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42
제141화 그러지 마시고
마왕일 경우, 대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일단 마왕이 오기 전에 구세원의 친인들을 챙겨 피신하는 건 안 될 말이었다. 내가 없으면 마왕이 명교를 쑥대밭으로 만들 터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그는 나만 잡으면 명교는 건드리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마왕의 가시거리에 있다가 그가 나를 발견한 즉시 도주하는 게 유일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원력의 운용이 불가능할뿐더러 운신조차 원활치 않는 상태였기에 이도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설령 그가 오기 전에 어느 정도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달아나기만 해서는 덜미를 잡힐 공산이 컸다. 수차례 경험했던 바, 도주극의 성공에는 반격이 필수였다. 그러려면 경신을 펼칠 수준을 넘어 최소한 광환을 발출할 수 있을 정도의 원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운공을 재개하기에 앞서 몸부터 돌보기로 했다. 한두 시진 내에 완치될 부상이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전투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둘 참이었다. 그러려면 무리가 불가피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달렸다.
팔을 크게 흔들고 무릎을 높이 들며 껑충껑충 뛰었다. 절단되었던 부위를 중심으로 치 떨리는 고통이 엄습했다. 욕설이 바가지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나는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기껏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찢기고 터지겠지만 극통만 견디면 더욱 튼튼하게 결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부러진 뼈가 도로 붙으면서 더 단단해지듯이.
멀쩡한 근골을 스스로 파괴하는 꼴인지라 죽을 듯이 아팠다. 절로 눈물이 쏟아지고 비명이 터졌다. 하지만 이를 악 물고 참았다. 장왕 같은 추태를 보이긴 싫었다.
달리기는 어느 순간 춤사위로 바뀌었다. 무얼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나는 팔다리를 마구 휘둘러가며 미치광이처럼 날뛰었다.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지켜보는 광객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내 땀에 흠뻑 젖은 나는 오래 참았던 오줌을 갈기듯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전신을 짓이기던 무자비한 고통이 묘한 희열감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불덩이 같은 쾌감은 찰나였고 기나긴 극통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다 인내의 한계에 이르자 또 한 번 황홀감이 일었다. 육신의 뇌옥에서 벗어나 천상에 이른 듯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지옥이 시작되었다.
이건 뭐지? 약 올리는 건가?
분통이 터졌으나 극한의 고통 막바지에 만나는 황홀경의 유혹 덕분에 나는 혼절하지 않고 버텨냈다. 그리고 몸에 대한 통제력을 절반 이상 되찾았다. 망외의 성과였다.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오절신공의 기본동작들이 가능해졌음을 확인한 나는 지체 없이 다음 단계에 착수했다. 가부좌를 틀고 무상심공을 운용하자 골수에서 한줌의 원력이 움텄다. 광환의 발출은 고사하고 뇌전진진초차 구사하지 못할 미미한 양이었지만 만족했다. 이는 마중물이었다.
나는 골수에서 짜낸 원력을 내단에 보냈다. 내단은 바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애를 태웠다. 조바심이 났지만 내단을 자극하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내단이 받은 만큼의 원력을 내보냈다. 나는 그것을 일주천한 후 다시 내단에 집어넣었다. 이번엔 화답이 빨랐다. 내준 원력의 양도 극미하나마 늘었다.
운공을 계속함에 따라 내단을 거쳐 내 내부를 휘도는 원력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최대치의 삼분지일을 넘어섰을 때 나는 운공을 중단하고 눈을 떴다. 그러고는 하늘부터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의 위치만으로는 시각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광객의 신세를 졌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습니까, 어르신?”
“해시(亥時)가 가까워졌을 걸세. 술시(戌時)를 알리는 종이 울린 지 한참 지났으니.”
그렇다면 비상 북을 울리게 한 주인공이 당도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왕일리 없다고 여기면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에 대한 공포심을 새삼스레 자각하며 목소리를 떨지 않도록 애썼다.
“준비를 마쳤으니 여기는 제게 맡기고 이제 담장 너머로 가 계시지요, 어르신.”
광객이 머뭇거렸다.
“도움이 못 돼 미안하네, 은공.”
나는 광객의 손을 잡았다. 철권을 익힌 외공무사의 손처럼 쇳덩이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르신이 한편이라 정말 든든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광객이 답변을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활짝 웃었다.
“하하, 제가 누굽니까? 전왕 아닙니까. 그러니 아무 염려 마시고 아까 낮처럼 편안히 제 활약을 감상하십시오.”
광객이 마지못해 나를 떠났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경신을 멈추었다. 멀리 명교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들판으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 * *
허탈했다.
소면통달이 데리고 온 이는 무왕이었다. 마왕이 아니라 그라서 안도했지만 동시에 신경질이 났다. 그래서 입에서 인사 대신 비아냥거림이 튀어나왔다.
“공사다망하신 분께서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이왕 오실 거면 좀 일찍 오시지요.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셨잖습니까?”
내 불퉁스러운 언사에 당황한 소면통달이 무왕을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봤다. 무왕은 덤덤하게 내 항의성 질문에 대꾸했다.
“그래, 늦었구나.”
맥이 빠졌다.
“사왕과 낭왕이 왔다고?”
나는 무왕의 물음에 고분고분 대답하지 않고 비꼬았다.
“왔지요. 오고야 말았지요. 설마 제가 어르신을 꼬드기려고 없는 소리를 지어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
무왕의 침묵은 길지 않았지만 나는 때 이르게 백기를 들었다. 아무리 불만이 있더라도 무왕에게 불경스럽게 굴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무왕이 뒤늦게 답을 주었다.
“네 말을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여길 오지도 않았을 게다. 며칠 나갔다 온 건 급한 용무 때문이었다. 하필 그 사이에 그들이 올지는 몰랐다. 내 불찰이다.”
무왕이 내게서 시선을 돌려 소면통달과 광객을 일별했다.
“이 아이와 얘기를 나누고 싶소.”
소면통달은 말귀를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무왕. 저희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다시 한 번 본교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무왕에게 허리를 접어 예를 취한 소면통달이 무왕을 신기한 듯 보고 있던 광객을 끌고 명교로 경신을 전개했다. 그들이 멀어지기 무섭게 무왕이 전에 없이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여기 오는 동안 저이에게 대충 듣긴 했다만, 대체 어떻게 사왕과 낭왕을 물리쳤느냐? 삼대호법과 광객이 가세하지 않고 장왕과 너, 그리고 비영 셋이서 그들을 막았다면서? 장왕이 사왕을 맡았다고 하더라도 너와 비영만으로는 낭왕을 감당할 수 없었을 터인데. 비영의 무위가 중원육기의 수준을 훌쩍 상회했던 게냐? 아니면 낭왕의 무력이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약했던 게냐?”
절로 실소가 나왔다. 얼마나 궁금했을까.
나는 무왕의 질문들에 역순으로 응답했다.
“낭왕은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는 어르신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는 강자였습니다. 비영은 확실히 다른 중원육기보다 우위의 고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제 전투에서는 거의 활약을 하지 못했습니다. 낭왕의 일격에 몸뚱이가 가로로 양단되었으니까요.
그들을 어떻게 물리쳤는지 물으신다면, 작전의 성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장왕 어르신을 상대하는 사왕의 뒤를 노렸습니다. 낭왕의 공격을 신법으로 회피하면서 그를 기습했지요. 어찌어찌 그에게 부상을 입혔는데, 그러자 낭왕을 두고 달아나더군요. 혼자 남은 낭왕은 하는 수 없이 그를 쫓았고요. 불과 반 각 만에 끝났습니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말을 아꼈다. 나중에 내 성취를 드러내 무왕을 깜짝 놀라게 해 주려는 얄팍한 속셈에서가 아니었다.
나는 무왕이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들으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가다니? 어딜 말이냐?”
“그야 사벌이지요.”
무왕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움찔했다.
“사벌이라니? 그들을 치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
“정확하게는 사왕을 제거하자는 말씀입니다. 지금 가면 능히 그를 처치할 수 있습니다. 낭왕은 자기를 두고 달아난 사왕의 처사에 분노했을 것입니다. 어르신과 제가 사왕을 합공하더라도 나 몰라라 할 공산이 큽니다. 설혹 그가 사왕에게 붙는다 해도 우리의 전력이 월등히 우세합니다. 사왕과 그는…….”
무왕이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잠깐!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구나. 낭왕의 무력이 나와 대등하다면 지금 네 말은 사왕을 네가 압도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더냐? 설마 사왕이 그 정도로 중한 부상을 입었단 말이더냐?”
“안 그래도 그 말씀을 드리던 참이었습니다. 사왕뿐만 아니라 낭왕도 상당한 내-외상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열흘간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여 사왕이든 낭왕이든 며칠 내로 붙으면 어르신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들 중 하나를 잡고 있는 동안 나머지 하나를 처리하십시오. 그런 연후 저를 도와주십시오. 장담컨대 승산은 구 할 이상입니다.”
“…….”
“명분도 충분합니다. 사왕이 낭왕을 끌어들였으니 어르신께서 저와 결맹을 하더라도 비난하는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아니,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무슨 상관입니까? 제 안위만 챙기며 주판알이나 튕기고 있는 작자들은 무시하면 그만입니다. 부디 사파 무림의 수괴를 해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무왕의 무심한 눈을 바라보며 나는 작심하고 쏟아낸 열변이 먹히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제길.
“전날 얘기한 대로 내가 앞서서 정사대전을 일으킬 수는 없다. 사왕이 물러갔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으냐? 이제 네가 염려했던 위협은 사라진 셈이니 말이다. 낭왕과 합세하고도 사왕은 너를 어쩌지 못하고 패퇴했다. 내가 이곳에 머무르고 있음이 알려지면 다시 쳐들어올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게다. 그러니 이쯤에서 만족하려무나.”
나는 고민했다. 더 설득해 볼까. 아니면 여기서 접을까.
결론은 전자였다. 무왕의 성정으로 보건대 더 매달려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지만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러지 마시고…….”
무왕이 단칼에 내 말을 잘랐다.
“그만! 이미 끝난 얘기다. 나는 네 청에 응하지 않겠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나는 무왕의 결정에 승복하기로 했다. 반발하는 건 존경하는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내가 순순히 고개를 수그리자 서릿발 같았던 무왕의 음성이 누그러졌다.
“서두르지 말거라. 시간은 네 편이 아니더냐? 그나저나 아직도 이해난망이구나. 사왕이 그토록 어이없이 물러가다니. 장왕의 위엄일 테지? 그의 신상에 이상이 있는 걸로 아는데, 무력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은 모양이구나.”
나는 무왕이 크게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오해를 바로잡아주려는데 무왕이 솔깃한 얘기를 꺼냈다.
“어쨌거나 한시름 놓았다. 나는 잠시 명교를 떠나있는 동안 네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을까봐 심히 불안했더랬다. 오늘 오전 명교의 경계선에서 난데없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기에 혹시 사왕이 쳐들어간 게 아닐까 싶더구나. 그래서 만사를 제쳐두고 이리로 달려왔다.
오다가 연강을 건너는데 북소리가 들리더구나. 구름 높이로 날고 있었으니 누군가 지상에서 나를 보고는 북을 친 것일 테지. 그래서 이미 일이 벌어졌으리라 예단하고는 간이 덜컥 내려앉았더랬다. 그런데 은천에 이르도록 너무나 평안하여 기이하더구나. 내가 잘못 생각한 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소면통달의 말을 들어보니 또 그게 아니었어. 어쨌든 수고했다. 장왕의 위용이 절대적이었을 테지만 사왕과 낭왕을 격퇴하다니, 대단한 전과가 아닐 수 없다.”
실상을 알게 되면 무왕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심이 무너지지 않을까. 극적인 역전승을 일궈낸 내 활약상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나는 무용담을 떠벌이기 전에 소소한 심술을 부렸다.
“북소리에 관해서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무왕의 이마에 그늘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