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 the Dragon RAW novel - Chapter (72)
* 72화 *
“사일런스에게 사과는 했어?”
이한이 말했다. 사일런스는 괜찮다고 했지만, 이한은 크누트에게 사과하라고 귀띔했다.
“하러 갔는데 괜찮다고 하더라고. 꽤 쿨한 녀석이야. 마음에 들었어.”
크누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자칭 비밀조직인 스모의 소년들과 친해져서 이런저런 훈련도 같이하는 듯했다. 스모는 아직도 사일런스의 가면을 노리는 듯했지만, 이한이 보기에 자력으로는 불가능할 듯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스모 일에서는 난 손 뗐어.”
이한이 강조하며 말했다. 크누트가 아쉬움으로 입을 다셨다.
“스모 애들이 아쉬워하겠는 걸. 다들 널 회장으로 추대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만장일치였어.”
“넌 사과도 했으면서 아직도 계속 할 생각이야?”
이한의 말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크누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검지를 흔들었다.
“이젠 가면이 중요하지 않아. 난 사일런스를 이겨볼 거야. 3학년 중에서 제일 강한 사람을 꼽는다면 항상 언급되는 녀석이잖아. 목표가 있다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지.”
크누트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경쾌한 제스처였다.
이한의 단말기에서 호출신호가 왔다. 근래 드물었던 호출명령이었다. 사이킥 훈련을 하던 이한은 단말기를 확인했다.
“긴급호출?”
이한은 수건으로 땀을 닦다가 서둘러 훈련실을 벗어났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습격이라도 받은 건가? 아니, 그런 것 치고는 아크가 고요하다. 전투관련은 아닌 것 같은데… 긴급호출이라니.’
이한은 근래 행동을 되돌아봤다. 스모 작전에서 설치해둔 함정과 장애물도 다 철거했다. 사고를 칠 만한 행동도 없었다. 호출이라면 몰라도 긴급호출을 받을 일은 전혀 없다.
끼이이―익!
이한이 훈련실을 나가기가 무섭게 굉음이 퍼졌다. 사이드카가 있는 바이크는 이한 앞에 멈춰 섰다. 고글을 쓴 군인 한 명이 말했다.
“3학년 이한 맞지? 타라.”
군인은 이한의 팔을 잡아당기며 사이드카에 밀어 넣었다. 그는 이한의 머리에 헬멧을 던지다시피 했다. 손동작에서도 상당히 급한 게 느껴졌다.
‘계급은 소령이다.’
이한은 헬멧을 쓰면서 군인의 계급장을 확인했다. 소령이 일개 병사를 데리러 바이크를 끌고 올 정도의 일이다. 이한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꽉 잡아라.”
부우우웅!
소령은 바이크를 거칠게 몰았다. 3학년 구역을 가로질러서 곧장 간부숙소를 통과했다. 보초들이 소령을 확인하곤 바리게이트를 열었다.
“여기는 기밀구역이군요.”
이한이 말했다. 그조차 처음 오는 구역이었다. 소령은 대꾸도 없이 바이크를 공터에 세웠다. 그는 신호를 기다렸다.
위이이이잉!
공터 밑바닥에 열리면서 차량 한 대가 지나갈 만한 길이 나왔다. 밑으로 곧장 내려가는 지하도로였다. 소령은 이한이 제대로 탔는지 확인하고는 밑으로 쭉 내려갔다. 가파르던 지하도가 완만한 굴곡으로 이어졌다.
‘놀이기구를 타면 이런 기분일까.’
이한의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1분 정도 내려가고 나서야 바이크가 멈췄다.
“여기가 언더아크다.”
소령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한의 눈동자가 커졌다.
“도대체 이건…!”
어지간해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이한조차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크의 지하에는 지상만큼이나 커다란 시설이 있었다. 건조중인 기계더미들이 드문드문 보였고, 한쪽 구석에는 무기창고가 있었다.
‘전쟁물자?’
언더아크는 이한이 전혀 몰랐던 정보였다.
‘아마도 보여서는 안 될 이런저런 것들이 있는 거겠지.’
아크라는 기관이 깨끗할 리가 만무하다. 언더아크는 떳떳하지 못한 것들만 모아둔 곳이리라 이한은 추측했다.
“가면서 설명하겠다. 이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렉산더 참모장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참모장님?”
소령은 건너편에서 나오는 알렉산더 참모장에게 경례를 했다. 이한도 뒤늦게 경례를 붙였다. 주위풍경에 압도당해서 반응이 늦었다.
“일단 따라와라. 시간이 많지 않다.”
알렉산더는 기나긴 통로로 걸어갔다. 이한은 다짜고짜 따라오라는 말에 반문할 틈도 없었다. 알렉산더가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원래는 이곳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건 충분히 압니다.”
“그래. 맞다. 3학년들에게 비공개된 구역이지. 하지만 그런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참모장조차 목소리와 행동에서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이한이 빠른 걸음으로 알렉산더와 나란히 걸었다.
“지금부터 넌 사령관님과 만난다. 제2대 사령관 유르겐 텔러다.”
“사령관 말입니까?”
“사령관님에게는 시간이 많이 없다. 너와 이야기하는 것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만나는 거지.”
이한은 사령관이 누구인지 들어본 적이 없다. 아크의 사령관이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들 실질적인 지휘관은 알렉산더 레코르라고 생각했다.
‘사령관…. 아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가.’
군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사령관인 자. 이한은 의구심을 가졌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이한은 알렉산더를 따라서 깊숙이 들어갔다. 두 번의 보안문을 더 통과해서야 겨우 들어갔다. 삭막한 복도가 화려한 장식으로 점점 젖어가듯 변했다.
루- 라라라- 루루-.
클래식 음악이 들렸다. 고급스러운 카펫이 땅바닥에 길게 깔렸다. 고전적인 가구들과 장식으로 방안이 반짝였다. 그 중심에는 한 사내가 앉아있었다. 몹시 깡마른 사내였다. 팔에는 링거를 꽂고 있었고, 피부는 바짝 말라서 원래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노인 같으나 실제 나이는 알렉산더와 비슷한 중년이다.
‘저자가 사령관?’
이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보다 호리호리했다. 병자나 다름없는 듯하다.
“유르겐 사령관, 이 아이가 이한입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유르겐 사령관은 움푹 들어간 눈으로 이한을 쳐다봤다. 눈동자만큼은 선명한 푸른빛이었다.
“불안해하지 말게.”
사령관의 말투는 노인 같았다. 실제나이보다 더 깊은 세월의 흐름이 뚝뚝 묻어나오는 듯했다.
“제가 불안해한다는 겁니까?”
이한이 반문하다가 아차 싶었다. 쓸데없는 말은 삼가라고 알렉산더가 말했다.
“금방 차분해지는군. 과연 듣던 대로야. 이번 사이코프레임은 이 아이의 것인가?”
유르겐이 알렉산더에게 물었다.
“그렇게 정했습니다. 당장 전력이 필요하니까요.”
“짧은 경험이 무의미할 정도로 자기관리가 뛰어나군.”
“시대를 잘 타고 났으면 군인이 아니라 형사 콜롬보가 됐을 아이입니다.”
알렉산더가 농을 던졌다. 유르겐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가 손을 뻗어서 이한의 손끝을 잡았다. 이한은 유르겐의 팔목에서 짓눌린 듯한 자국을 발견했다.
‘팔목에 상처가 있어. 뭔가 조인 듯한….’
이한은 갑자기 온몸이 찌릿했다. 사령관의 손에 닿자마자 혈관이 감전되는 듯하다.
쿵!
이한의 심장이 떨렸다.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방금 그건.’
이한은 상대가 사령관이라는 것도 잊은 듯이 눈을 매섭게 떴다. 그가 사령관과 알렉산더를 노려봤다.
“예민하군. 그리고 마음의 벽이 단단해. 나조차도 표면 밖에 훑지 못하겠어.”
유르겐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목이 쉰 듯이 음정이 거칠거칠했다. 이한은 문득 예전에 들었던 레드 중사의 말을 떠올렸다. 이한은 작은 단서도 쉽게 놓치지 않는다.
“정신감응… 능력입니까?”
이한이 예전에 생포했던 엘루 메이지를 정신감응능력자의 손에 맡겼다. 그 정신감응능력자가 눈앞의 사령관일지도 모른다. 유르겐이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온 환경이 너를 그렇게 만든 건가….”
유르겐은 이한을 내버려두고 알렉산더와 이야기를 했다. 몇 마디의 중요한 말이 오갔다. 유르겐은 피곤한 듯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는 이한을 보며 마지막으로 말을 더했다.
“손이 따뜻하더구나. 마음이 따스하다는 증거지.”
유르겐과의 짧은 만남은 그게 끝이었다. 알렉산더는 이한을 끌고 나가다시피 했다. 이한은 영문 모를 이 상황을 차근차근 머릿속에 정리했다. 그는 기나긴 통로를 빠져나오면서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유르겐 사령관님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겁니까?”
“알 것 없다.”
“그런 것치고는 제게 너무 많은 걸 보여주셨습니다. 대충 예상갑니다.”
알렉산더는 짧게 신음했다. 이한은 통찰력이라는 측면만 따지면 소위 말하는 천재다. 암기능력이나 지식흡수력, 창의성이 좋아야만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남과 똑같은 걸 보아도 더 많은 사실을 깨닫는 부류가 있다.
‘하필이면 이한을 여기까지 데려오게 되다니.’
알렉산더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한이라면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많은 사실을 유추했을 터다. 이한이 기밀을 누설할 만큼 입이 가볍고 서투른 아이는 아니지만, 기밀은 지켜야하기에 기밀인 것이다.
‘눈이라도 가렸어야 했는데.’
이미 그런 판단하기에는 늦었다. 이번 호출은 알렉산더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서류를 검토하던 사령관이 갑작스럽게 지정한 것이다.
“오늘 여기서 본 건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특히 학생들에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저 제 생각이 맞는지 확인만 해보고 싶습니다. 사령관님은 제정신을 유지가능한 시간이 제한적인 걸로 보입니다. 아마도 정신감응능력의 부작용이겠죠. 평상시에는 수갑 같은 걸로 팔을 묶고 방에서 지내고….”
알렉산더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 더 말하지 마라. 똑똑한 걸 자랑하고 싶은 거냐? 그래, 그 짧은 시간에 쌓인 서류를 검토하고 앞으로의 방침을 정하는 거지. 그 귀중한 시간을 너를 위해 사용했다. 사령관이 자기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짧아. 다짜고짜 능력을 혹사한 탓이지. 기억이 혼재되고 자아가 뒤섞였어. 이제 만족하나?”
알렉산더는 화가 난 듯했다. 이한을 향한 분노라기보다는 사령관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죄송합니다.”
이한은 자신이 다소 건방졌다는 걸 알았다.
“2세대 사이코프레임 강화병은 네가 최초다. 그 의미를 알겠나?”
“조금은 알겠습니다.”
“드래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건, 다르게 말하자면 인류에게 드래곤과 동등한 위협이 된다는 것이지.”
“….”
“어려운 결정이었다는 것만 알아둬라. 이한.”
알렉산더는 지친 얼굴이었다. 사령관이 제정신으로 깨어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듣고 있던 이한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어려운 결정이었겠죠. 이제 막 10살을 넘긴 애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것이니까.”
알렉산더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한의 말이 그의 폐부를 찔렀다. 아크의 참모장인 그도 종종 망각하곤 했다. 인류는 역사상 가장 잔혹한 결정을 했다. 소년이라고 칭하기에도 부끄러운 아이들에게 인류의 미래를 맡겼다.
‘어쩌면 우리는 이한 같은 부류의 아이를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소년인데도 우리와 동등한, 어쩌면 능가하는 정신력을 가진 존재. 양심의 가책 없이 무거운 짐을 맡길 수 있는 초인.’
유르겐 사령관은 사이코프레임을 이한에게 맡겨도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유르겐은 이한의 성품을 대강이나마 파악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인류에게 창칼을 겨눌 인물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만 돌아가라. 한.”
알렉산더가 차마 이한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말했다. 이한은 경례를 하고는 언더아크를 빠져나왔다. 군인들이 차량을 운전해 이한을 숙소까지 데려다줬다.
“후우.”
이한은 알렉산더에게 까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상황이 싫었다. 불확실하며 통제가 불가능한 환경은 위험하다. 이한은 본능적으로 오늘 같은 상황을 꺼려했다. 만약 이곳이 아크가 아니었다면 언더아크라는 수상한 곳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터다. 그는 크누트와 같은 용감한 모험가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는 확실해. 아크에서는 이제 내가 필요하다.’
힘의 균형이 서서히 역전됐다. 지금까지는 아크가 이한의 모든 걸 쥐고 있었지만, 이제는 이한이 주도권을 조금이나마 잡았다. 만약 이한이 행여나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아크는 순수파 습격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는다. 사이코프레임은 그만한 힘이 있다.
‘하지만 항상 똑똑하게 행동해야 돼. 그 사람들은 어른이야. 무방비하게 내게 모든 걸 맡기진 않아.’
안전장치 하나 없이 이한에게 주도권을 내줄 아크가 아니다.
문득 이한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이… 그토록 혐오하던 최고위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데, 이익과 손해를 따져가며 아크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배신할까봐 두려워한다.
“…웃기고 있네.”
이한은 잡생각을 지웠다. 잠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샤워조차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그는 이불 속에서 단말기를 켜서, 한국에서 보내온 밀린 메일을 확인했다.
‘나는 단지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이한이 웅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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