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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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요.”
언제 정신을 잃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규설과 힐리에타가 깨어났을 때 그녀들을 처음 맞이한 것이 형진이 아니라 아란이라는 점이다.
화들짝 놀라 얼른 일어나려던 둘은 순간 몸 여기저기에서 전해지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윽…”
“으으… 이건…”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눕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는 둘의 모습에 아란은 빙긋 웃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있어요. 무리할 필요 없으니.”
“이건…”
“음… 몸이 놀란 거라고 하는 편이 맞겠죠. 그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니까요.”
“…”
규설과 힐리에타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들이 겪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 어느 틈엔가 자신들이 옷을 갖춰 입고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이건…”
“여러분의 옷은 그가 직접 입힌 거에요. 물론 씻기는 것까지 전부.”
“…”
그렇지 않아도 붉어졌던 둘의 얼굴이 더욱더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물론 아란이나 다른 형진의 아내들이 챙겨주는 상황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꼴사납게 정신을 잃고 있는 모습을 그에게 보였다 생각하니 역시 부끄러운 기분을 감추기 어렵다.
“일단, 미아님과 리페님이 두 분의 몸을 돌보기는 했지만, 본래대로 움직이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거에요.”
“네? 어째서…”
미아와 리페는 몸을 회복시키는데 있어서는 다른 어떤 신들보다도 강력한 권능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런 둘이 살폈는데도 이 모양이라면, 뭔가 큰 문제라도 생긴 것 아닐까.
“놀랄 필요 없어요. 본래 신격과 어떤 식으로든 접촉이 이루어지면 변화가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더구나 여러분은 어찌 보면 신녀보다도 더 밀접한 관계로 강렬한 결합을 시도한 셈이죠. 무리해서 균형을 맞추는 것보다, 여러분의 몸이 스스로 적응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만약 그와의 관계가 이번 뿐이라면 그냥 강제로 균형을 맞추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신과의 결합은 어떤 식이 되었든 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신녀가 아닌 이들의 경우엔 그 변화를 견디지 못해 파멸하는 경우마저 생길 정도니까. 더구나 형진은 보통의 신도 아니고, 하나의 우주를 아우르는 주신이기까지 하다. 그 격의 높음과 지닌 힘의 강력함이 여느 신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운 수준이니, 그러한 신과의 결합으로 인해 생겨나는 변화 역시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미엘이나 하엘도 같은 처지가 아닌가 싶겠지만, 그녀들은 주신인 형진과 바로 결합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변화를 겪은 탓에 신체와 정신에 큰 무리 없지 지금의 상태가 이를 수 있었다. 같은 양의 비가 내리더라도, 국지성 호우로 순식간에 퍼붓고 사라지는 것과 천천히 오랜 시간 동안 내리는 가랑비는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다를 수밖에 없는 법. 규설과 힐리에타의 현재 상태도 바로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지금 각각의 행성으로 내려가서 신전을 만들고 있는 중이에요. 그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들이 형진과 맺어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 자체가 아란으로 인한 것이고, 신분으로 놓고 보더라도 일개 추종자인 자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이므로, 둘은 아란에게 최대한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애초에 함께 보낸 시간과 그것을 통해 쌓아올린 애정의 깊이 자체가 다른 이상, 한 번 맺어졌다고 기고만장해서 다른 아내들과 티격태격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 정도는 규설과 힐리에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아란을 비롯한 다른 아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모처럼 이어진 형진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있어봐요. 간단하게 먹을 것을 만들어 가져올테니.”
“아, 아니.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어허, 말 들어요.”
“네…”
그렇게 규설과 힐리에타가 아란에게 잡혀서 꼼짝 못하고 있는 동안, 형진은 미아와 리페를 대동한 채 신전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디보자. 이쯤이 좋을 것 같은데.”
형진이 주위를 둘러보며 그렇게 말하자, 리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빛의 신이 지어놓은 성전 바로 앞이라니.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야?”
“단숨에 때려 부수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거야… 그렇지만.”
사실 빛의 신전을 때려 부수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자비를 베풀기 위함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앞에 만신전을 세우는 것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지금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장치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 시작해 볼까.”
형진이 손을 뻗자, 아름드리 나무가 자라나고 있던 언덕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자라나고 있던 나무와 지표로 드러나 있던 바위가 마치 누군가에게 손으로 밀쳐진 것처럼 옆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돌기둥들이 솟아나기 시작한다.
전체적인 형태는 돌기둥들이 둥근 형태로 늘어선 성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다른 점도 분명히 있었다.
가운데 솟아있는 샘물 대신 커다란 분수대가 마련되었다. 분수대 중앙에는 형진의 신격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진 기둥이 마치 산처럼 솟아나 있다. 모든 신들을 대표하는 주신의 위치를 그런 식으로 나타낸 것이다.
다른 신들의 성물은 그 분수대를 감싸는 듯한 모습으로 배치되었다. 각각의 신들의 모습을 새긴 성상들이 줄지어 늘어선 그 모습은 어쩐지 분수대 중앙에 위치한 형진의 문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분수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대신들을 배치한다는 점을 빼면, 나머지 성상의 위치는 엘리시온으로부터 나온 순서대로야.”
“흠… 하긴, 따로 기준을 정하기는 애매한 점이 많으니까.”
덕분에 이득을 본 것은 다름 아닌 허세와 망상이다. 교단이 몰락해서 지금은 파릇파릇한 여고생 추종자 하나만 달랑 거느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대신들 바로 뒷자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빛의 신전 앞에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자, 그렇지 않아도 하늘을 뒤덮어 버린 거대한 어둠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 있던 주민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뒤이어 새롭게 들어선 만신전으로부터 은은한 빛이 퍼져 나와 주위를 밝히기 시작하자, 그들은 하나둘씩 마치 홀린 것처럼 신전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제 저들이 어떤 신에게 반응하는지 확인해 보면 될 일이야.”
그러자 지켜보던 미아가 물었다.
“질문이요.”
“뭔데?”
“그냥 어떤 신을 섬기는지 물어보면 되지 않나요?”
“그게 말이지. 제대로 대답을 하질 않더라고.”
“대답을 안 해요?”
“응. 처음에는 빛의 신이라고 했다가, 계속 물어보니 아니라고 했다가. 규설이 살펴봐도 영 애매해서 도무지 어떤 신을 섬기는 종족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어.”
“아하. 그랬던 거군요.”
심문 중에 결과가 나왔다면 굳이 이런 거창한 일을 벌일 이유가 없다. 그냥 해당되는 신을 불러와서 대면시키면 끝이니까.
어쨌든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지켜보고 있자니, 홀린 듯이 만신전으로 다가선 주민들은 이내 자신들이 이끌리는 성상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그들이 섬기는 신과 가장 비슷한 느낌을 가진 성물로 이동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형진은 가만히 좀 더 지켜보다가 이내 허탈한 표정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군. 이들은 아직 교화되지 않은 종족들이었던 거군.”
심문 결과가 어정쩡했던 건 그들이 형진이나 규설에게서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심계를 가져서가 아니었다. 클로리스나 누에처럼 특별히 정해서 섬기는 신이 없는 상태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결과가 나와 버린 것이다.
하긴 이들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어떤 특정한 신격이나 권능의 보호를 받고 있는 상태라면 이런 궁벽한 변두리, 그 중에서도 다른 우주로부터의 위협을 피부로 느껴야만 하는 최전선에 내몰려 살아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렇게 되면 곤란한 거 아니야?”
조금 허탈한 표정마저 짓고 있자니 리페가 그렇게 물었다.
“뭐가?”
“이들 종족이 아직 하나의 신을 정해서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신들에게 나누어 주기보다는 당신이 그냥 독식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어서.”
그 말에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어이쿠. 우리 귀여운 마눌님께서 남편 생각이 이렇게 지극하신지 미처 몰랐군요.”
“흥! 딱히 그런 건 아니거든?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하하하!”
이젠 아예 츤데레 말투가 입에 붙어 버린 모양이다. 형진은 볼을 부풀린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리페를 와락 끌어안으며 귀엽다는 듯이 불퉁한 볼에 입을 맞추었다.
“쳇. 애 취급이나 하고.”
“그러길 바래서 이런 모습을 한 건 아니고?”
“자꾸 놀리면 나 화낸다?”
“물론 그건 곤란한 일이죠. 잘못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노닥거리고 있는 사이에도, 주변의 주민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의 성물에 기원을 올리고, 만신전 중앙에 자리잡은 분수대로부터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성수를 두 손으로 경건하게 떠올려 음미했다.
“이렇게 되면 예정과는 달리 지출이 좀 더 커지겠는데.”
“왜요?”
“원래는 저들이 섬기는 신을 알아보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이곳에 하나만 지으려는 생각이었거든. 하지만 지금 상태대로라면 각각의 행성은 물론이고 인구 밀집 지역에도 하나씩 지어줘야 할 것 같아서.”
“포교를 해야 하니까요?”
“그 말대로야.”
리페의 말대로 전부 독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직간접적으로 누에와 클로리스라는 큰 종족들을 받아들인 상태. 그에 비한다면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 파충류 모습의 종족 정도는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해주어도 큰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어차피 그렇게 다른 신들을 섬기는 신도가 되었다 해도 결국은 다시 빨대를 꽂은 그의 힘이 되어 돌아올 것이고.
잡신들로서는 가만히 있어도 신도가 늘어나니 좋고, 형진은 실컷 신앙과 공헌도를 포식하면서도 다른 신들에게 생색을 낼 수 있으니 좋고. 누이좋고 매부좋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예상보다 일이 많아진 탓에 좀 더 시간이 소요되고 말았다. 손에 넣은 행성 각지에 신전을 세우고 돌아온 형진을, 그동안 상태가 많이 호전된 규설과 힐리에타가 아란과 함께 반긴다.
“몸은 좀 어때?”
“마,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저도요.”
“그럼 다행이지만. 급한 일은 대부분 처리했으니까, 일단은 푹 쉬어. 있다가 다시 찾아갈 테니.”
“네…”
규설과 힐리에타는 새색시답게 조용히 그의 말에 따랐다. 아직 몸 상태가 완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돕는답시고 옆에서 걸리적거려봐야 방해만 될 뿐이니, 고집 피우지 않고 스스로 물러선 것이다.
“어디보자…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이.”
둘이 거처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형진이 손바닥을 비비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아란이 바로 대답했다.
“빛의 신전에 있던 자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렇군. 그들의 문제를 처리해야겠지. 가자.”
“네.”
어찌 보면 빛의 신전에서 포획한 포로들을 심문하는 것은 현재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신과 직접 연결된 자이니 만큼, 사실상의 주적이라 할 수 있는 빛의 신에 대한 것을 정보를 가장 확실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규설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미아의 말에 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내 생각엔 별로 효과가 없을 것 같아서.”
“어째서요?”
“원래부터도 규설의 능력은 추종자들에게는 효과가 적어지는 면이 있거든. 더구나 상대는 하나의 우주를 지배하는 빛의 신. 산군의 능력이 제대로 통할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겠지. 뭐… 시험은 해봐야겠지만.”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포로들을 가둬둔 공간 앞에 도달했다. 형진은 앞장서서 공간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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