우주에 속한 모든 이들이 풍요롭도록!”
“이 우주에 속한 모든 이들이 풍요롭도록!”
“이 우주에 그 어떤 악의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이 우주에 그 어떤 악의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형진은 그렇게 세 번의 선창을 마치고는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밤의 신은, 앞으로 신들의 총의를 대표하는 자가 되어 이 모든 일들을 부족함 없이 수행할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맹세하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신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허락하겠습니다!”
형진은 가만히 그들의 열광적인 외침을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앞으로 저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형진은 마침내 신들의 대표자, 주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히틀러도 엄연히 선거로 뽑혔죠.
그냥 그렇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