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61)
061 셀럽
이번 주 목요일 드디어 대한전력 첫 발주가 나온다.
대한전력은 연간 단가 계약을 체결하고 나면, 매월 3일과 18일에 30일 납기로 자재를 발주한다. 8월에 입찰이 끝나면, 9월 3일에 10월 3일 납품 조건으로 발주를 주는 것이다. 그렇게 이듬해 9월 18일 납기까지 총 24번 발주를 준다.
납기가 1달이지만, 사실 보름이나 마찬가지이다. 납품 전에 시험 신청을 해야 하는데, 그게 납품일 9일 전까지이기 때문이다. 납품 9일 전까지 모든 제품 제작과 자체 시험까지 끝나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럼 발주 확인하자마자 바로 생산 들어가서 2주 만에 검사로 넘겨야 한다. 검사할 시간도 3~4일은 족히 걸리니 말이다. 쉽지 않은 미션이다.
가장 큰 문제는 발주량이 매번 들쑥날쑥하다는 것이다. 내가 받은 물량이 7만 대니까 한 달에 5,900대씩 만들면 되겠구나 생각했다가는 아이고 두야, 두통엔 펜잘이냐 게보린이냐 고민하는 상황이 온다.
대한전력은 절대 그렇게 발주를 하지 않는다. 예측조차 안 된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간담회를 하면 매번 나오는 얘기가 발주 좀 균등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대한전력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가을까지 이듬해 배전망에 대한 설계가 끝나면 구매 부서가 이를 바탕으로 각종 자재를 발주하는데, 구매 부서는 신참들이 가장 먼저 거치는 곳이라 힘이 없다. 그저 설계 나온 대로 발주 때려 버린다.
여기에 더해서 중소기업 실적 도와준다고 연말까지 물량을 추가로 쏟아 낸다. 도와주겠다면서 사람 죽이는 꼴이다. 계획보다 많이 발주를 냈다 싶으면 다음 발주를 뚝 끊어 버린다. 대한전력의 물량이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것이다.
첫 발주에서 몇 대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드넓은 공장에 3,500대가 마련돼 있다. 자신 있다.
자신감을 펌프질하며 전의를 불사르고 있는데, 핸드폰이 허벅지를 심하게 강타하며 울부짖었다. 아휴 놀래라.
예전보단 덜하지만, 전화만 걸려 오면 가끔씩 화들짝 놀란다. 아직도 이전 회사에서 겪은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은 모양이다.
태양전기 다닐 때 정말 전화 징글징글 징글벨이었다.
* * *
“주임님. 아니, 그 정도는 스스로 하시면 안 됩니까? 제가 노는 사람도 아니고, 좀 그러네요.”
“우리는 생산만 하는 사람이야. 우리가 생산이 막히지 않도록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 줘야 하는 사람이 지 과장이라고!”
“제가 자재 관리하는 사람이지 시다바리는 아니잖아요. 저도 제 일이 있는데 무슨 종 부리듯이 그러면 어떡해요.”
“아니, 그러면 내가 전화 안 하게 해 놓으면 되잖아! 무슨 전화 한 번 했다고 그렇게 눈 부릅뜨고 나 잘났으니 그러는 거야!”
전화 한 번이라고? 통화 목록 좀 보여 드릴까? 아휴. 말을 말지.
그냥 당하고 말겠다고 작심하면 또 꼰대 부장이 득달같이 달려와 불씨를 키운다.
“무슨 일이야?”
“아니 지 과장한테 권선 좀 옮겨 달라고 전화 한 번 했더니, 이런 일로 전화를 하니 마니 하면서 저 난리잖아. 무슨 전화를 허락받고 해야 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뭐? 야! 너 하는 일이 뭐야! 뭐 상전이야? 전화도 하면 안 되는 상전이냐고!”
무거운 짐 옮기는 것이 내 일이야? 나 아니면 아무도 못하는 일이야? 참다 참다 한마디라도 하면 아주 오뉴월 개 얻어맞듯이 다구리당한다.
현장 직원들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사장은 나 몰라라 하고.
휴가라고 예외는 없다. 아침부터 어찌나 핸드폰에 불이 나던지. 전원을 꺼 놓고 싶을 정도였다. 전원 꺼 놨으면 왜 전화 안 받느냐고 더 난리 쳤겠지만.
나만 범선 바닥에 묶여 땅에 다다를 때까지 죽지 말자고 다짐하는 노예였지. 지들은 쉴 것 다 쉬고, 놀 것 다 놀면서 나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에잇, 생각을 말자.
전화나 받자. 띠용? 도지사?
“안녕하십니까, 도지사님.”
“지정수 사장님 잘 계셨습니까? 공장 준공했는데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를 했을까? 당연히 거쳐야 할 의례적인 이 인사들이 무척 지루해졌다.
“요즘 많이 바쁘시지요?”
“도지사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큰 어려움 없이 회사 잘 이끌고 있습니다. 이제 바쁠 일만 남았습니다.”
“하하. 회사가 나주에 잘 뿌리를 내린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본론! 제발 본론! 운도 안 띄운 이 대화를 이어 나가다는 신경 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내가 뭐라고 도지사가 직접 전화까지 하냐고!
“제가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습니다. 사장님 덕분에 좋은 정책을 만들게 됐는데, 사전에 허락을 미처 구하지 못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사장님께서 제게 말씀해 주셨던 의지와 포부를 우리 도의 청년 정책으로 고안했습니다. 예산 확보하고 나서 연락드리겠다고 한 것이 이리 늦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도지사는 내가 면담 과정에서 언급했던 청년 자립금 마련 저축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고, 결국 ‘희망 두 배 청년통장’이라는 제도를 시행하기로 했다.
중위 소득 80퍼센트 미만의 청년이 월 15만 원씩 적금을 들면 지자체와 기업이 15만 원을 추가 적립해 자립 자금 마련을 돕는다는 것이다.
내 아이디어이니, 모레, 그러니까 수요일에 열리는 정책 발표 자리에서 ‘희망 두 배 청년통장’ 1호 기업 협약식을 체결하는 것이 어떠하겠냐는 제안이었다. 비서 시키면 될 일을 굳이 직접 전화까지 하니 도지사도 보통 사람은 아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드릴 일입니다. 이렇게 직접 연락까지 해 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최종 결재권자인 제가 전화드리는 것이 당연하지요. 사장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이지요?”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애들 저금 부어 주느라 한 명당 월 10만 원씩 나가고 있는데, 전남도에서 일부를 지원해 주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으니 땡큐소마치 아닌가. 이게 또 이렇게 풀려 버리네. 좋다 좋아! 이제 전화 공포는 사라질 것 같다.
* * *
“상무님! 황 대리님하고 같이 가시죠? 제가 무안에서 세발낙지 사 드릴게요.”
도지사와 약속한 그날. 같이 데리고 갈 직원으로 상무네 부부를 택했다. 두 사람 말고는 동행할 사람이 없었다. 다들 물량전 대비에 정신이 없어 현장 들어갈 때마다 입에서 나온 단내가 가득할 정도였다.
“내가 제일 한가한가 보네. 쩝.”
지금까지 유일한 돈벌이를 책임졌던 상무는 민수 시장과 비교도 안 되는 관수 시장의 어마어마함에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 조강지처를 버리면 천벌을 맞지! 민수도 더 키울 테니까 서운해 마시라.
“한가해서 그러겠습니까? 지금까지 일만 하셨으니 같이 바람도 쐴 겸 사모님하고 데이트 좀 하구요. 좋지 않습니까?”
“허허. 사장님. 이건 꼭 명심해야 해. 정말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잖아? 잘돼 봐야 결혼이라고. 알았어? 잘돼 봐야 결혼이야! 명심해.”
무안에 있는 도청. 벌써 두 번째 방문이다. 저번 방문으로 든든한 동아줄을 받았는데, 이번 방문에서는 뭐가 나올지 기대가 된다. 금도끼 은도끼가 나오려나.
“사장님, 반갑습니다. 저번 1월 5일 공장 기공식에서 뵌 이후로 처음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도지사 디테일 쩐다. 준비한 것치고는 너무 자연스럽다. 정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가.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는 저희 회사 김희철 상무와 황미연 과장입니다.”
황 대리가 놀란 표정을 짓다 이내 잽싸게 감춘다. 이게 중소기업 직급 인플레입니다요. 이제 곧 과장 해도 충분하니 미리 불러 드리지요.
“네, 반갑습니다. 도지사 이승연입니다. 정책 발표식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차 한잔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좋다마다요. 도지사와 티타임 갖겠다는데 싫어할 사업가가 있을까?
로비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정치가와 사업가는 얽히면 큰일 나기 때문에 도지사가 나를 도와주겠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친분을 쌓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지 않나.
“6월이었지요? 나주 백지원과 취약 계층 인재 채용 협약식 맺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여기 오셔서 좋은 일 많이 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저희 회사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추진했던 것입니다. 너무 좋게만 봐 주시니 민망합니다.”
“잘 아실 겁니다. 이런 기업가 정신을 갖추고 사업에 임하는 분들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 차원에서 도움 드릴 일이 없어 제가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저와 직원들이 열심히 끌고 나가야지 누구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도지사님께서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시는 데 힘써 주시면 그게 저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하하. 일침이 따끔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도정이 부족함이 많겠지만, 항상 귀 기울이며 어려움이 없도록 힘쓰겠습니다.”
무난한 대화가 이어졌다. 뭐 딱히 부탁할 일도 없고, 있다고 해서 말할 상황도 아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힘나는 자리이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저희같이 사업하는 사람들이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물론 그러시겠죠. 총선은 정치인들에게 가장 치열한 싸움터입니다. 그만큼 주변에 피해도 많을 수밖에 없겠지요. 사장님께서 염려하시는 일이 없도록 공직 기강을 확실히 세우고자 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도지사 특유의 낮게 깔리는 저음이 두드러졌다.
“사업을 하다 보면 길을 몰라 헤매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항상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름길을 모르면 큰길로 가세요. 큰길을 모르면 직진하면 됩니다. 그것도 어렵다면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세요. 길이 나올 것입니다.”
찌릿하다. 이거 무슨 어록어록 열매라도 잡수셨나? 새겨 듣자. 내가 길을 몰라 헤매면 안 되지 않은가. 큰길. 직진. 생각. 성공적.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도지사님, 나중에 시간 되시면 보육원 출신 직원들에게 특강 한번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하. 좋은 생각이십니다. 우리 도민들을 위한 일인데, 마다할 리가 있습니까? 제가 보좌관한테 얘기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일정을 잡아 보라고 하겠습니다. 이거 시간이 벌써 다 됐군요. 짧은 시간이지만 사장님께 많이 배웁니다.”
정치인들은 다 똑같은 줄 알았다. 당리당략만 생각하고 싸우기 좋아하고, 선거 아니면 거만하기 이를 데 없고 말이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적어도 이 도지사만큼은 그렇지 않다. 역시 선입견이었다. 선입견으로 사람 판단하지 말자.
전남도는 전국 최초로 시행하는 사업이라며 홍보에 힘 좀 썼다. 정책 발표회 자리에 중앙 언론들도 몰려들었다. 한 청년 사업자가 제안한 것을 적극 받아들였다는 소개도 빠지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언론에 이름이 팔리게 돼 버렸다.
“사장님, 이제 유명 인사 되는 것 아니야? 셀럽이네 셀럽.”
세발낙지의 신묘한 맛에 빠져 한참 말이 없던 상무가 정신이 들었는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입천장에 쩍쩍 붙은 산낙지의 거센 힘을 맛보니 정신 차리기 힘들긴 하다. 오대수가 이걸 왜 통째로 먹었는지 알 것 같다.
산낙지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산 채로 잘게 다져서 대접에 넣고 밥이랑 양념장이랑 비벼서 먹으니 와, 세상에.
한 숟가락 집어넣고 반찬으로 젓갈 하나 우겨 넣고 된장국 한 모금 하니, 이거 무릉도원이 여기구나 싶다. 세발낙지만의 거센 힘과 부드러움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이거 정신 못 차리겠네.
“사장님! 내 얘기 들려?”
“아, 네네. 와, 이거 진짜 맛있네요.”
“쓰러진 소도 일으켜 세운다고 하잖아.”
“와, 상무님 내년에 셋째 생기는 겁니까?”
“사장님, 무섭게 왜 그래. 말이 씨가 된다고.”
너 오늘 죽었다는 표정을 짓던 황 대리도 한마디 곁들였다.
“사장님, 전 언제 과장이 된 건가요?”
“하하. 머지않은 미래에요.”
“하는 일도 없는데 월급만 오르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요. 호호. 그나저나 오늘 유명 인사 되셨으니 앞으로 골치 아프시겠어요.”
“뭐 유명인의 비애 이런 건가요?”
겨우 방역을 마무리하고 있지만, 또 새로운 날파리들이 창궐할지 모른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사업가란 투수는 한 명도 쉬어 갈 타선이 없는 팀과 상대하는 것이니 말이다.
상무가 평온하게 잠에 들었을지 궁금한 밤이 지나고, 대한전력의 공습일이 찾아왔다.
“사장님, 발주 물량 떴어!”
“어, 보고 있다. 와, 이게 몇 대냐?”
5,200대. 금액으로 60억 원. 이거 기뻐해야 하나, 죽었다고 복창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