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of the Mound RAW novel - Chapter 69
1.
5월 18일, 대구구장에서 치러진 레이번스와 엔젤스의 주중 3연전의 최종 승자는 엔젤스였다.
– 공이 높게 떴네요.
– 경기 끝! 11회 말, 엔젤스가 드디어 이 긴 승부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11회 말.
접전을 넘어, 격전이자 혈전에 이르는 승부였다.
“아, 이제야 끝났네.”
패자는 물론, 이긴 승자마저 승리에 대한 환호성 대신에 한숨을 내뱉을 승부.
“이게 주중 경기라는 게 더 절망적이야.”
그리고 이번 경기를 끝으로 곧바로 주말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에 탄식이 나오는 승부였다.
“그냥 9회에 점수 지켰으면 곱게 끝났잖아?”
“그냥 9회에 점수 안 냈으면 곱게 끝났잖아?”
그렇게 레이번스와 엔젤스, 양 팀 선수들이 상처뿐인 승패를 짊어진 채 다음 경기를 치르기 위해 대구구장이란 무대를 떠났다.
“엔젤스에 대한 정보는 다 모았군. 생각보다 훨씬 더 잘 모인 것 같은데, 안 그래?”
“예. 그게 아니더라도 엔젤스가 필승조를 전부 소모했으니, 이번 주말 3연전은 생각보다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낙관하지는 말자고. 야구는 끝날 때까지 모르는 거니까. 일단 마지막으로 검토해서 선수단에 보내주자고.”
“예.”
자신들의 상대가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들의 홈그라운드로 온다는 사실을 파악한 레인저스 전력분석팀은 미소를 지은 채 무대를 떠났다.
– 진용아,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예.”
– 그럼 내일을 기원하며 주문을 외우자.
“그거 꼭 해야 해요?”
– 안 하면 나 삐질 거야. 너 귀신이 작심하고 삐지는 거 본 적 없지?
“젠장, 할게요.”
그리고 내일 고척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출전하게 될 선발투수 역시 무대를 떠났다.
– 늘어나라 존, 존!
“늘어나라 존, 존!”
좀 더 또라이가 된 채로.
2.
5월 19일 금요일.
한국 유일의 돔구장인 고척 돔구장은 불타는 금요일을 야구와 함께 태우기 위해 일찌감치 찾아온 팬들과 불타는 금요일 내내 일을 해야 하는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황선우가 그런 고척 돔구장을 찾아온 건, 오후 4시가 조금 지난 후였다.
평소처럼 전자 담배를 목에 걸고 등장한 그는 몇몇 선수들 그리고 기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라커룸으로 향했다.
라커룸으로 향하는 그의 입가에는 실소가 걸려 있었다.
‘인터뷰 한 번 하기 참 힘들군.’
오늘 황선우 기자가 고척 돔구장을 방문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한 선수와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이진용, 하루아침에 대단한 선수가 됐어.’
인터뷰 대상은 다름 아닌 이진용.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11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 보유자가 된 그의 몸값은 현재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상황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이진용과 인터뷰를 하고자 하는 기자들은 넘쳐났다.
엔젤스 구단과 별 관계가 없는 기자들조차도 무작정 엔젤스 구단에 이진용에 대한 인터뷰 요청을 했을 정도.
‘여러모로 대단한 선수가 됐지.’
그러나 막상 이진용과 독대 수준의 인터뷰를 한 기자는 이제까지 없었다.
물론 엔젤스 구단이 이진용을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절대반지처럼 꼭꼭 숨기려고 하거나, 이진용의 콧대가 하루아침에 솟아올라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하거나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진용이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만들어낸 방송 사고였다.
‘······여러모로 대단한 또라이야.’
이진용이 거기서 전국에 자신의 또라이 기질을 증명하는 순간, 홍보팀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해졌다.
이진용, 이 새끼 사고 치지 못하게 막아!
자연스레 홍보팀은 이진용이 또 한 번 사고를 칠 수 없도록, 언제나 홍보팀 직원이 같이 움직였고 인터뷰 일정도 최대한 줄였다.
그 누구보다 이슈를 원하는 기자들과 이진용을 단 둘이 붙여두면 어떤 사고가 또 터질지 몰랐으며, 실제로 기자들 입장에서는 이진용이 또라이 짓을 해주는 게 그들에게는 특종이었으니까.
특히 이진용이 선발로 출전하는 오늘, 금요일에는 이진용의 인터뷰를 허락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선발 출전을 앞둔 선발 투수가 무슨 짓을 할지는 하늘 위의 신조차 모르기에.
그런 상황에서 황선우 기자가 이진용과의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된 건, 그동안 황선우 기자가 엔젤스 구단과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덕분이었다.
여러모로 귀중한 기회.
‘하지만 어쩌면 오늘 이후로는 만나기가 쉬워질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이 순간 황선우 기자의 머릿속에 맴도는 건, 이진용에 대한 우려였다.
‘오재우, 그 양반이라면 이진용의 피칭 스타일을 이미 완벽하게 파악했을 테니까.’
이진용, 그가 오늘 레인저스 전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레인저스라는 팀은 어떤 의미에서 이진용과 같이 분명하게 보이는 압도적인 스펙이 아니라 수싸움과 볼배합으로 싸우는 투수들에게 있어서 킬러와 같은 팀이었으니까.
실제로 구속은 느리되 영리한 피칭을 하는 투수들은 한국프로야구에 제법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구속이 느린 투수가 살아남는 방법은 보다 영리하고, 영악해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투수들 중에 레인저스를 상대로 좋은 승수를 거둔 선수는 최소한 황선우의 기억에는 없었다.
‘만약 여기서 무너지면, 이제까지 영광이 신기루처럼 되겠지.’
더불어 여기서 이진용이 레인저스를 상대로 참담한 모습을 보인다면 세상은 이진용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매몰차게 그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버릴 것이다.
‘스펙이 부족한 투수의 숙명이지.’
그게 현실이었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는 무슨 모습을 보여주든 언젠가 기회를 더 받을 수 있지만, 스펙이 부족한 투수에게는 그런 기회를 얻기 위해 다시 한 번 밑바닥부터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한다.
‘심리적인 부담감도 상당하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모든 투수들이 기념비적인 기록을 거둔 이후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촛불이 평소보다 더 크게 불꽃을 태웠다는 건 분명 무언가를 소모했다는 의미이며, 무엇보다 그때보다 더 나은 피칭을 보여주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니까.
11타자 연속 탈삼진 기록이 다시 나올 가능성은 누가 보더라도 없지 않은가?
‘궁금하군.’
때문에 황선우는 더더욱 기대했다.
이진용이란 투수가 과연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적어도 평범함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지.’
하물며 황선우가 알고 있는 이진용이란 투수는 그 어떤 투수와도 비교를 거부하는 비범한 사내였다.
당연히 이번 상황에서도 이제까지 황선우가 보았던 그 어떤 투수와도 비교되지 않을 모습을 보여줄 터.
그런 황선우의 예상은 적중했다.
“늘어나라 존, 존!”
‘응?’
이진용은 정말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늘어나라 존, 존!”
정말 남다른 모습을.
3.
– 진용아, 이제 슬슬 주문 외워야지.
김진호의 말에 이진용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 한숨 끝에 이진용은 김진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김진호 선수, 이거 효과 있는 거죠?”
– 효과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톰 글래빈이 경기 동안 그런 주문을 외운 걸 내가 들었어.
“사실이죠?”
– 아니, 구라 같으면 톰 글래빈에게 전화 걸어서 물어보든가? 너 톰 글래빈 만나봤어?
“아뇨.”
– 난 인마 톰 글래빈하고 격식 없이 지내던 사람이야. 아마 메이저리그에서 톰 글래빈 면전에 새끼 경기 좆나 재미없게 하네, 빨리빨리 좀 합시다, 예? 라고 말한 사람은 나 포함해서 몇 없을걸?
“그게 격식 없이 지내는 겁니까?”
– 격식이 있게 지낸 건 아니잖아?
이진용은 대답 대신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김진호와 나눈 대화들이 떠올렸다.
김진호, 그는 이진용에게 말했다.
톰 글래빈처럼 던져보라고.
그 말에 이진용은 당연히 대답했다.
드디어 미치셨군요!
그런 이진용에게 김진호는 설명을 해줬다.
이제부터는 넌 모든 구단들의 현미경 위에 올라왔고, 기본적인 스펙이 부족한 너로서는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대한 다양한 무기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무엇보다 이제부터는 제구가 되니까 스트라이크존을 보다 확실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메이저리그의 위대한 투수의 조언이었고, 그 조언에 이진용은 감히 반문 따위를 지껄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김진호는 자신이 아닌 톰 글래빈이란 투수의 피칭 스타일에 대해서 말해줬다.
그리고 동시에 톰 글래빈이 경기 전후로 언제나 하던 자신만의 주문도 알려줬다.
– 솔직히 효과가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해서 손해볼 건 없지. 안 그래?
“그렇죠.”
– 자, 그럼 주문을 외워보자.
“늘어나라 존, 존.”
늘어나라 존, 존.
그것이 김진호가 가르쳐준 주문이었고, 이진용은 그 주문을 지금 이 순간 외쳤다.
– 목소리가 작네. 더 크게!
“늘어나라 존, 존!”
– 어, 손님이다.
황선우 기자가 라커룸에 들어온 건 그 무렵이었다.
“예?”
놀람과 동시에 고개를 돌린 이진용의 눈에 이제는 익숙한 얼굴인 황선우 기자의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아, 황 기자님.”
이진용도 그런 황선우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감히 그 어떤 상황과도 비유할 수 없는 어색한 분위기였다.
“그건 주문인가?”
그 어색한 분위기를 푼 건 황선우였다.
“예? 아, 예.”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모양이군.”
인터뷰를 하러 온 황선우 입장에서는 이진용하고 어색한 분위기는 좋을 게 없었으니까.
“예, 두 번째 선발 등판이니까요. 그보다 인터뷰하시러 오셨죠? 성심성의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이진용은 그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이며 잽싸게 화두를 돌렸다.
– 인터뷰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이미 기삿거리는 다 나왔는데. 이진용, 정신병 의심돼! 이진용 병원으로 긴급 이송, 부상 부위는 뇌! 이진용, 정신병으로 은퇴!
김진호가 그런 이진용에게 시비를 걸었으나, 이진용은 상큼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그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곧바로 제대로 된 인터뷰가 시작됐다.
제대로 된 인터뷰답게 아주 특별한 질문은 오고 가지 않았다.
신기록을 세울 때 기분은 어떠했는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
야구를 할 때 무슨 생각을 했는가?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가?
그런 특별할 것 없는 질문들이 나왔고, 이진용은 대답했다.
그 질문도 그랬다.
“존경하는 선수는 누구지?”
특별할 것 없는 질문이었고, 이진용은 그 질문에 기꺼이 대답했다.
“존경하는 선수는 많죠. 개중에서도 가장 존경하는 건 역시 김진호 선수입니다.”
그 말에 황선우는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들 그렇지. 한국국적에 투수로 뛰는 선수 중 그를 존경하지 않을 투수는 없을 테니까. 참 대단하고 위대한 선수였어.”
그리고 김진호도 동감한다는 듯이 황선우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김진호 선수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딱히······ 김진호 선수가 활약했던 당시 나는 선배들 쫓아다니면서 메이저리그를 구경하기 바빴으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김진호가 황선우를 스윽 내려다봤다. 뭔가 불길한 낌새를 느낀 듯한 표정으로.
그사이 이진용이 질문했다.
“그래도 뭐 소문은 있지 않습니까? 김진호 선수가 술 마시고 사고를 쳤다거나, 여자에게 차였다거나, 길을 가다 똥을 쌌다거나,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거나······.”
“음······ 잘 모르겠군.”
황선우의 대답에 이진용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고, 김진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롤모델은 누구인가? 피칭 스타일을 본다면 역시 그렉 매덕스가 롤 모델이겠지? 투심도 그렇고.”
이번에는 황선우가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이진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정말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죠.”
“그럼 오늘도 그렉 매덕스처럼 피칭할 셈인가?”
그 말에 이진용이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그 모습이 황선우가 눈빛을 빛냈다.
‘뭔가 있군.’
드디어 드리운 낚싯대에 물고기가 걸린 느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아주 신선한 것이 걸려 올라올 것 같은 느낌.
그런 황선우 기자에게 이진용에 정말 신선한 것을 줬다.
“오늘은 톰 글래빈처럼 던질 겁니다.”
“뭐?”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한 것을.
4.
고척 돔구장.
대한민국 유일의 돔구장이자, 레인저스의 홈구장인 그곳은 야구장이라기보다는 콘서트장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고척 돔구장의 마운드가 뿜어대는 존재감은 다른 야구장들보다 더 강렬했다.
그리고 그 마운드의 주인들, 투수들에서 느껴지는 존재감 역시 다른 야구장보다 강렬했다.
펑!
“스트라이크, 아웃!”
레인저스의 선발투수인 한강훈은 그런 무대 위에서 자신의 심볼이자, 전부라고 할 수 있는 152짜리 패스트볼을 선보였다.
“이야, 한강훈이 1회부터 150이 넘네?”
“토종 투수들 중에 패스트볼 구속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놈이니까.”
“그래, 투수는 저래야지. 시원시원하게 존에 꽂아 넣어야지.”
한강훈.
최고 153킬로미터까지 나오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는 오른팔을 가진 투수.
동시에 마운드 위에서 거리낄 것이 없고, 가릴 것도 없는 그는 타자의 스트라이크존을 향해 쳐볼 테면 쳐보란 듯이 공을 던지는 배포를 가진 투수.
그런 그가 호탕하기 그지없는 피칭을 통해 엔젤스 타자들로부터 삼자범퇴를 얻어내는 모습은 콘서트장 같은 고척 돔구장의 마운드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피칭이었다.
“한강훈 최고다!”
“천사 새끼들 조져버려!”
그런 한강훈의 피칭에 레인저스의 팬들은 격렬하기 그지없는 환호로 보답했다.
“젠장, 저런 게 제일 빡친다니까. 일단 150짜리 나오면 존에 오는 걸 알아도 칠 수가 없잖아.”
“부럽다, 부러워. 누군 그냥 숨만 쉬어도 150짜리 던지고, 누군 아득바득 이를 갈고 트레이닝해도 140짜리 간신히 던지니까.”
반면 한강훈의 제물이 된 엔젤스에서는 질시 어린 푸념이 나왔다.
그렇게 1회 초가 끝나고 시작된 1회 말, 오늘 한강훈과 마운드를 공유할 또 한 명의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 이야, 한국에도 이제 돔구장이 있네. 그러고 보니까 그때 기억난다. WBC에서 도쿄 돔구장에서 일본 애들 상대했을 때. 그때 내가 일본 애들 상대로 1피안타 완봉승 거두면서 아가리 싸물게 했었는데. 아마 그때 도쿄 돔구장이 도서관보다 조용했을걸? 아, 그때 안타 안 맞았으면 퍼펙트게임으로 일본 애들 나랑 눈도 못 마주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저기, 야구 좀 하게 좀 닥쳐주시겠어요?”
– 왜 갑자기 그래?
“왜 갑자기? 그게 말도 안 되는 구라친 귀신이 할 말이에요?”
– 에이, 그거 가지고 삐졌냐? 속 좁은 새끼.
“젠장, 톰 글래빈이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포커페이스 투수였고, 마운드 위에서 웃기지도 않는 주문을 외우기는커녕 표정변화조차 없었던 투수라는 걸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 진작에 좀 알고 있지 그랬냐? 그거 알았으면 속을 일도 없었을 텐데? 안 그래?
“닥쳐요.”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귀신과 대화를 하며 등장한 투수.
베이스볼 매니저의 알림을 들으며 마운드에 올라오는 투수.
이진용이었다.
“왔다!”
그런 이진용의 등장에 3루쪽 원정관중석을 채운 엔젤스 팬들이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이호우다! 우아아!”
“이호우 선수 파이팅!”
“이호우 최고다!”
그와 동시에 1루쪽 더그아웃을 가득 채운 고척 레인저스 선수들이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기 시작했다.
“저놈이 이호우······ 아니, 이진용이군.”
그 날카로운 눈빛에는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봤던 것보다 더 작은데?”
“구속이 130이라서 그런 놈이 무슨 프로냐고 생각했는데 체구를 보니까 용케 130을 던지네.”
그렇다고 해서 방심이 섞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 구속으로 스트라이크존에 제대로 공을 꽂아 넣는 배포를 생각하면 보통 놈은 아니지.”
“볼배합도 장난 아니지. 타자가 예상치 못한 공만을 골라서 던져. 진짜 악마 같은 놈이라니까.”
그들은 오히려 이진용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절대 쉽지 않을 거야. 스카우팅 리포트 내용대로라면, 이진용이란 놈은 절대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오재우 전력분석팀장, 그가 정리해서 건네준 이진용에 대한 스카우팅 리포트 내용이 그렇게 하라고, 이진용을 상대로 결코 방심하지 말고 낙관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모두 침착하게, 이진용의 피칭에 스카우팅 리포트대로 대응하자고.”
동시에 그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이진용에 대해 공략할 수 있는 방법도 적혀있었다.
그게 레인저스가 이진용을 보고 방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였다.
‘첫 타자 상대로 초구가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올 확률이 82퍼센트.’
그리고 지금 1회 말, 레인저스의 1번 타자로 출전한 좌타자 김영후가, 작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했던 고졸 신인이, 그러나 고졸 신임임에도 이번 시즌 3할 3푼에 이르는 타율을 기록 중인 그가 이진용을 상대로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는 이유였다.
자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포심일 확률은 32퍼센트, 스플리터일 확률이 35퍼센트, 투심일 확률이 25퍼센트.’
레인저스 전력분석팀이 마련해준 이진용에 대한 자료는 타자들 입장에서는 과학 정도로 대단했으니까.
고민 따위를 용납하지 않을 정도였다.
‘좋아, 스플리터는 버리자.’
오로지 선택만 하면 될 뿐.
‘무리하게 타격하지도 말고, 가볍게 친다는 마음으로. 자신있게 휘둘러보자.’
당연히 김영후는 기꺼이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자신감을 가졌다.
‘그럼 릴렉스.’
의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고, 자신을 가지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이진용이 초구를 던졌다.
‘응?’
좌타자의 바깥쪽 낮은 코스에 꽂히는 공.
‘빠지는 공?’
펑!
“볼!”
김영후의 생각 그대로 스트라이크존을 빠지는 바깥쪽 그리고 낮은 공이었다.
‘초구가 빠졌네?’
예상치 못한 그 공에 김영후가 1루쪽으로 고개를 돌려 레인저스의 더그아웃에 있는 타격코치를 바라봤다.
타격코치가 그런 김영후에게 조금 멈칫거린 후에 사인을 줬다.
오더대로 타격할 것.
‘예, 알겠습니다.’
괜한 생각 하지 말고 오더대로 하라는 그 말에 김영후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다시 마운드 위의 투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바로 이진용이 2구째를 던졌다.
구질은 포심 패스트볼.
펑!
이번에도 조금 전과 비슷한 코스, 그러나 좀 더 스트라이크존에 가깝게 들어오는 공이었다.
“볼!”
물론 볼이었다.
그 공에 김영후가 마운드 위의 투수를 바라봤다.
‘뭐지?’
자그마한 체격, 그렇기에 그 누구와도 헷갈릴 수 없음에도 김영후는 마운드의 투수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생각은 이진용이 3구째를 던졌을 때 더 강해졌다.
펑!
“볼!”
3볼 노스트라이크.
타자에게 급격하게 유리해진 볼카운트.
그러나 김영후는 그 사실에 기쁨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마운드 위의 투수를 바라봤다.
‘뭐지?’
그런 김영후에게 이진용이 4구째를 던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김영후는 그 공을 노리지 않았다.
3볼 노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타격을 하는 건 바보짓일뿐더러, 이진용이 던진 그 공은 앞서 볼을 판정 받은 곳과 똑같은 코스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펑!
그렇게 들어온 공이 전광판에 130킬로미터로 찍혔다.
“스트라이크!”
그리고 그 공에 주심이 처음으로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렸다.
‘또 바깥쪽?’
김영후는 그 사실에 놀라기보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후에 다시 타석에 섰다.
그런 김영훈은 당연히 보지 못했다.
5구째를 준비하는 이진용이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주문을 읊조리는 모습을.
“늘어나라 존, 존.”
– 이 새끼 봐라? 그렇게 지랄하더니 결국 지가 알아서 하네?
이진용, 그가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얼굴을 꺼내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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