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98)
198 송도삼절
여전히 낮에는 30도를 웃도는 더위가 이어졌지만, 느낌은 상대적이다.
37~38도를 가뿐히 넘긴 8월의 폭염을 겪고 나니 30도 정도는 너무 추워서 패딩을 껴입을 정도다. 더군다나 아침저녁으로는 꽤 선선해졌다.
선선해졌다는 것은 회의 계절이 찾아왔다는 뜻이다. 농어를 시작으로 9, 10월 전어, 대하 대환장 파티를 거치고, 겨울에 접어들면서 전통의 강자 광어로 시작해 겨울철 최강자 방어로 마무리하는 회 퍼레이드.
민희가 용케도 횟집으로 안내했다. 제철이라고 하기엔 살짝 애매한 시기이지만, 예열하기에 더없이 좋은 선택이다.
“밥은 안 먹고 술로 직행이네?”
“술 사 준신다고 했지, 밥 사 준신다고 안 하셨잖아요? 밥이야 안주빨 세우면 돼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너 아름이랑 대학 친구지?”
“아뇨. 고딩 때부터 친구였어요.”
“둘이 참 안 어울리는데도 같은 대학 들어가면서까지 친구로 지내는 거 보면 신기하네.”
“푸히히.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아름이가 저 중국에서 와서 적응 못할 때 제일 많이 챙겨 줬어요. 지금은 누가 뭐래도 베프예요.”
민희가 허리를 숙여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이건 뒷담화할 때는 쓰는 포지션인데?
“근데요, 사장님. 아름이 걔가 완전 내숭이에요.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니긴 해도 회사에 있을 때처럼은 아니에요.”
“일만 잘하면 됐지. 난 너보다 아름이가 더 이뻐. 그나저나 둘이 어떻게 대학까지 같이 들어갔냐?”
“외모는 제가 훨씬 낫거든요? 이건 아름이도 인정하는 거예요. 학교에서도 제가 더 인기 많았다구요. 맞다, 학교. 사장님은 이 동네 잘 모르시죠?”
“나주 온 지 2년밖에 안 됐는데 알아야 얼마나 알겠니?”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가 대부분 그래요. 공부 좀 하는 애들은 서울로 가고, 나머지는 갈 만한 곳이 별로 없어서 전대 아니면 조대예요. 우리 대학으로 동기들 백 명 넘게 들어왔을걸요?”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난다.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등록금 싼 국립대인 전대로 가고, 조금 떨어지면 사립대인 조대로 간다는 얘기 말이다.
“잘하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쭉 같이 올라갈 수도 있겠네?”
“그건 쉽지 않구요. 고딩 때 친구들 어지간하면 같은 학교로 가니까 친해지면 계속 가는 거죠. 암튼 아름이 걘 내숭이에요. 속지 마세요.”
내숭이든 뭐든 일은 잘하니까 내가 알 바는 아니고. 술이나 마시자. 회 먹기 전에 식도를 소독해야 하니까.
한 잔 따라 주고 자작하니, 민희가 펄쩍 뛴다.
한국의 8대 미스터리. 자작하면 맞은편 사람이 3년 재수 없다인가? 3년간 솔로란 사람도 있고, 3년밖에 못 산다는 사람도 있고. 저주도 제각각이다. 그 자체가 미스터리다.
“사장님! 왜 그러세요!”
“내가 불편해서 그래. 여자한테 술 따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니고, 술 따라 주고 받는 게 불편하지 않아? 그냥 편하게 마시면 되는 거잖아.”
“에이, 그래도 그러면 안 돼요. 저 앞길이 창창한데…….”
미스터리 신봉자로군. 올 여름 이 무더위에 선풍기 안 틀고 자느라 고생 좀 했겠네. 이따 혈액형도 물어보겠지?
“앞길 창창한 애가 왜 그러냐?”
“네? 뭐가요? 제가 뭐 어때서요!”
“오늘은 술 살살 마셔라. 헤롱거리면 놓고 가 버릴 거다.”
“안 그러실 것 다 알거든요?”
마냥 기분 좋아 보이고 해맑은 저 애를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싹을 밟아 줘야 하는데, 지금 꺼내자니 너무 초반이고, 적당히 분위기 무르익었을 때는 술이 걱정된다. 내가 서경덕도 아니고 황진이의 공세를 이겨 낼 수는 없을 테니까.
“민희 너 요즘 일 별로 없지?”
“아니에요. 나름 이것저것 해요.”
“중국 수출은 보름에 한두 번 전화만 받으면 되잖아? 그거 말고는 딱히 할 것도 없고.”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동남아 나라들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사도 하고 그래요. 해외 영업인데 중국만 하고 말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김 대리님이 TF 일 많이 몰아 줘서 그것도 부지런히 하고 있어요.”
“잘하고 있네? 당분간은 아니어도,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수출 확대할 생각이니까 미리 공부 좀 해 둬. 동남아는 기본이고 미국하고 유럽도 가야지.”
일 잔뜩 안겨 주는 것인지도 모르고 칭찬해 줬다고 좋아서 헤벌쭉이다. 칭찬을 줄여야겠군.
“근데, 사장님. 아까 오신 분은 누구세요? 말 들어 보니까 다음 주부터 와서 일하신다고 하던데요.”
“새로 오신 상무님. 대한전력에서 엘리트 코스 밟은 분이니까 기회 있을 때 많이 배워 놔.”
“우리끼리 좋았는데, 아쉽다.”
“넌 인마, 회사가 빨래터 수다 떠는 곳이냐? 일 열심히 하니까 뭐라 안 하지만. 저걸 진짜.”
칭찬해도 헤벌쭉이고, 구박해도 헤벌쭉이다. 저 환각 상태를 빨리 깨 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너 요즘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이유가 뭔지나 알자.”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뭐 잘못된 거예요? 그냥 팬덤 정도로 생각하세요.”
“너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 보면 거의 사생팬 느낌인데?”
“푸히히. 아, 뭐예요.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선 잘 지키고 있다구요.”
말만 하면 자지러지게 웃는 것이 환각 상태가 꽤 심한 것 같다.
싱글싱글한 20대와 연애를 늘 꿈꿨지만, 이건 아니다. 도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깜빡이 없이 쑥 들어온 차를 무작정 받아 버릴 수는 없다. 사고 나기 전에 피해야 하는 것이 방어운전의 기본이지.
“팔짱 끼는 척 가슴 공격하고 껴안는 게 선 잘 지키는 거라고? 남자들도 다 알거든요?”
“에이, 알고 계셨네? 원래 연예인들 지나가면 막 달려가서 여기저기 만지고 그래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하고, 앞으로 쓸데없는 생각이나 행동 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 퇴근하면 괜찮은 남자 만나서 연애도 하고.”
민희가 소주 한 잔을 원샷하고는 입을 열었다. 진부한 패턴이네.
“일 열심히 하고 있구요. 처음에 아름이가 우리 회사 다닐 생각 없냐고 했을 때 그런데 왜 가냐고 했는데, 와 보니까 여기서 일하길 잘했다 생각하고 있어요.”
“그건 잘 생각했네. 내가 후회 안 하게 대우해 줄게. 일만 잘하면 말이야.”
“그리고 괜찮은 남자 만날 거예요. 그게 사장님이었으면 좋겠어요.”
이젠 거침이 없다. 소주 서너 잔밖에 안 마셨는데, 술김을 너무 빌리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대체 뭐에 꽂혀서 그러는지 모르겠네. 뭐가 됐건, 난 사장이고 넌 직원이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민희가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이 대사를 아는지 모르겠다. 이 드라마 방영했을 때 민희가 11살이니까 알 법도 하겠네.
“너무 선 그어 버리지 마세요. 제가 나름 필살기까지 선보였는데 그러는 거 아니에요.”
필살기? 팔짱 낄 때 감행한 브레스트 어택? 살면서 그 공격 여러 번 받아 봤는데, 단연 최고의 공격수는 박준희 사장이다. 그 뭉클함이 얼마나 궁금했는지! 민희같이 대놓고 공격하는 것은 하수에 불과해.
“푸하하. 그게 필살기야?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뽕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물 반 고기 반이었달까? 민희도 지지 않고 대꾸한다.
“안 그렇거든요? 알고 나면 깜짝 놀랄 거예요. 이걸 보여 줄 수도 없고. 아오.”
누가 보면 썸 타는 사이로 오해하겠다. 권위주의 없고 격 없이 지내는 사장의 모습을 구현하려 노력한 결과가 이 모양이다.
일에 관한 것이 아닌 이상 이런 모습은 좋다고 생각한다. 회사는 성과로 평가하는 곳이니. 민희가 말은 저렇게 해도 업무 시간에는 선을 넘지 않는다. 그거면 됐다.
근데 뭐 하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원. 그냥 적당히 알던 사이가 얘기하다가 이런 대화로 흘러가면 더없이 좋겠지만, 이 자리는 그럴 상황이 아니다.
“알고 싶지 않고, 네가 서운하게 생각해도 별수 없어. 회사 일로 신경 쓸 것도 많은데, 내가 꼬맹이 직원 문제로 골치 아파야겠니?”
“알겠으니까요, 선 긋지 마세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예요.”
묵묵히 술잔을 홀짝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민희가 환각에 빠진 원인이 뭘까에 대해서 말이다.
채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같이 중국 출장을 다녀왔다. 그리고 얼마 뒤에 또 다녀왔다. 그 뒤로 수출 일로 회의한 것 정도가 다다. 오해할 만한 행동도 하지 않았고, 여자로 느끼고 야릇한 눈빛을 보낸 적도 없다. 거참.
“다른 얘기나 하자. 나는 안 흔들릴 것 같으니까 괜히 헛수고하지 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봐야 하는데 불편하게 만들지 말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보려구요? 푸힛.”
집요한 녀석. 네 감정이니 네가 알아서 해라. 난 모르겠다.
“너 광주에서 출퇴근하려면 힘들지 않아?”
“진아가 힘들죠. 저야 뭐 옆에서 편하게 차 타고 다니잖아요.”
“카풀도 처음이나 편하지. 나중에는 잘못하면 서로 감정 상하고 그럴 텐데.”
“안 그래도 월급 받으면 맛있는 것도 사 주고, 기름도 넣어 주고 그래요. 사장님은 혼자 사시지 않아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이젠 귀엽다. 그냥 2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초반의 생기발랄함이 그렇게 느껴진다. 동갑인 아름이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쾌활함이다.
“뭐 혼자 사니까 남는 방에 들어오겠다 그딴 소리 하려고 그러지?”
“푸히히.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우리 사장님은 촉이 장난 아니에요. 다른 직원들이 사장님보고 신내림 받았다고 하는 거 아세요?”
“이젠 내가 무당까지 된 거냐?”
“저는 잘 모르는데, 김 대리님이 그래요. 하는 것마다 대박 터지고, 장난 아니라구요. 우리 사장님 완전 짱이라구요. 멋있다.”
진짜 팬덤인가 싶네. 이러다 우유 빛깔 지정수라도 되는 것이 아닐까 우려스럽다.
“이상한 소리는 됐고, 출퇴근 힘들면 사택 신청해. 월세 지원해 주니까 부담은 없을 거야. 아파트는 아니어도 살 만한 집 구해 주니까 불편하지도 않을 거고.”
“안 그래도 아름이랑 진아한테 같이 살자고 얘기하는데, 아름이네 집이 엄해서요. 근데 사택 받으면 출퇴근비는 안 주는 거죠?”
“둘 중 하나만 해야지. 욕심 내지 마. 내년에 월급 많이 올려 줄 테니까. 근데 너랑 진아랑 둘이 살면 되지 않아?”
“뭐 그래도 되는데, 좀 그래요. 그런 게 있어요.”
“그래 뭐, 알아서 해. 회사가 숙식은 확실하게 책임져 주니까 언제든 얘기하고.”
직원들끼리 두루 친하게 지내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감정이 안 좋거나 갈등이 불거진 것은 아니니, 모른 척하고 있어야겠다.
“오늘은 아름이한테 뭐라고 하고 온 거야? 둘이 서로 잘 아는 사이 아니야? 어디 가냐고 물어볼 것 같은데?”
“아름이도 알아요.”
“너네들 미쳤구나.”
민희가 내 입에 칼을 들이밀며 ‘와이 쏘 시리어스’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이다. 노래방 가면 ‘당돌한 여자’를 부를지도.
“괜찮아요. 저는 아름이한테 다 얘기해요. 아름이 아시잖아요?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닐 애 아니잖아요.”
“그래서 아름이는 뭐래?”
“사장님 만나는 사람 있는 것 같다고 하던데요? 소개팅 한 것은 잘 안 된 것 같다고 하고. 뭐 누구 있으면 어때요? 여자는 자신감 아닙니까? 푸하하.”
민희는 당연히 미쳤고, 내 연애사를 잘 아는 아름이도 미쳤다. 저것들 앞에서는 사장의 사생활도 없구나.
그렇게 계속 날아오는 추파를 온몸으로 막으면서 홀짝이다 보니 시간도 꽤 가고 빈 소주병도 2병이나 쌓였다. 확실히 회사 차린 뒤로 술이 늘긴 했어. 이젠 1병도 거뜬해.
“사장님!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 또 사 주세요.”
민희가 깊숙이 팔짱 끼고 공격을 감행하며 아양을 떤다. 몸에 개미라도 기어가는 것처럼 떨면서 떨쳐 냈다. 그런 공격은 나한테 안 통해.
“저리 가라. 확 그냥.”
“좀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안 돼. 그리고 혁신도시에 스파이들 얼마나 많은지 알어?”
유리랑 영화 보러 갔다가 대한전력 송정길 과장 만난 이후로 혁신도시에서는 품행을 조심해야 한다. 소문이란 무서운 법이다.
“그럼 마스크라도 사 올까요? 푸하하.”
“미쳤네 아주. 딱 1절만 해라. 2절, 3절까지 하면 기어오르는 거다. 아우 쫌! 저리 가.”
술을 마셔서 그런지 민희 공격이 살짝 통하는 느낌이다. 저 애는 어떤 느낌일까? 뽀얀 얼굴만큼 옷으로 감춰진 속살도 뽀얄까? 이런 생각 하는 것 자체가 술의 무서움이다.
그래도 난 이겨 냈다. 오늘만큼은 내가 나주의 서경덕이다. 황진이가 와도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