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43)
143 면티
3시간 가까운 협상이 윤곽을 그려내며 마무리됐다.
중국 땅에 발을 디딘 지 8시간 만에 이룬 성과다. 우리가 여기 오기 전에 에이전트 케이가 수차례 협상을 진행하며 밑밥을 깔아 둔 덕이 가장 컸다.
물론 많은 물량도 거뜬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먹힌 결과이기도 했다. 그만큼 난징변압기 왕 종은 파트너 찾기가 급했던 것이다. 하청 업체 수십 곳과 거래하면서 골머리 앓느니, 우리와 손잡는 것이 훨씬 낫겠지.
“자, 얘기 어느 정도 하셨으니까 구체적인 것은 내일 오전에 하시는 걸로 하죠? 내일 일정도 있으니까 이제 좀 쉬셔야죠.”
에이전트 케이의 마무리로 길었던 저녁 식사가 끝났다. 급속도로 피곤해진다. 피곤을 감추며 빨리 호텔 가서 쉬고 싶은 생각만 하고 있는데, 에이전트 케이가 슬쩍 다가왔다.
“사장님, 이따 밤에 미스터 왕 데리고 술 한잔 사는 건 어때요? 제가 우리 직원 시켜서 괜찮은 곳으로 잡아 둘게요.”
“그냥 술만 마시란 소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에이전트 케이가 배시시 웃으면서 어깨를 두들긴다.
“사업하면 접대는 기본 아니겠어요? 호호.”
사업의 마무리가 꼭 단란해야 한단 말인가! 중국 출장 첫날밤이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 않다. 여자 일행도 있으니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역시나네.
“박 사장님도 계시는데 다 같이 한잔하시죠?”
“에이, 사장님. 왜 눈치 없는 척하세요? 왕 종이 그럴 생각이었으면 저녁 먹으면서 다 같이 가자고 했겠죠. 저나 박 사장님이 갈 수는 없으니까 지 사장님이 가서 즐기고 오세요. 호호.”
“말도 안 통하는데 가서 뭐 합니까?”
“그냥 술 마시고 노는데 말할 것이 뭐 있어요? 바디랭기지로도 충분해요.”
왕 종, 그 사람도 어지간히 밝히는 모양이다. 사업 파트너로 온 세 사람 중 두 명을 내칠 정도로 그리 사안이 급한 일인가!
“알겠습니다. 일단 호텔 가서 짐 좀 풀죠.”
“그래요. 그럼 9시 반까지 직원 보낼 테니까 그 편으로 해서 다녀와요.”
박 사장 내버려 놓고 혼자 다녀오자니 선뜻 내키지 않는다. 사업은 믿음이 전제돼야 하는데, 괜스레 오해받을 행동 할 필요가 없지.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한 카드가 있다.
호텔 도착해 방에 들어가자마자 씻을 준비 하며 짐을 풀고 있는 덕준이를 일으켜 세웠다.
“덕준아, 미안하지만 나 대신 술상무 노릇 좀 하고 와라. 왕 종이 단란한 데를 찾으신단다야. 내가 가 봐야 술도 얼마 못 마시고 잘 놀지도 못하잖아?”
“뭐? 나 혼자 가라고? 너 인마, 박 사장 눈치 보여서 그러는 거야?”
“이럴 줄 모르고 이따 맥주나 하자고 했는데, 접대 때문에 여자 끼고 술 마셔야 한다고 말하기 그렇잖아? 평소처럼 진탕 마시고 미친 듯이 놀고 와.”
“노는 거야 좋지만, 그래도 좀 그런데…… 말도 안 통하고, 그리고 좀 찔리잖아?”
역시 순정파 덕준이답다.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도 여자 친구인 오윤경 기자를 생각하는 저 갸륵한 마음. 내가 이 일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 주마.
“단란한 곳이라고 해서 무조건 그런 데는 아니야. 내가 찾아보니까 양손을 모으고 있으면 2차 가능이고, 뒷짐 지고 있으면 불가능이래. 그냥 술 마시고 논다고 생각해. 발렌타인 한 병 줄 테니까 선물로 주고.”
“이 자식 은근 준비 많이 했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A급들이 나온다고 하더라. 뒷짐 진 애로 잘 택해서 맘 편히 놀고 와. 어차피 왕 종이랑 할 얘기는 다 했으니까 술이나 진탕 먹여.”
덕준이 표정이 오묘하다. 잘 놀고 오라는데 뭘 고민하는 척이야. 가서 현란한 광기 짓으로 잘 구워삶고 오셔.
덕준이를 내보내고 호텔방을 쭈욱 둘러보니 몸이 저절로 녹아내릴 것 같다. 유독 푹신해 보이는 베개를 보니 침대에 몸을 내던지고 싶다.
그러나 한시도 허투로 보낼 수 없는 것이 출장이 아니던가! 개운하게 샤워 한 판 때리고 나서 1층에 위치한 펍으로 나갔다. 유민희를 봐야 하는데 방으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사장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힘들지?”
“출장이라고 해도 관광도 하고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계속 앉아서 얘기만 들으려니까 힘드네요. 헤헤.”
살짝 한숨 쉬는 모습이 귀엽네. 경험 많이 쌓으며 무럭무럭 자라렴.
경력이 쌓이면 혼자 내보낼 생각이다. 해외도 놀러 가야 좋지, 일하러 가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면세 담배 사는 것 말고는.
“내일은 시간이 좀 나면 좋겠는데, 일정 보니까 내일도 똑같을 것 같지?”
“아름이가, 아니 박 대리님이 중국 출장 간다고 부러워했는데, 얘기해 주면 절레절레할 거예요.”
“피곤할 테니까 간단히 얘기하자고. 아까 왕 종이랑 얘기한 것 잘 들었지?”
민희가 주섬주섬 수첩을 꺼내 메모한 것을 살펴본다. 조용히 밥만 먹고 있는 줄 알았더니 틈틈이 메모도 했나 보네. 비밀 병기 노릇을 잘했군.
“네. 김 사장님이 잘 통역하셨더라고요. 결제 조건 얘기할 때는 금성전기랑 우리 회사가 믿을 만한 회사라고 얘기하면서 왕 종징리를 계속 설득했어요.”
“김 사장을 전적으로 믿고 진행하고 싶지만, 사업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어. 사기꾼들이 득실거리는데 판단 잘못하면 직원들이 피해를 입는 거니까.”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민희. 제대로 듣고 있는지 모르겠네. 눈이 좀 풀린 것 같은데?
“또 뭐 얘기할 만한 것은 없어?”
“음, 견적은 만족하는 것 같더라고요. 얘기 들어 보니까, 변압기 수급이 많이 어려운 것 같았어요. 김 사장님이 당장 납품할 게 많은데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고 하고, 이번에 두 분 안 잡으면 후회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에이전트 케이한테 조금 미안해진다. 어떻게든 계약 성사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의심했다는 것이 민망하다.
“김 사장이 조율을 잘한 것 같네. 리베이트 얘기할 때도 한참을 얘기하던데, 왕 종이 불만이 많았어?”
“네네, 맞아요. 왕 종징리가 3프로가 관례라고 계속 얘기하니까, 김 사장님은 단가가 괜찮으니까 양보하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왕 종징리는 발주 물량이 얼만데 이거밖에 안 되냐고 그러고, 김 사장님은 1프로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하하. 뒷돈 좋아하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네. 김 사장이 통역을 다 안 해 줘서 궁금하긴 했는데, 내가 할 협상을 대신 해 준 것 같군.”
“네. 통역한 것도 제가 들은 거랑 약간 차이가 있긴 한데, 단어 차이 정도라서 맥락은 잘 전달된 것 같아요.”
에이전트 케이는 가서 도장만 찍으면 된다면서 계약 체결에 자신감을 보였었다. 그러나 말과 달리 왕 종이 다 된 밥을 뒤적거리니, 좀 당황한 모양이다. 뭐 그 덕분에 열혈 협상가로 변신했으니, 나나 박 사장에게는 다행이긴 하다.
“잘했어. 내일도 잘 부탁해. 근데 씻었니? 얼굴이 너무 기름진데?”
“아직 못 씻었어요. 하하.”
“빨리 들어가서 씻고 쉬어. 좀 이따가 박 사장이랑 맥주 한잔할 건데 당기면 여기 있어도 좋구.”
“두 분이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전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헤헤.”
민희를 올려 보내고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소파에 앉아 있는데, 유리 재떨이가 눈에 띈다.
흡연에 자유로운 나라라 이건 좋군. 실내에서, 그것도 소파에 앉아 담배 피우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냄새가 빠질 때쯤 박준희 사장이 당도했다.
헐렁한 면티에 냉장고 바지 같은 팬츠. 막 입어도 이태리 디자이너의 기운이 느껴지네.
“오래 기다렸어요? 맥주 시원한 걸로 주세요. 샤워했더니 마구 당기네요.”
시원한 것이 당길 때는 사이다가 최고지 않나? 술을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그 기분을 모르겠다. 이 맛없는 것이 당기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한 부장님이랑 민희 씨는요?”
“한 부장은 특명을 받고 술상무 하러 갔고, 민희는 피곤해서 쉬겠다네요.”
“술상무요? 왕 종이랑 술 마시러 간 거예요? 왜 저한테는 얘기 안 했어요?”
“누나가 가면 안 되는 곳이라서요. 하하.”
“아하. 한 부장님 고생하네요. 고생이 아닌가? 하하. 근데 정수 씨는 왜 안 갔어요?”
“저는 술을 못 마셔서 술상무 노릇 잘 못해요.”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 아니에요? 호호.”
내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박 사장 생각해서 덕준이를 대신 보냈더니만, 나를 대현자 미하일로 톨로토스 취급하다니 원.
내 대타로 투입된 덕준이는 지금쯤 독한 술로 운을 띄우고 있겠군. 슬슬 미쳐 가는 덕준이 타임이 시작될 것이다.
“정수 씨, 혹시 선물도 준비했어요?”
“네. 알아보니까 술이나 담배가 제일 무난하다고 해서 면세점에서 산 발레타인30년 하나, 덕준이 편으로 보냈어요.”
“잘됐네요. 저는 담배로 준비했어요. 중국이 담뱃값이 천차만별이라 고급 담배 선물로 주면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내일 줄 거라서 미리 말씀드리는 거니까 놀라지 마세요.”
“역시 준비성이 철저하시네요. 담배는 언제 샀데요?”
“아까 김 사장님 직원한테 부탁했죠. 근데 무슨 담배가 그렇게 비싸요? 한 보루에 20만 원 정도 하던데요?”
“20만 원요? 혹시 제 것은 없나요? 하하.”
그냥 던진 말인데, 박 사장이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흡연자가 죄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라? 가방에 손을 넣는 것이?
“와! 감사합니다.”
“직원들 주려고 한 보루 더 샀는데, 혹시나 해서 한 갑 빼 왔어요. 한 갑에 2만 원짜리예요!”
“중화? 되게 중국스러운 이름이네요. 폐 건강을 위해서 맛있게 피우겠습니다.”
“피우고 싶으면 피워도 돼요. 매일 맡는 게 담배 냄샌데 뭐.”
“하하. 저도 눈치는 있습니다.”
바로 뜯어서 한 대 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데, 참아야지. 이따 방에 들어가자마자 끽연할 테다!
“정수 씨는 오늘 미팅 어땠어요?”
“저야 물량만 확실하면 아쉬울 것 없죠. 대금 결제가 관건이긴 한데, 김 사장님이 잘 조율할 것이라고 봐요.”
“아까 김 사장님이 슬쩍 얘기하는데, 우리 견적이 맘에 들었나 봐요. 기존에 물건 받던 업체하고 별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같은 조건이면 우리 것 수입하는 것이 훨씬 좋죠.”
“그럼 내일 오전에 대금 결제만 잘 밀어붙여서 계약서까지 쓰죠.”
박 사장이 물방울 송송 맺힌 컵을 들어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맥주 마시는 것 보니까 갑자기 목이 마른 느낌이다. 이럴 때 나도 한 잔. 크윽. 맛없어.
“첫 번째 업체부터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내일도 얘기 잘해서 협상 잘 이끌어 내자고요. 자, 짠!”
방금 원샷했는데, 또 원샷하게 생겼다. 우리 누나 기분 좋다는데 마셔 주지 뭐. 나도 기분 좋은 것은 마찬가지니까.
“내일 만날 사람에 대해서 들은 것 좀 있어요? 저는 김 사장님이 짐만 챙겨서 오면 된다고 해서 진짜 짐만 챙겨 왔네요.”
“전장트슈얼삐엔야치? 저도 잘은 몰라요. 김 사장님이 거기도 잘 얘기해 놨다고 해서 그냥 믿고 있어요. 근데 확실히 예전처럼 한자음으로 읽는 것이 편하긴 해요. 정수 씨도 그렇지 않아요? 주윤발이어야지 저우룬파라고 하면 어색하지 않아요?”
“역시 누나 세대는 그게 편하겠죠.”
눈에서 나오는 섬광이 매섭네. 근처에 있었다면 등짝 스매싱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하. 저도 따거는 주윤발이죠. 근데 필리핀 수출할 때도 이렇게 수월했어요?”
“필리핀이야 전력 회사랑 계약한 거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어요. 우리 회사 와서 공장 둘러보고 나서도 한참 뒤에 계약했거든요. 왕 종은 당장이라도 계약했으면 하는 눈치 같더라고요.”
“저야 경험이 없으니까 혼자였으면 이것저것 많이 따져 봤을 것 같은데, 누나가 옆에 있으니까 듬직합니다. 하하.”
“그놈의 누나 타령은…….”
맥주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어느새 빈 병이 3병까지 늘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게 눈 감추듯 사라지네.
알코올 섭취량이 늘어나서 그런지 저 헐렁한 면티 때문에 시선 처리가 애매해진다.
박 사장이 자세 고쳐 앉을 때마다 얼핏 보이는 Y골이 상상력을 무한으로 증폭시킨다. 떡볶이 먹으러 갔다가 ‘현수도 하고 싶은 것 해’라는 말을 들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