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truck a jackpot after a marriage RAW novel - Chapter 94
094 엄마와 딸(삽화)
‘···과연.’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도 이태리의 그림은 대단했다. 모두가 자신의 캔버스와 그녀의 그림을 번갈아 보며 경악할 정도였으니.
이태리의 그림에는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신만의 색채가 잔뜩 묻어나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우와아아-! 스승님 잘 그렸다!”
“역시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뭐, 태리니까···.”
히히-
사람들의 칭찬에 이태리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칭찬에 익숙할 법한데도 저런 순수함을 유지하는 게 그녀의 장점이다.
“다들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표현하고 싶었던 건 거의 다 보여드려서 다행이에요.”
“중앙에 있는 큰 별은 혹시 견우별이야?”
“맞아요. 아까 사장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제식대로 표현해 봤어요.”
“별을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다들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 역시 그녀의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막상 ‘견우’라는 캐릭터를 떠올리려면 다소 모호한 부분이 많다.
그걸 별에 빗대어 표현하는 동시에, 모티브가 견우라는 것을 딱 연상할 수 있게 만드는 이태리의 화법은 정말로 대단했다.
“좋아. 태리의 그림은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그럼 다음은 하영 씨네요.”
“···차라리 제일 먼저 공개할 걸 그랬어요.”
하아-
앞선 이태리의 그림을 보며 자신감을 잃은 건지 한숨을 푹 내쉬는 김하영. 만약 저 위치가 나였어도 비슷한 심정이었겠지.
허나 망설임도 잠시.
그녀가 결심한 듯 이젤을 돌렸다.
“······!?”
“뭐야, 잘 그렸잖아?”
“평범한 취미 수준이 아닌데?”
“아이참,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김하영이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으나, 그녀는 은근슬쩍 그림을 앞으로 더 내밀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자신감을 얻은 모양.
‘이건 진짜 예상외인데?’
나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예상보다 김하영의 실력이 막강했기 때문.
예나의 재능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감각적인 붓 터치는 역동적인 미학이 스며들어 있었다.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서 그런지 질감의 표현법이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림의 풍미를 더했다.
“선생님! 여기 어떻게 한 거야?”
“응? 아, 이 부분은···.”
무려 예나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뛰쳐나올 정도였다. 김하영은 그게 무척이나 기뻤는지 열정적인 설명을 이어나갔다.
“예나의 스승님은 난데···.”
지켜보고 있자니 옆에서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태리가 뭔가 충격받은 듯한 눈빛으로 김하영과 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세상을 다 잃은 듯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한테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걸까요!?”
“그럴 리가. 너는 그동안 옆에서 많이 가르쳐줬잖아. 덕분에 화풍도 거의 비슷해졌고. 이번엔 그저 하영 씨의 새로운 표현 방식이 신선하게 느껴진 것뿐이겠지.”
“그렇죠!? 벌써 제 밑천이 드러난 건 아니겠죠!?”
“···아마도.”
“아마도라니요! 확실하게 말씀해주세요!”
귀찮게 달라붙는 이태리를 겨우 떼어내며 나는 강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여느 때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엄청 여유로워 보이네.’
앞선 두 사람의 그림은 공모전에 나갈 만한 퀄리티였는데도 저렇게 여유로운 분위기라니.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일까.
고민하는 사이 예나의 질문이 끝났다. 강바다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정돈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제 차례인가요?”
“그러고 보니 사모님 그림은 처음 보네요.”
“예나도 처음 봐!”
“사장님은 자주 보셨죠?”
“아니, 나도 처음이야.”
헤에-
베일에 감춰진 강바다의 실력에 모두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조용히 웃으며 그림을 공개했다.
“오호?”
“···허를 찔렸네요.”
“이런 식으로 나오실 줄이야.”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체에 잠시 넋을 놓았다.
강바다의 그림체는 얼핏 90년대 일본 만화를 떠올리게 했다. 일본의 ‘지브리’가 연상되는 레트로한 감성이랄까.
‘바다 씨도 느낌 있게 잘 그리네.’
강바다는 별나라 위에 사는 캐릭터들을 묘사했는데, 모티브는 예나를 비롯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인 듯했다.
그녀가 각각의 특징을 잘 잡아낸 덕분에,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누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예상 못 한 복병이네.”
“그러게요. 대중성이 높아요.”
“사모님의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다들 침음을 흘렸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화풍.
직원들의 평가가 포함된다는 걸 감안한다면 굉장히 전략적인 그림이었다. 보통은 익숙한 그림체에 눈길이 먼저 갈 테니까.
“언니, 혹시 저거 예나야!?”
“응. 마법 소녀 메리야.”
“메리-!!”
모두의 우려를 실시간으로 증명해주는 예나의 반응. 평소 꿈꾸던 마법 소녀가 현실에 등장하자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예나는 항상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의 다이얼을 눌러 음악을 재생시키더니, 강바다의 그림 앞에서 빙글빙글 돌며 포즈를 취했다.
잔뜩 신이 난 그녀의 재롱에 다들 박수를 쳐주면서도, 속으로는 짙은 패배감을 맛보고야 말았다.
“이건 좀 반칙인데.”
“관객 맞춤형 그림이라니···.”
“일단 확실하게 한 표는 넘어갔네요.”
후후후-
쏟아지는 푸념을 들으면서도 웃음을 숨기지 않는 강바다. 최소한 꼴찌는 면했고, 어쩌면 1위까지 노려볼 만하다는 계산이 섰겠지.
‘곤란하게 됐네.’
이러면 내가 난감해진다.
설마하니 이태리와 김하영보다 더한 강적이 있을 줄이야. 내 그림도 꿀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만, 여러모로 타이밍이 나빴다.
“드디어 하늘 씨 차례예요.”
“어떤 그림일지 정말 기대되네요.”
“사장님이라면 저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겠죠?”
다른 사람들도 분위기를 읽은 모양. 저마다 기다렸다는 듯 비수를 던져댄다. 이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이젤을 붙잡았다.
‘뭐, 다들 즐거워하면 된 거지.’
사실 1등 빼고는 다 똑같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맘 편히 그림을 공개했다. 그러자 쏟아지는 의외의 칭찬들.
“오, 사장님도 제법이네요.”
“무난하게 잘 그리셨는데요?”
“어린아이의 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앞에서 내가 저질러놓은 짓이 있는 터라 공격적인 비평도 감내할 생각이었다만. 순수한 칭찬에 내 각오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하늘 씨가 그림을 잘 그리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가장 자신 있어하시는 소묘를 그리실 거라 예상했는데.”
“그러게요. 저도 사장님이 그리신 콘티나 컨셉화만 보다가 이렇게 보니 또 색다르네요. 기본기가 탄탄하신데요?”
“교과서적인 느낌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독창적인 작품이 나와서 신선했어요.”
“···뭔가 부끄럽네요.”
조금 전까지 다졌던 투지가 무색할 정도로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림으로 칭찬받는 건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더 그랬다.
“음?”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문득 예나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멍하니 이젤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예나가 이렇게 몰입했을 때는 섣부르게 말을 걸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모두가 숨을 죽인 채로 그녀를 지켜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따뜻해.”
“응?”
“오빠의 마음. 포근포근해.”
아무래도 말로 표현한 건 조금 서툰 예나인지라, 무슨 뜻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었다.
허나 조심스럽게 그림을 매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온몸의 감각으로 그림을 만끽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의미는 충분히 전달됐다.
“예나는 하늘 씨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드나 봐요.”
“어린아이의 눈으로 봐야 하는 걸까요?”
“아아, 이건 뺏겼네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와 똑같은 것을 느꼈는지 저마다 탄식을 내뱉었다.
물론 직원분들을 포함한 대중적인 투표로 가면 순위가 다소 밀리겠지만, 적어도 예나는 내 그림을 제일 좋아하는 듯했다.
‘그래, 이거면 됐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뿌듯함이 차올랐다.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는 예나의 표정을 보니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오늘부로 스승 사퇴할게요.”
옆에서 거의 죽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가볍게 무시했다. 원체 성격이 밝은 녀석이니 금방 회복하겠지.
“자, 그럼 이제 주인공 차례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리되고.
대망의 주인공이 나설 차례.
모두가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예나를 바라봤고, 당연하다는 듯 그 시선을 만끽하며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예나.
“오빠, 도와줘.”
“알겠어.”
“미리 보면 안 돼!”
“그래그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나의 앞으로 향했다. 그녀가 움직이기에는 캔버스가 너무 컸기 때문.
그림을 그릴 때는 받침대를 이용해서 큰 상관이 없었지만, 이젤을 돌리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이젤을 조심스럽게 붙잡은 채로 신호를 기다렸다. 그러자 곧 예나가 준비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개합니다!”
“······!?”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이젤을 돌렸으나 예상했던 반응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침묵.
뭔가 잘못된 건가 싶어서 나도 얼른 앞으로 돌아가 예나의 그림을 확인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하게 됐다.
“···이것 참.”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날 예나는 만장일치로 1등을 차지했다.
* * *
“여기 있었네요.”
“앗! 네···.”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찔하는 김하영. 상대를 확인한 그녀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드러운 강바다의 미소가 묘한 편안함을 선물해줬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는 굉장히 무서웠으나 지금은 달랐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니.’
수려한 외모는 물론이고 인품까지 나무랄 곳이 없다. 처음 미디어를 통해서 그녀를 알게 됐을 때는 전부 가식일 거라 생각했는데.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본성 자체가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되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눈엣가시 같은 자신에게 이러한 대우를 해줄 리가 없으니까.
‘바다 씨라면 믿고 맡길 수 있어.’
예나의 엄마로서 자신보다 더 잘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순히 경제적인 여유를 제외하고서라도 말이다.
“저기 바다 씨···.”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어. 음. 고마워요. 언니.”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 말한 강바다는 성큼 김하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뭘 보고 있었는지 확인하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그림 대단하죠?”
“···네. 정말로요.”
김하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보는 것은 예나의 그림이었다. 하늘을 가득 채운 별 무리와 그것을 올려다보는 다섯 사람을 정겹게 표현했다.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한 충격. 덕분에 김하영은 간단한 에프터 파티가 끝난 뒤에도 홀로 올라와 그림을 눈에 담고 있었던 것.
“이 그림을 보고서야 예나가 말한 ‘따뜻하다’가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죠. 앞으로가 정말 기대된다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예나는 분명 세상을 빛낼 멋진 화가가 될 거예요!”
강바다의 말에 동의하며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김하영. 직후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부탁을 드리는 건 염치없지만. 저 대신 언니가 끝까지 지켜봐 주세요. 예나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요.”
“그건 직접 하셔야죠. 예나의 엄마로서.”
“네? 그게 무슨···.”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하영. 이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강바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김하영은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눈을 돌렸고, 이내 자신의 손에 쥐어진 웬 종이를 발견했다.
“···이게 뭔가요?”
“한번 확인해보세요.”
순간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강렬한 직감. 김하영은 설마설마하면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이 종이의 내용을 확인했다.
“어, 어째서···.”
직후 김하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그녀의 감정을 모두 표현할 수 없다는 듯 눈가가 촉촉해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강바다가 그녀에게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주민등록등본. 그곳에는 김하영과 예나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법적인 엄마와 딸로서.
아주 명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