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71)
171 자매님
아침에 눈 뜨기가 너무 힘들었다. 과음의 후폭풍이 쓰라리게 느껴졌다. 아이고, 두야. 아이고, 속이야.
체육대회 우승 기념으로 금요일 저녁부터 새벽이 찾아올 때까지 부어라 마셔라 노래를 불렀다. 1차로 소 한 마리 잡고, 2차로 오크통 수십 개를 해먹었다. 횡단보도를 사다리인 양 타며 네 발로 기어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정신이 나갈 위기 상황에서도 분명 양치는 하고 잤는데, 일어나니 입에서 술 냄새가 진동한다. 혓바닥을 아무리 닦아도 술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이 몰골과 악취로 백화점을 가야 한다.
오늘은 혁신산단 이정용 과정과 유아란 대리 옷 사 주겠다고 약속한 날이다. 고작 술 때문에 어찌 파투를 낸단 말인가! 그냥 알아서 사 입고 영수증만 보내라고 하고 싶다. 이 나약한 녀석.
혹시나 불안한 마음에 아침부터 대리운전을 불렀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아침에 음주운전으로 걸렸다는 기사 많이 봤다. 술 마셨으면 운전할 생각을 말아야지.
“사장님! 하하하. 아니, 얼굴이 왜 이렇게 부었습니까? 어제 엄청 달리셨나 봅니다?”
만나자마자 인사조차 까먹을 정도로 충격적인 몰골인가 보다. 그래도 나름 씻고 향수도 뿌리고 챙겨 입고 왔는데, 부은 얼굴은 어떻게 안 되는구나. 아무 말 안 하고 웃고만 있는 유 대리가 어째 더 얄밉게 느껴진다.
“아휴, 우리 회사가 우승했습니다. 우승했는데 가만있으면 됩니까? 달려 줘야죠. 어제 너무 달렸나 봅니다.”
“몇 시까지 드셨길래 얼굴에 그렇게 피곤함이 가득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전 3시까지 버티다가 힘들어서 카드만 주고 도망쳐 나왔어요. 우리 직원들 진짜 술로는 어딜 가도 질 사람들이 아니에요. 카드 결제된 거 보니까 이백 얼마 나왔더라구요.”
어제의 아찔한 기억이 다시 되살아난다. 직장까지 내려간 흡입물들이 다시 올라오는 기분이다.
“힘드시면 말씀하지 그러셨어요. 이거야 뭐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저는 약속하면 무조건 지킵니다. 몰골이 이래도 상태는 멀쩡합니다.”
“유 대리, 사장님 힘들어 보이니까 옷 너무 오래 고르지 말자.”
혁신산단 패밀리의 배려로 쇼핑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속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 유 대리가 2층 여성복 코너에 진입하자마자 표정 관리가 안 되긴 했지만, 결정은 생각보다 빨랐다.
“어휴야, 옷이 날개네.”
“옷이 날개라니요. 금상첨화겠지요. 대리님, 그 옷 맘에 드십니까? 옷 골고루 입어 보셔도 됩니다.”
오고 가는 칭찬 세례에 유 대리가 아주 환하게 웃는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걸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진귀한 광경일세. 베이글이라는 덕준의 평가가 자꾸 아른거려서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짐승 같은 놈. 뭘 확인하겠다고.
“죄송한데, 다른 옷 한 번만 더 입어 볼게요.”
“얼마든지요. 대리님 돈으로 산다고 생각하시고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매장에 있는 가을 신상을 다 입어 볼 것으로 각오했으니, 두어 번 입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백만장자 에드워드 루이스와 귀여운 여인 비비안 워드가 된 기분을 만끽들 하자고.
“과장님, 기다리기 지루하시죠?”
“하하. 아닙니다. 쇼핑 오면 일상 아닙니까?”
“사모님 드릴 옷도 한번 골라 보세요. 본인만 새 옷 들고 가면 서운해하실 것 아닙니까?”
“제 와이프 것을요? 아이고, 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솔직히 이것도 부담인데, 어떻게 그럽니까?”
예의상 나오는 거절이면 1절만 해 주면 좋겠다. 실랑이하기엔 오늘 내 체력이 썩 좋지 못하다. 안타깝게도 2절까지 거절 노래를 부르다 이 과장이 마지못한 척 와이프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사장님, 저, 이 옷으로 해도 될까요?”
앙칼져 보이던 유 대리가 수줍은 표정까지 짓는다. 옷 선물이 유 대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구나.
“맘에 드시면 그걸로 하시죠. 다 보셨으면, 과장님 좀 도와주세요. 사모님 옷 한 벌 고르라고 했는데, 괜히 애먼 걸로 할까 봐 걱정이네요.”
옷 두 벌을 시원하게 긁었다.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중장년 전문 매장에서 유 대리 어머니 것도 한 벌. 총 183만 원이 청구됐다. 천 쪼가리가 거참 비싸네. 브랜드의 가치가 이런 것인가? 여성복 세 벌에 50kVA짜리 변압기 두 대가 날아갔다.
3층 남성복 코너에서는 이 과장이 신 났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나도 모르게 내 옷을 고르고 있더라. 옷에 별 관심이 없다고 되뇌었지만, 자기 최면이었을까?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이 나를 위한 옷인 것처럼 다가왔다.
“사장님, 그것보단 이게 더 나아 보여요. 이걸로 한 번 입어 보세요.”
20대 젊은 감각 유 대리의 코디에 충실히 따르면서 살아 있는 마네킹이 됐다. 신이 나서 그런지 과음의 후유증이 싹 사라진 기분이다.
이 과장과 내 옷, 그리고 유 대리 아버지 옷까지 또 세 벌을 질렀다. 174만 원. 100kVA짜리 변압기 1대가 날아갔다.
그나마 텍에 붙어 있는 가격에서 크게 할인이 들어가 변압기 1대로 그쳤지, 아니었으면 2대는 날아갔을 것이다. 이렇게 할인해 줄 거면서 왜 그렇게 가격을 높게 매긴 거야?
뭐 변압기 몇 대가 날아간들, 고마운 사람에게 선물해 주는 것이니 기분은 좋다.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야.
“사장님, 감사합니다. 와이프도 너무 좋아할 것 같습니다.”
“사장님, 고마워요. 해 드린 것도 없는데 너무 과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아요.”
이런 말 듣겠다고 내가 여기 온 것이 아니겠나! 후훗.
딸랑 선물만 주고 바이바이하면 정이 없다. 밥까지 든든하게 먹여야지. 과음으로 속이 부대낄 때는 느글느글한 피자 앤 파스타!
“과장님! 표정 관리가 너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거 같이 다니니 좀 창피한데요? 하하.”
“하하하.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다음 주에 결혼기념일이라 뭘 해 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와이프가 너무 좋아할 것 같네요.”
“어머, 과장님. 이걸로 퉁치시려구요? 그럼 안 되죠. 이건 이거고, 과장님은 과장님대로 선물하셔야죠. 그래도 결혼기념일인데.”
“유 대리, 목소리 톤이 높아진 것 보니까 좀 진정해야겠어? 뭐 부담스럽니 어쩌니 하더니 젤 좋아하는 것 같어.”
“아니거든요. 그냥 덤덤해요. 그래도 사장님, 진짜 감사합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에 그냥 있기 뭐 해서 말 한마디 내던졌더니,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논두렁 밭두렁이다. 둘 다 기분이 좋으면 됐지 뭐.
“제가 진작부터 두 분께 뭐라도 성의 표시를 해야겠다고 맘먹었는데, 이제야 그걸 지키네요. 이제 좀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기분입니다.”
“저야 월급 받으면서 하는 일만 했을 뿐인데요 뭐. 유 대리 덕에 저까지 호강했습니다. 유 대리 고마워.”
이 과장의 솔직한 답변이다. 이 과장이 우리 회사가 잘되라고 많은 도움을 준 것은 맞지만, 본인의 역할 안에서 최선을 다해 준 것이니까 말이다. 그것도 무척 고맙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큰 도움을 준 것은 유 대리다.
공장 착공이 마냥 지연돼 대한전력 입찰에 못 들어가면 어쩌나 걱정이 한 소쿠리로 쌓였을 때, 유 대리가 도지사 면담을 성사시켜 주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인천 임대 공장에서 한 달에 겨우 몇 대 나가는 민수변압기로 근근이 버티며,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냐고 한탄했을 것이다. 그러다 업계 1위 땅콩머니에 손을 벌렸을지도. 지금까지도 사채 빚 갚느라 허덕이고 있었을지 모른다.
유 대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주 고마운 사람이다. 문제는 그저 고마움의 표시인 것을 부풀려서 어떻게든 엮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 오늘 덕준이가 없어서 그런지 이 과장이 쓸데없는 소리를 안 하는 것은 다행이긴 하다.
“그나저나 제가 눈치 없게 여기 계속 앉아 있었던 것 아닙니까? 하하.”
이상하게도 생각만 하면 반대로 이뤄지더라니, 오늘도 여지없네. 이 과장이 또 쓸데없는 소리를 남발한다. 호감이고 나발이고 난 아직 느낌이 안 온단 말입니다. 연애는 소울이 느껴져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 과장님 또 시작이네요. 하하. 대리님, 신경 쓰지 마세요.”
“과장님이 오늘 너무 신 나셔서 저러시는 것 같아요. 며칠 전부터 계속 저런다니까요. 과장님, 딱 거기까지만 하세요.”
유 대리가 원래의 앙칼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호감이 있기는 개뿔. 전혀 없어 보이는구만. 처음이야 장난으로 받아넘겼지 반복되면 화가 나는 법인데, 살짝 임계치에 도달했다는 느낌이다. 이럴 땐 빨리 화제를 전환해야 해.
“과장님은 주말에 애 보실 거고, 대리님은 주말에 뭐 하세요?”
“저요? 뭐 똑같죠. 친구들 만나서 영화 보고 저녁 먹고 그래요. 주일에는 교회 가구요.”
“저는 천주교 신잔데, 그냥 집에서 자가 기도합니다. 하하.”
웃으라고 한 소린데, 유 대리가 그건 아니라는 표정이다. 음, 그래그래.
“그러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교회 나가세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면 한 주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에요. 천주교는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죠?”
“천주교나 기독교나 똑같은 종교죠. 그냥 종파가 다르다 정도겠죠.”
“그래요?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다고 하던데요. 다음에 저희 교회 한번 나오세요. 주일에 교회 가면 하루가 금방이에요.”
괜히 얘기를 꺼낸 것 같다. 포교당할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문득, 중딩 때 멋모르고 당했던 일이 기억났다. 오지도 않은 삐삐 음성 메시지 확인하겠다고 공중전화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교복 입은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정말 예뻤다. 보는 순간 이것이 사랑인가 싶을 정도로.
그 여인에게 홀려 간 곳은 어느 교회였고, 거기서 난 안식일이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이라는 설명을 들어야 했다. 정신 차리고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려면 원하는 대답을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반응은 내 생각과 달랐다. 나를 깨친 사람이라고 치켜세워 주며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성경에서 세례는 물을 끼얹는 것이라며, 나를 교회 한편에 마련된 욕조로 데려갔다. 교회 사람들이 불러 주는 찬송가를 들으며 난 물벼락을 맞았다.
물에 젖어 척척한 교복을 입고 집에 오는데 많이 부끄러웠다. 팬티까지 젖었다는 사실에 화도 났다. 내 소중이는 습도에 예민하단 말이야! 나중에야 그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돼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동안 종교에 대한 회의가 가시질 않았다.
괜히 화제 돌리려다 주님의 은총과 예수의 재림을 논하게 생겼다. 빨리 다른 얘기로 돌리자.
“과장님은 주말에 애 보기 힘드시죠?”
점심까지 곁들인 선물 증정식이 그렇게 마무리됐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할 도리는 다 했다. 명절마다 잊지 않고 소고기며 홍삼이며 선물 세트 보내고 있고, 유 대리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시민 단체에 후원금도 보냈다.
집에 도착하니 유 대리의 고맙다는 깨톡이 날아왔다. 예의상 답문 보내 주고, 그렇게 몇 번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다 뜻밖에도 유 대리의 고백이 나왔다. 어머.
유 대리는 이 과장이 하는 얘기가 장난으로 그러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며, 고백을 이어 갔다. 교회 오빠와 좋은 감정으로 ing 중이라는 고백. 유 대리가 신경 많이 쓰인 모양이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투머치인포메이션이라니.
이제 난 도리도 다했고, 헛발질 큐피드들의 준동에서도 해방이다. 딱히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역시 자매님은 형제님과 만나야 하는 법이지. 나 같은 냉담자하고는 인연이 될 수 없어. 뭔가 홀가분하네.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말 내내 시체놀이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오니 쌓인 피로에 꿈쩍도 하기 싫더라.
귀찮아도 유리한테서 연락이 오면 살짝 고민하더라도 결국 나갈 것이라고 마음은 먹고 있었는데, 연락도 없네.
학기 막바지라 바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서운하다. 다음에 보면 서운한 감정을 담아 밤새 혼내 줘야겠어.
생각지도 않게 박준희 사장이 체육대회 때 고생 많았다며 푹 쉬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저 덤덤한 내용이었지만,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가득 담긴 문자였다.
알게 모르게 박 사장이 내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은 것인가? 모르겠다. 일단 쉬자.
이러니저러니 해도 직장인들에게 주말이란 체력 충전의 날일 뿐이지. 집에서 목 늘어난 티셔츠 입고 팬티 바람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