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99)
>99 화>
그녀가 제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느껴지는 통증에 냉큼 놨다. 적어도 꿈은 아니다.
베개를 끌어안은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다.
‘되다만 약혼자 관계인가.’
굳이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 하자면 아직 파혼은 안 했으니 여기까진 괜찮은 건가?
자신들이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그날, 갑자기 밀라이언이 이상해져서 찾아온 날 이후로 무언가 바뀌었다.
그는 평소보다 훨씬 다정해졌고 제 곁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새벽에 아무리 신음을 죽여도 빠르게 눈치채곤 끌어안아 줬다.
‘들은 건 아니겠지.’
그날로 바뀌었다면 그럴 만한 계기가 있을 텐데, 마땅히 생각 나는 것이 없다.
떠오르는 것은 밀라이언이 들어 오기 직전까지 나누던 그에겐 숨기고 싶은 얘기와 밀라이언이 제 감정을 눈치챈 것 두 개였다.
“……그러고 보니 페리얼도 그 뒤로 안 보이네.”
카리나의 표정이 묘해졌다.
원래라면 하루에 한 번씩은 찾아왔을 페리얼이다. 그런데 생각 해 보니 그 뒤론 전혀 만나지 못했다. 카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있다간 만날 수 있겠지.”
두 번째 긴 여행이었다. 물론 먼 곳으로 가는 건 아니고 여행보단 탐험에 가깝겠지만.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카리나는 밀라이언이 준비해 준 북부용 옷을 입었다.
움직이기 편한 옷은 치마나 드레스가 아니라 바지로 된 옷이었다.
거기에 두툼한 짐승의 털로 된 외투까지 걸치니 몸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부풀어 보였다.
‘따뜻하긴 한데……’
아무리 봐도 곰탱…….
아니, 곰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제대로 먹지 못 해 비쩍 말라빠진 곰.
어딜 봐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래, 곰 인형인데 귀엽지 않은 곰 인형.
어쨌든 밀라이언에겐 전혀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앞에서 누가 비쩍 말라빠진 곰이 되고 싶겠는가.
“아무리 봐도 이상한 것 같아.”
“아닙니다! 이 옷이 얼마나 좋은 옷인데요. 저희 본가가 의류 가게를 해서 아는데 최고급 중에 최고급입니다. 색이 조금 칙칙해서 그렇지 보온성은 최고인 데다가 비가 와도 젖지 않아요.”
카리나의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냉큼 입을 열었다. 그녀의 옷을 입혀 줄 때부터 눈을 반짝이고 있던 시녀였다.
“그렇게 좋은 옷이야?”
“네, 지브리라는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건데 잡기도 까다롭고 제작 공정도 까다로워요. 북부에선 최고의 옷이에요.”
“……그래?”
그냥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투박한 옷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따뜻하기도 하고 그리 무겁거나 불편하지도 않은 건 사실이었다. 색이 너무 칙칙해서 신경이 쓰일 뿐이다.
“가벼운 것에 비해 단단하기도 단단하고 질기기도 해서 듣자 하니 잘 만들어진 옷은 화살도 막아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의 기능이 있으면 차라리 갑옷으로 쓰는 게 더 낫겠는데?”
이렇게 가벼우면 갑옷을 만드는 것이 훨씬 더 효용성이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그냥 자신의 평상복으로 쓰기엔 너무 아까웠다.
“에이, 말씀드린 대로 구하기가 힘들어서 일반적인 갑옷으로 쓰긴 무리에요. 이것도 제가 알기론 주인님께서 직접 잡아서 벗겨둔 가죽 창고에서 꺼내 온 걸 거예요.”
“……각하께서?”
“네, 게다가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자상엔 효과가 없기도 하고요.”
“그랬구나…….”
밀라이언이 직접 잡은 마수의 가죽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괜한 불만을 토한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가 직접 준 선물인데, 입고 가지 않는 편이 더 그를 서운하게 할 거다.
“어쨌든 고마워.”
“아니에요. 무사히 다녀오세요.”
시녀들이 사람 좋게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도 작게 마주 웃으며 방에서 나섰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자신이 입은 부들부들한 털옷을 매만졌다.
이런 신기한 가죽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북부를 벗어나면 애초에 마수의 물건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남부에선 북부인을 야만인으로 비유하는 때도 있을 정도니까.
‘정말, 절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을 정도네.’
어떻게 보면 북부인이 남부인들보다 훨씬 더 나은 면도 있었다.
시원시원한 점이나 여자도 남자도 가리지 않는 평등함 같은 것 말이다.
카리나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래 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중간쯤 내려가자 로브를 입고 있는 페리얼이 눈에 들어왔다.
카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금 속도를 내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페리얼!”
“아, 카리나.”
“요 며칠 안 보이던데 뭐 했…….”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반가운 기색의 페리얼과 다르게 그녀는 도저히 웃어 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황급히 다가가 그의 볼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세상에, 이게 뭐예요?”
얼굴이 푸르뎅뎅했다.
입술은 터져 있고 볼과 눈은 부풀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얼굴과 손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가득했다.
“아.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 아니, 누구한테 맞았어요?”
“안 맞았습니다.”
“누가 봐도 맞은 거잖아요.”
“…….”
카리나의 말에 페리얼이 입을 다물었다.
그를 때릴 수 있는 사람이 이 저택에 몇 명이나 되겠느냐마는. 그렇다고 미친개한테 손 한번 못 쓰고 속절없이 얻어맞았다고 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설마, 밀라이언이 때렸어요?”
“…….”
“때렸군요.”
그녀의 확신 어린 목소리에 페리얼이 입을 닫았다.
“널 믿었다. 그래도 널 믿었으니 여기까지 불렀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감히 그녀의 목숨을 가지고 내게 장난을 쳤군.”
“그녀가 자네에게 말하지 않은 걸 어쩌라는 건가. 믿음을 주지 못한 자네 스스로를 탓해 보는 건 어때?”
“재수 없는 새끼!”
퍽 묵직한 소리와 함께 목이 돌아갔다.
페리얼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조금 짜증스럽긴 했지만, 타당한 분노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놈에게 제대로 된 반격을 못했다는 게 문제지만.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곤.’
예전부터 힘으로 이긴 적은 없었지만 이 정도로 당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렸던 페리얼이 낮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냥 좀 싸웠습니다. 아카데미에 다닐 때도 서로 성격이 맞는 건 아니었거든요.”
“아니…….”
무슨 싸움을 이렇게 어린애처럼 쥐어뜯고 싸운단 말인가.
머리카락은 정돈했는지 멀쩡했지만 누가 봐도 얼굴은 쥐어 터진 얼굴이다.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래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나 싶었다.
그에 비해 아침에 봤던 밀라이언은 지나치게 멀쩡했다.
언제 싸웠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페리얼이 일방적으로 맞은 게 분명했다.
‘……밀라이언도 볼에 약간의 생채기가 있었긴 하지만.’
그 물약을 만들어 발라 주자 금세 나았다. 괜찮다고 했지만 제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해 준 것 이었는데.
‘설마 페리얼과 싸웠을 줄이야.’
심각한 건 이쪽이었다. 카리나가 품에서 물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가 그것을 페리얼의 손에 쥐여 줬다.
물약을 그린 종이를 여러 개 챙겼다. 그중에 하나는 급할 때 쓰기 위해 품에 챙겼고.
다행히 이 바지로 된 옷에는 주머니가 무척이나 많았다. 북부의 사냥 복장이라고 했다.
“이건 뭔가요?”
“물약이에요. 그러니까 상처가 낫는 거예요. 마시거나 바르면 돼요. 그 얼굴을 보니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페리얼이 붉은 물약을 이리저리 살폈다.
무척이나 신비롭게 생긴 물약이다. 기껏해야 그녀의 주먹만 한 병에 담긴 물약은 탁하지 않고 상당히 순도가 높았다.
“……어디서 났습니까?”
“미리 말하지만 밀라이언한테 허락받았어요.”
페리얼의 눈이 가늘어졌다.
움찔, 몸을 떤 카리나가 시선을 피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조금 억지긴 했지만요.”
“웬만하면 쓰지 마십시오.”
“노력하고는 있어요.”
하지만 밀라이언의 일에 한해선 솔직히 나서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은 다치는 곳 없이 안전했으면 했다. 그로 인해 생명이 조금 깎이더라도 괜찮았다.
‘말하면 분명 크게 화를 내겠지.’
페리얼이 뚜껑을 열어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그의 얼굴에 났던 생채기가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페리얼의 얼굴이 멀쩡해졌다.
‘통증도 가셨군.’
갈비뼈에 옅은 통증이 있었던 것도 사라졌다.
정말 알면 알수록 그녀는 대단했다.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도 그 풍경이 완성될 때도 그것이 기적이 되어 눈앞에 펼쳐질 때도…….
새파란 바다가 황금빛으로 물들 때의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그림은 묻어 둔 것을 죄악이라고 여기고 싶을 정도였다. 시간을 되돌려 어린 그녀를 그 집에서 끄집어내 주고 싶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알면서도 후회가 될 정도로.
“카리나, 난 당신과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뻔했어요. 요즘 늘 그런 후회만 드네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가득한 후회에 카리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페리얼과 시선을 마주한 채 그녀가 입을 열었다.
“페리얼, 나는요. 지금이 꿈만 같아요. 만약 그때 용기를 내지 않았으면…… 분명 아직도 그 저택에 갇혀 있었겠죠.”
“…….”
“그러니까 난 이제라도 페리얼을 만나서 기뻐요. 내가 그 안에 있었으면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것 또한 밀라이언의 말 덕분이겠군요.”
페리얼이 낮게 중얼거렸다.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몸을 돌렸다.
카리나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녀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걸어가던 페리얼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얼른 오십시오. 카리나.”
“아, 네!”
그는 무척이나 멀쩡해 보였다.
‘……방금은 착각이었나?’
카리나가 멈췄던 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