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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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름조차 묻지 않은, 다른 우주의 지성체가 그러한 행동을 보이자 안으로 들어서던 일행들은 순간 움찔하며 행동을 멈추었다.
“클로리스?”
“제가요?”
형진이었다면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며 속내를 들춰 보기 위한 행동을 했겠지만, 꽃과 바람이나 신뢰와 헌신은 이런 식의 모략에는 별로 경험이 없거나 무언가를 기만한다는 사고 방식 자체가 없는 이들이다 보니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입으로 다 나와 버린다.
“커흠. 이건 아무래도 정리가 좀 필요한 문제인 것 같군요.”
형진이 일단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을 주워 담기는 어려운 일. 꽃과 바람을 보고 클로리스라고 부른 당사자 또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버린다.
“아닌… 가요?”
상대의 말에 그제서야 자신들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꽃과 바람, 그리고 신뢰와 헌신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형진은 이 외계인 또한 클로리스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클로리스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되묻는 행위 자체가 커다란 불경일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자, 일단 하나 묻도록 하지. 너는 어째서 이 분을 클로리스라고 생각한 것이지?”
“그건…”
머리에 빨간 꽃을 달고 있는 외계인은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지만, 형진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끝도 없는 어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되새겼는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야… 클로리스 님의 기운을 잔뜩 지니고 계셔서…”
“클로리스의 기운이라고? 그런 걸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가?”
“이 꽃은 그 자체로 클로리스님의 일부나 다름없습니다. 알아보지 못할 이유가…”
“호오…”
그냥 아무 꽃이나 머리에 붙여 놓았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를테면, 엘리시온의 신들이 추종자에게 문장을 새기는 것과 같은 형식이 되는 셈인지도. 물론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물체라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잠깐 살펴봐도 될까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꽃과 바람이 문득 그렇게 말하자,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비슷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면, 실제로 접촉이 이루어졌을 때의 반응을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형진의 반응과는 달리, 그녀를 호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신뢰와 헌신은 이런 존재와 접촉하는 것 자체를 불안하다고 느꼈는지 꽃과 바람을 만류하고 나섰다.
“괜찮아요. 사실은 저도 보는 순간 뭔가 끌리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문제가 생기거나 하지는 않을 거에요.”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걱정하지 말아요.”
“…”
마치 아기를 어르듯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자 신뢰와 헌신은 입을 다물었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신뢰와 헌신을 저렇게 다루다니, 꽃과 바람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진이 옆에서 혀를 내두르며 바라보고 있는 동안, 꽃과 바람은 앞으로 걸어 나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외계인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혹시라도 앞서 전기 충격을 가했을 때처럼 붉은 가루가 뿜어져 나오지는 않을까 싶어 경계했지만, 놀랍게도 상대의 꽃은 그녀의 손이 다가오자 마치 강아지가 주인의 손에 머리를 부비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래, 착하지.”
꽃과 바람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며 살짝 기운을 내비치자 마치 따뜻한 햇살을 맞는 것처럼 붉은 꽃에 생기가 어린다.
“아아…”
클로리스인은 자신의 꽃에 여신의 기운이 닿자 몸을 떨며 황홀경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였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민감한 속살에 전기가 닿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형진은 자신이 몸을 만지작거릴 때만 해도 나무토막 같았던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이니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꽃과 바람은 초기에 형진을 찾아온 신들 가운데 한 명이지만, 친구인 보호와 균형이나 황혼과 망각보다는 아무래도 존재감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형진의 입장에서는 황혼과 망각처럼 전략적인 활용도가 높은 신도 아니고, 보호와 균형처럼 자신이 없으면 죽고 못 사는 여신도 아니다 보니 이래저래 관심이 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형진 주위의 신들에 비해 그렇다는 얘기지, 다른 여타의 잡신들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뭐라 해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신격이기 때문이다.
“신기하네요. 제 기운과 이렇게 닮을 수가 있다니. 이곳이 정말 다른 우주가 맞는 건가요?”
얘기를 듣고 찾아오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우주에서 자신과 닮은 기운을 지닌 존재를 발견하게 되자 꽃과 바람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네, 뭐… 일단은.”
혹시나 싶어 자신이 직접 꽃과 바람을 부르긴 했어도, 이런 식의 반응까지는 예상치 못한 터라 형진 역시 조금은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쁜 일은 아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반응이 나오는지는 일단 확인해 봐야겠지만, 만약 꽃과 바람의 힘이 이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는 앉은 자리에서 종족 하나를 뼈도 안 바르고 그대로 훌떡 집어 삼키는 것과 같은 성과를 얻게 된다. 클로리스라는 이름의 종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우주로 나아갈 정도의 문명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 수도 만만치 않을 터. 꽃과 바람은 물론이고 그녀에게 빨대를 꼽고 있는 형진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노다지를 찾아낸 셈이다.
“다른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한 번 만나보세요.”
“알겠습니다.”
꽃과 바람은 순순히 형진의 말에 따랐다.
다른 방에 들어가자 동면 상태에 빠져든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 분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깨우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만, 꽃과 바람님이라면 어렵지 않게 저들을 깨울 수 있을 것 같군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꽃과 바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녀는 천천히 잠들어 있는 존재에게로 다가가 머리의 꽃에 대고 기운을 살짝 불어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기운이 닿자 잠들어 있던 이들은 하나 같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 주위를 살피다가 꽃과 바람과 눈이 마주치자 다급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클로리스님을 뵙습니다.”
“클로리스님을 뵈어요. 아아…”
그녀의 기운이 가져다 준 황홀경 때문인지 대부분의 클로리스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만났던 이에게 했던 것처럼 자세한 것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꽃과 바람이 이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깨우는 일이 끝나자 다음은 문자 그대로 일사천리였다.
“저는 박물관을 경비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맡고 있는 일은 각 행성의 식물 표본을 채집하고 그들의 유전적 상관성을 규명하여 특정 환경에서의…”
그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에 형진은 물론이고 그의 비서들 역시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영락없이 해당 행성의 지배자가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장소는, 어이없게도 식물사 박물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진이나 그의 비서들이 내린 판단이 전혀 엉뚱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클로리스라는 이름을 지닌 이들 종족에게 있어 식물은 형제나 다름없고, 또한 현재의 자신들이 있도록 만들어준 여신의 또 다른 모습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박물관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실제로는 신전이나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나 할까. 물론 그곳에 여신의 뜻을 전하는 사제나 추종자들이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라해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여신을 직접 마주한 적이 없는건가?”
“그렇습니다. 본래 신이란 직접 마주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고… 게다가 클로리스님은 저희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과정에서 힘을 잃고 어딘가로 사라지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과연. 그런 건가.”
형진이 처음 깨웠던 인물은 박물관을 총괄하는, 이를테면 관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꽃과 바람이 클로리스 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녀와 같은 힘과 기운을 지닌 그녀의 권위를 부정할 엄두 또한 내지 못한 채 순순히 자신이 아는 바를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클로리스라는 존재는 미아 같은 신이었던 건지도 모르겠어.”
“저요? 제가 왜요?”
“토끼들이 귀엽다고 얼마 되지도 않는 힘을 모조리 쏟아 부어 버리는 바람에 잊혀진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아?”
“윽…”
일반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사례가 바로 코앞에 있으니 웃어넘길 수도 없는 일이다.
얼핏 보기엔 칼바람이 쌩쌩 몰아칠 것 같은 날카로운 사감 선생 같은 외모를 하고 있음에도 형진의 말에 곧바로 울상이 되어버리는 미아의 모습에 이 자리에 모여든 신들은 모두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잠시. 이어진 꽃과 바람의 말에 그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그런데… 클로리스라는 신은 그럼 어떻게 된 거죠?”
“그게…”
대략적으로 추측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빛의 신이라는 존재가 모든 신이라고 불리는 점으로부터, 존재하던 모든 신들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식의 가설이 있긴 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바로 입 밖에 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좀 더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클로리스인들에게서 나온 정보도 그렇고, 형진 역시 대답을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꽃과 바람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내막을 제대로 모르는 그녀로서도, 저런 열렬한 신도들이 있는데 과거의 보호와 균형처럼 잊혀져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식의 결말은 말이 안 된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차마 쉽게 말로 하지 못하는 어떤 일들이 이 세계의 신들에게 벌어졌던 것은 아닐까. 쉽게 입을 열어 설명하지 못할 그런 종류의 일들이.
이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 꽃과 바람만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은 다른 신들 역시 같은 생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크흠. 그나저나… 이참에 저들을 추종자로 받아들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네? 추종자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쉬워서 추종자지, 이건 사실상 다른 신의 신도를 강탈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비록 지닌 바 힘이나 기운이 비슷하다고 해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
하지만 형진은 다소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는 꽃과 바람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지금 다른 우주와 전쟁 중입니다. 그리고 전쟁이란 건, 보통 피를 부르는 일이 되기 쉽죠. 하지만 꽃과 바람께서 나서 주신다면, 굳이 피를 보지 않고도 저들을 우리쪽으로 끌어오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신뢰와 헌신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들이 위험해지지는 않을까?”
눈앞의 적보다 내부의 배신자들이 더 큰 증오의 대상이 되는 건 차라리 필연이라고 봐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형진은 빙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클로리스인들 가운데 일부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야,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들은 자신들을 살아남도록 도와준 여신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이름을 클로리스라고 지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마침내 맞이한 여신의 재림 앞에서 배신자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
대다수 가운데 한두 명이 돌아서면 그것은 배신이다. 하지만 전부가 돌아선다면 어떨까. 모두가 그렇게 돌아선다면, 그건 배신이 아닌 전향이 된다.
꽃과 바람은 조용히 신뢰와 헌신을 바라보았고, 신뢰와 헌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리스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여신에게 충분한 신뢰를 보여 주었고, 또한 그 신뢰를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이제는 그 오랜 노고에 대한 보답을 받을 때다. 비록, 그것이 다른 세계의 신에 의한 것이라 해도.
꽃과 바람은 신뢰와 헌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형진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저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해주신다면, 진님의 말에 따르도록 하지요.”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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