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g family's escort warrior RAW novel - Chapter 91
91. 아직 웃을 일이 더 남았다.2015.09.16.
팽오운은 명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늘 그렇듯 그의 방 안엔 간격을 맞춘 검(劍)과 도(刀)와 창(槍)이 놓여 있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칼날 끝이 모두 그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 보고만 있어도 매우 살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스으으윽.
어느 순간 팽오운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자세를 유지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꽤 시간이 흘렀다.
감긴 팽오운의 눈꺼풀이 미묘하게 흔들릴 때쯤이었다.
드르르르륵.
방 안에 진열해놓은 칼들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에 띄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드륵. 드륵. 드르르륵.
반 각 동안 그렇게 흔들리던 칼들은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다시금 멈췄다.
“후우우우.”
팽오운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짤막히 읊조렸다.
“거의 다 왔는가.”
기(氣)를 통제하는 것.
드디어 완숙의 경지까지 도달한 것이다.
“접니다, 사형.”
드륵.
그때 한 사내가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문을 등지고 있던 팽오운이 천천히 눈을 떴다.
뒤돌아보지 않은 건, 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흐으음.”
방으로 들어선 팽가운은 한 곳에 눈이 갔다.
그는 좌측 벽면에 진열된 도신(刀身)을 유심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설마 기(氣)를 통제하는 경지까지 오르신 겁니까?”
“…….”
“놀랍습니다. 이젠 팽가가 아니라 중원에서도 사형과 맞설 사람이 없을 겁니다.”
“묻고 싶은 건 묻고, 말하고 싶은 건 말하고 가거라.”
쌀쌀맞은 대답이 들려오자 팽가운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뒤 그는 팽오운 맞은편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방금 재밌는 소문을 듣고 오는 길입니다.”
“소문?”
“예. 팽가 전체가 한 사내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는 소문이지요.”
팽오운이 묵묵히 침묵을 지키자 팽가운은 다시 말을 이었다.
“팽도린(彭道鱗)과 팽군위(幸群偉)…… 아, 아니지. 호철과 호군이 그 사내 한 명에게 당했다지요?”
이번에도 팽오운의 표정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허나, 팽가운은 그 모습을 믿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팽가운은 진열된 병기 쪽으로 시선을 돌린 뒤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을 꾸민 자가 일 장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제게 인정하는 모습도 보였구요. 그런 와중에 오늘 연무장에서 왠지 어딘가 불편한 자들을 보았습니다.”
“…….”
“호철과 호군은 대사형을 따르는 사람들 아닙니까? 대사형이 일 장로를 따르는 것처럼 말이지요.”
“말하고 싶은 것이 뭐냐?”
팽오운이 처음으로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일 장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
“무슨 계획을 들었기에 같은 팽가 식솔의 피까지 묻힌 것입니까. 이는 정도의 길을 걷는 자로선 해선 안 되는 짓이 아닙니까?”
“난 모르는 일이다.”
팽오운이 고개를 돌리자 팽가운은 그를 더욱 다그치듯 말했다.
“특수한 벽력탄을 이용해 중원이라도 삼키자는 겁니까? 아니면 거대한 업적을 남겨 팽가의 가주라도 되어보겠다는 생각인 겁니까?”
“모르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팽오운이 소리치며 그를 향해 강렬한 시선을 쏘아댔다.
팽가운 역시 기세에 밀리지 않으려는지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두 눈빛이 허공에 얽혀 들어갔다.
그렇게 한동안 말하지 않고 서로만을 응시했다.
“할 말 다했으면 나가거라.”
드르륵.
정적을 깬 팽오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형은 저를 너무 못 미더워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우린 그런 운명일 수밖에 없는 관계지요.”
드르륵.
뒤이어 팽가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다들 숨기니 제가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러고는 뒤돌아서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잠시 자리를 서성이다 나직이 말을 이었다.
“꽁꽁 숨기셔야 할 것입니다. 왠지 제가 알게 되면…….”
팽가운은 등을 보인 팽오운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피바람이 불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방문을 나섰다.
이마의 주름이 깊어진 팽오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팽가의 중정.
중원을 대표하는 무가답게 정오가 다가오는 시각인데도 수련이 한창이었다.
“하나!”
“핫!”
“둘!”
“하핫!”
중정을 중심으로 각기 떨어져 있는 네 개의 연무장.
그곳에선 교관의 구령 소리에 맞춰 무인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중정의 북쪽, 두 연무장에서는 창법과 검법을 수련하지만 거기에 주안점을 두지는 않는다.
실질적으로는 남쪽, 권법과 도법이 팽가의 주력 무공이기 때문이다.
“오셨소이까?”
팽인호가 정자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중 서열이 제일 높은 이 장로 팽이윤(彭李潤)이 가장 먼저 말을 건넸다.
“좀 어떻습니까?”
“염려할 정도는 아니네.”
팽인호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다 문득 스쳐가는 인물을 상기시켰다.
“오늘 대공자께서는 참석하시지 않으셨는가?”
“아침에 잠시 들른 후 가셨습니다.”
“그렇구만.”
팽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는 인사가 뜸했던 삼 장로, 만(曼) 각주, 당주 세 명과 눈을 맞춘 뒤 자리에 앉았다.
“어제 온종일 가주의 병간호를 직접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좀 어떠십니까?”
옆에 앉아 있던 팽이윤은 팽인호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건넸다.
“아직 위독하시오. 제가 더 신경을 더 써야지요.”
“장로께서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팽이윤은 그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더니 갑자기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참으로 몹쓸 놈들입니다. 우리 본가를 모독한 것을 넘어 없던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다니요. 내 마음 같아선 당장 본가의 무인들을 이끌고 장씨세가의 목을 날려버리고 싶습니다.”
“그럴 가치도 없소. 변변한 무사도 없는 곳이니.”
그러자 이번엔 당주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간교한 놈들입니다. 그걸 오히려 수단으로 삼아 강호의 명문 대파가 모인 자리에서 우리를 핍박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 원통할 따름입니다. 어찌 본가가 그런 망신을 당했는지!”
그 뒤로도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참고 있던 감정이 쏟아진 것이다.
팽인호가 그들의 불만을 담담히 듣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누군가 중정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공자.”
팽오운이 정자 위로 올라오자 모두들 일어나 예의를 차렸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팽인호의 지척까지 다가가 속였다.
“할 말이 있소.”
“큼큼.”
그들은 정자를 받치고 있는 기둥 쪽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입니까?”
팽인호가 슬며시 운을 뗐다.
“대공자에게 어디까지 말을 한 거요?”
“…….”
팽인호는 시선을 들어 팽오운을 바라봤다.
노여운 기색을 확인한 그는 팽오운이 뭔가를 알았음을 직감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집요하게 물어보는데 거절만 할 수 있어야지요.”
“어디까지 얘기한 거냐고 물었소.”
목에 힘을 주자 팽인호는 곧장 대답했다.
“운수산에 있는 것이 석회석과 석염이라 말했습니다. 그걸로 특수한 벽력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요.”
“일 장로!”
노기가 섞인 목소리로 팽오운이 말했다.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의 분노는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정도 정보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공자가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일이 더 수월해집니다.”
“수월해진다?”
“예.”
팽인호가 잠시 숨을 고르다 말을 이었다.
“대공자 역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는 본가의 가장 지체 높은 사람 중 하나 아닙니까.”
“음.”
“그저 꽁꽁 숨기고 있기만 한 것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그도 알아내게 될 테니까요. 그럴 경우 예측 못 한 방향으로 그가 움직이게 되면 자칫 우리 일을 망칠 수 있습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예상 범위 안에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여겼습니다.”
“……적당한 정보만 주어서 그를 관리한다라.”
팽오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은 모사가가 아니지만 이런 방향이 더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허나…….’
팽오운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쳐갈 때쯤 팽인호가 입을 열었다.
“물론 그는 저희를 불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저희에겐 중요한 것입니다. 방향만 정해둘 수 있다면, 그가 우리를 의심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확실히 하시오. 그대는 나와 이미 한배를 탄 몸이오.”
“물론입니다.”
팽오운의 냉랭한 말을 팽인호는 가볍게 웃어넘기고 연무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늘 그렇듯 구호 소리와 함께 수련을 하고 있는 팽가의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봅시다.”
그는 팽인호에게 말을 내뱉고는 정자 위를 한 번 쳐다봤다.
그러고 다시 몸을 돌리려 할 때쯤이었다.
끼이이익.
그때 남쪽에서 바닥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남문이 열렸다.
그 모습에 팽오운의 시선이 그곳으로 고정됐다.
“저자는…….”
팽인호가 당황하며 목소리를 흘렸다.
그 문으로 낯익은 사내가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를 알아본 주변의 시선도 다르지 않았다.
눈엣가시같이 거슬렸던 사내.
문제를 더 크게 일으킨 장본인.
장씨세가 호위무사, 광휘가 나타난 것이다.
저벅저벅.
광휘가 남쪽 두 개의 연무장 사이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팽가의 무인들이 수련을 멈추고 그를 노려봤다.
하나같이 적대적인 표정인 데다 살기를 띤 사내들도 몇몇 있었다.
허나, 광휘는 그런 시선을 무시하며 담담히 걸어갔다.
잠시 뒤 대부분의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정자 앞까지 당도했다.
스윽.
“기다려라.”
교관 한 명이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잡자 팽인호가 손으로 제지했다.
그는 정자 옆 기둥에 선 채 흥미로운 눈길로 말없이 아래를 바라봤다.
처억.
실로 엄숙한 고요함 속에 광휘가 정자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슬쩍 고개를 올리고는 정자에 있는 인물들을 눈에 담았다.
“익숙한 얼굴도 있으니 얘기하기가 편하겠군.”
노려보는 팽인호 장로.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팽오운 공자.
광휘는 그들을 주시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있어 왔다.”
광휘의 목소리는 북쪽 연무장에 있는 팽가 무인들 모두가 똑똑히 들을 정도로 컸다.
“허허허허.”
지켜보던 팽인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팽가의 무인들은 그 웃음이 진실한 웃음이 아니란 것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뚝.
날카롭게 웃던 팽인호가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눈초리를 가늘게 뜨며 말했다.
“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왔나?”
“석가장도 들어왔는데 내가 못 들어올 리 없지 않나?”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재차 말을 이었다.
“본가에 허락도 없이, 그것도 본가의 독문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자리에 들어왔으니…….”
“…….”
“죽을 준비도 하고 왔겠지?”
“그건 생각지 못했군.”
“허허허.”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그 도발이 팽인호를 더는 웃지 못하게 만들었다.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니 그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구만. 대체 너는 무슨 생각으로…….”
“아직 웃을 일이 더 남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던 그때, 광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폭굉이란 말, 들어본 적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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