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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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가 체스 말 하나를 앞으로 움직여 놓고 멍을 때렸다. 상대는 한참이 지나도록 말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상대가 말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세라가 다시 체스 말 하나를 집어 아무 데나 놓았다.
골똘히 딴생각에 빠져 있는 그녀는 눈앞의 승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에 함께 체스를 두고 있던 상대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세라.”
“응……?”
“체크야.”
“아……?”
게임이 끝났다는 말에 세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언제 끝이 났지……. 얼떨떨한 눈으로 체스판을 내려다보자 이미 누워 버린 그녀의 킹과 그 앞에 늠름하게 선 백의 나이트가 보였다. 그리고 규칙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일직선으로 쭉 달리고 있는 그녀의 비숍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덕분에 계속 싱거운 게임만 하게 된 진이 도끼눈을 하고서 그녀를 노려봤다. 세라와 에녹이 길드로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은 세라와의 거래에서 남아 있는 제 몫의 부탁을 무엇으로 할지 정했다.
‘종종 내 체스 상대나 되어 줘.’
내용인즉, 지난번의 사태로 잠들어 버린 세계수가 깨어나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까지, 요정의 숲에 들러 자신과 체스를 둬 달라는 거였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세라는 흔쾌히 요구를 들어주었고. 매주 휴가를 받을 때마다 한 번은 들러서 그와 체스를 두고 있었다.
“어떻게 넌 매주 두는데도 처음 뒀을 때보다 실력이 퇴보할 수가 있어? 아니면, 시그너스에 무슨 우환 있니?”
신랄하게 세라의 체스 실력을 까 내린 진이 부정 타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도 했다. 세라는 재수 없게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는 듯 마주 눈을 흘겼다.
“우환은 무슨.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체스판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후다닥 지난 경기의 흔적을 지워 버린 세라가 진에게 어서 새 게임을 시작하라 눈짓했다. 누가 봐도 네 잔소리 듣기 싫으니 닥치고 게임이나 하라는 제스처였다.
진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 행태가 가소로운 듯 픽, 웃어 버렸다. 한 손으로 턱을 괸 그가 언제나처럼 나이트 앞에 있는 폰을 움직였다.
“어떤 생각. 에녹 그놈이 왜 예전처럼 질투해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게 세라의 허를 찔렀다. 저게 또 엉뚱한 데에다 ‘지혜’를 쓰고 있네? 이젠 정말 집중하려던 차에 산통이 깨져 버린 세라는 그대로 체스판을 뒤엎었다.
“아니거든! 너 내가 나한테 ‘지혜’ 쓰지 말랬지!”
아닌 게 아닌 줄 알면서도 바득바득 우긴 세라가 진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안 그래도 간당간당하던 성질머리를 진이 긁어 버리는 바람에 겨우 참고 있던 열불이 터져 나온 것이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라는 지금 딱 진이 말한 그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중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바로 어제.
세라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던 하늘색 머리의 남자가 기어코 에녹이 올 때까지 떨어지지 않아 모두의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 삼자대면 아닌 삼자대면이었다.
에녹이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온 것도, 눈에 너무나도 튀는 하늘색 머리의 남자를 대놓고 무시한 것도, 영역 표시하는 짐승처럼 눈꼬리를 뾰족하게 올린 채 ‘누구?’라고 물었을 때까지만 해도 별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누구냐는 물음에 남자가 대답하려던 순간, 에녹이 애초에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라는 듯 공교로운 타이밍에 말을 덧붙였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리 좀 비켜 주겠어?’
곧 요리가 나올 것 같아서 말이야.
더 남아 있겠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축객령에 남자가 그제야 실례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갔고, 때마침 세라가 시킨 요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먹어. 세라. 배고프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에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이어 나갔고, 남자에 관한 이야기는 그 후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만난 사람인지, 왜 함께 있었는지, 오는 길에 들었을 남자의 고백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조금도, 털끝만큼도 없었다.
‘여긴 고기가 질기지 않아서 좋네.’
그저 한가로이 제 앞에 놓인 요리의 육질에 대한 이야기나 하고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혹시 자신을 방심시켜 놓은 다음 마음을 놓으면 허를 찌르려는 작전인가 싶어 끝까지 경계를 놓치지 않았으나, 에녹은 그녀의 예상을 비웃듯 끝까지 맛있게 식사를 하다 또 오후의 일을 보러 떠나갔다.
모두가 기대하는 질투나,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만한 싸움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세라는 혹여나 밤에 집으로 돌아와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 아니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던 건지, 에녹은 그 예쁘게 차려입은 꼴에 대한 이유를 세라에게 코빼기도 알려주지 않고 그대로 밤까지, 그리고 새벽이 깊어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다리다 지쳐 깜빡 선잠에 들었던 세라가 깨어났을 때, 어느샌가 돌어온 에녹이 그녀의 곁에 잠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정하게 차려입었던 옷이 다 흐트러져 있었고,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이불도 안 덮고 자고 있어 흔들어 깨웠더니, 게슴츠레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보고는.
‘세라, 왜 이렇게 일찍 깼어?’
……하고 웃었다.
그 한 점 거리낄 것 없이 맑은 웃음을 통해, 세라는 그가 자신에게 껄떡대던 남자에 대한 일을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가 막혀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게, 이게 말이 돼?
에녹이 어떤 놈인가. 가짜인 걸 알면서도 스노우와 애인 행세를 했을 때, 눈이 뒤집혀서 둘 사이에 자꾸만 끼어들려고 안달을 하던 놈 아니었나. 에스텔라에서도 저 말고 다른 놈을 침대에 들일까 봐 밤새 그녀를 괴롭혔고, 얼마 전에는 진과 바람피웠다는 말 한마디에 거의 대륙을 가로질러 요정의 숲까지 달려왔던 위인이 바로 그놈이었다.
그 셋 모두, 세라에게 껄떡댔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사이였다. 그런 사이도 질투하여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놈이. 이번에는 웬 놈팡이가 무려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대며 대놓고 제 뒤를 졸졸 따라다녔는데도, 이렇게나 담백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차이가 나도 너무나 차이 나는 태도에 일말의 배신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이전과 이후의 차이라고 한다면, 두 사람이 서로의 정체를 완전히 까발리기 전과 후라는 것뿐이다. 예전엔 다른 놈들이랑 눈만 마주쳐도 안달복달하던 놈이 이젠 대놓고 사랑한다며 추근대는 남자를 봐도 그저 심드렁했다.
왜지? 왜야. 왜 갑자기 질투 안 해? 네가 뭔데? 네까짓 게 뭔데…….
……이젠 잡은 물고기라 이건가?
“‘이젠 잡은 물고기라 이건가?’ 우웩.”
그녀의 생각을 고스란히 따라 읊은 진이 메스꺼워 죽겠다며 헛구역질을 해댔다. 남의 입을 통해 나오는 제 속마음만큼 징글징글한 게 없다. 진저리를 친 세라가 얼굴을 있는 대로 구겨대며 진을 타박했다.
“아, 읽지 말라고! 좀!”
너 또 머리털 뽑히고 싶어?!
위협적으로 손을 내뻗어 보지만, 진은 꿈적도 안 했다. 이미 수차례 잡힌 머리채. 이제 와 한 번 더 잡힌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딱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하……. 세라야. 세라야. 이 세라 로젠바움아. 너는 그놈의 내면까지 갔다 왔다는 애가 아직도 걔를 그렇게 모르냐.”
쯧쯧쯧. 진이 진심으로 딱한 사람을 보듯 세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걔. 너한테 미친놈이야. 제발 말이 되는 걱정을 좀 할래?”
나 같으면 그 시간에 체스라도 한 수 더 두지. 그랬으면 네가 지금쯤……. 또 줄줄이 이어지려는 잔소리를 감지한 세라가 ‘아아악! 닥쳐!’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진의 생각과는 반대로, 세라는 그 속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검은 방의 에녹, 거울 방의 에녹, 광신도 에녹, 꽃잎을 떼던 에녹……. 세라에게 미쳐 있던 그놈들을 생각하면 이런 결말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너무 짙어서 제가 보기에도 질렸던 집착들은 다 어디로 가 버린 거지? 죽었나? 내가 죽였나? 죽었어도 짜증 나고, 안 죽었어도 짜증 나. 세상에, 이 감정은 대체 뭐지? 내가 대체 왜 이딴 일에 신경을 쓰고 있지?
에녹이 쏘아 올리고, 진이 터뜨린 그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세라의 마음을 불태웠다. 꼭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뜨거웠다. 분노를 닮은 것 같기도, 서러운 것 같기도,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오묘한 감정에 세라의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장난질을 일삼던 진도, 점점 심각하게 변하는 얼굴을 보더니 되레 본인이 놀라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콕, 콕, 찔러댔다.
“야, 너 왜 그래? 설마, 진짜로 그 일 때문에 마음 상했어?”
“……간다.”
갑자기 사악, 표정이 사라진 세라가 돌연 귀가를 선언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그녀는 진이 잡을 새도 없이 그림자를 통해 시그너스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세라가 자신의 집 뒷마당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분노라고 단정 지었다.
세라가 험악한 표정으로 뒷마당을 돌아 나왔을 때, 그녀의 집 문 앞에는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하늘색 머리의 남자가 버젓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인지. 꽃을 든 채 정확히 세라의 집 문 앞에 서 있던 그가 나비처럼 날아와 세라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세라. 오늘도 아름답군요. 당신을 사랑-.”
“꺼져!”
거머리보다 더 질긴 남자를 향해 호통을 갈긴 세라가 계단을 쿵쿵 찍으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씩씩대며 샤워를 한 그녀는 그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내 침대에서 에녹을 기다렸다. 이놈의 자식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녀는 뭐라고 하면서 가만두지 않을 건지는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 그저 에녹에게 이 사태에 대해 따지고 들기로 했다.
하지만 에녹은 대체 무슨 일인지 그날도 제시간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세라는 데자뷔를 느끼며 새벽 늦게서야 불가항력으로 잠이 들었다.
한창 곤히 잠들어 있던 세라는 목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잠에서 깼다. 분명 이불을 잘 덮고 잔 것 같은데 목에 닿는 느낌이 너무나 차가웠다. 집에 비라도 새나. 게슴츠레 눈을 뜬 그녀가 잠기운이 묻어나는 손짓으로 제 목을 더듬거렸다. 자세가 좀 불편하다 싶더니 누군가 등 뒤에서 세라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 자식이 또 도둑고양이처럼 새벽 늦게 돌아왔군.
흥, 입매를 비틀어 웃으면서도 부지런히 목을 더듬는데, 손끝에 차가운 금속 체인 같은 게 만져졌다.
“……?”
결코 이런 걸 한 기억이 없는 세라가 손끝으로 유심히 그 줄을 더듬었다. 얇고, 가벼운 게 목걸이를 만들 때 쓰는 장식 줄인 것 같았다. 손에 닿는 대로 따라가니 가슴팍까지 내려갔다. 제법 긴 줄 끝에는 무언가가 달려 있었다.
이게 뭐지……?
그것을 붙잡아 제 눈앞까지 끌어 올린다. 줄 끝에 매달린 물건이 양옆으로 달랑거렸다. 동그랗고, 밤에 보아도 새하얗고 반짝였으며, 가운데는 뻥 뚫려 있었다. 물건의 정체를 알아챈 세라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그러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무렵, ‘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리하여, 난데없이 제 목에 채워진 물건에 세라가 얼이 빠져 있는 동안.
잠든 줄 알았던 등 뒤의 남자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속삭였다.
“반지. 마음에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