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 Summoner of the Knights Academy RAW novel - Chapter 205
205화.
몸을 추스르며 향한 장소는 다소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방이었다.
몇 번이나 이 장소에서 기사단원들을 소환했고, 나름대로 정이 든 방 안.
불을 켜자 어둑한 방이 밝아지며 그동안 놓쳐왔던 많은 흔적들이 보였다.
단원들끼리 놀 때 사용하던 카드, 뭘 했는지 꾹 눌린 자국이 있는 벽지, 아마 한나가 했을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 바닥에 흘린 소스 자국 등.
단원들과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방이 꽤나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사실상 마지막이 될 소환마법.
넬슨을 소환하면서 시작했던 이 장소에서 끝을 보고 싶다는 건, 단순히 내 욕심이자 별 의미 없는 상징일지 몰라도.
그래도 기분만은 나쁘지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너무 여유를 부리는 건가?”
뒤따라온 힐다에게 괜히 찔리는 마음에 한번 물었으나 그녀는 오히려 기분 좋은 미소를 띄워주었다.
“이런 상황이니까 작은 만족이라도 느끼는 게 좋은 거잖아.”
“……내가 해줬던 말이네.”
전장을 구르면서 사소한 행동으로라도 만족을 느끼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고 몇 번인가 기사단원들과 힐다에게 말해줬던 기억이 있다.
그녀의 말처럼 이런 상황에서는 작은 만족을 통해서 정신을 바로 잡는 게 중요하다.
사소한 행위를 쌓아가면서 전장에서 버티는 거다.
“좋은 말을 해줬어.”
스스로에게 자화자찬하며 나는 방 중앙에 섰다.
앞으로 이곳에 다시는 못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마리 레이로즈. 그러니까 부단장의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나가 휘몰아치듯 요동친다.
굳이 아까 첫 시작인 넬슨을 얘기했으니 비교하자면,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양의 마나.
이미 내 안에 담겨 있던.
몸을 망가뜨리던 대양과 같은 마나는 거의 다 내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사실상 마리를 소환하기만 한다면 전부 사용할 수 있는 상황.
또한 마나를 다루는 방식이나, 소환마법진을 짜놓은 구조 등도.
처음과 비교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수준 차이가 있었다.
‘노력하긴 했네.’
검술만으로 싸우려 했다면 얼마든지 편하게 왔을 수도 있다.
굳이 마법이란 학문에 뛰어들지 않고, 검만으로 나아왔으면 사실 훨씬 편하게 해결했을 사건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부족함을 알고, 계속 보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마법이란 학문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부족하나.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던 덕분에.
결국 나는.
다시 이 녀석들과 재회할 수 있었던 거겠지.
빛무리가 화려하게 감싸 오르며 방 전체를 뒤덮는다.
그것은 익숙하게도 한 점으로 응축되더니 곧이어 사람의 형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장미향이 감돈다.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향을 지닌 여인이었다.
붉은 머릿결이 흐트러지듯 쏟아져 내려온다.
현 레이로즈 가문의 세 자매.
마리안느, 메릴, 마리아를 다 봤으나.
그녀들은 만들어 진 레이로즈였다는 걸 존재만으로도 각인시키는 찬란한 붉은빛.
검을 바닥에 꽂아둔 채 쥐고 있는 내 손 위에.
어느새 갑옷을 걸치고 있는 여인의 손이 부드럽게 얹어진다.
내가 가장 믿었던 기사.
최후에는 은빛사자 기사단을 맡겼던 여인.
마지막 전투에서, 한쪽 눈을 다쳐 긴 검상이 그어져 있음에도.
그녀가 지닌 미에는 조금의 흠집조차 되지 못했다.
“단장.”
떨림이 담긴 목소리였다.
예전 아스모데우스의 영약을 먹었을 때 잠깐 내부에서 본 적이 있었으나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300년 만에 듣는 부단장의 목소리.
마리라고 불리는 건 싫어했으나, 레이로즈라 불리던 건 좋아하던.
장미와 같이 아름다우나, 가시가 돋아 날카로운.
“마리 레이로즈.”
은빛사자 기사단의 부단장.
그녀와 눈을 맞춘다.
내 손 위에 얹어진 손을 조심스럽게 가슴에 얹으며 마리가 무릎을 꿇는다.
“은빛사자 기사단의 부단장 마리 레이로즈.”
정중하면서도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행위.
300년간 마리 레이로즈가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게 작은 몸짓과 숨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졌다.
“드디어 단장님을 다시 뵙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드디어.
은빛사자 기사단이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다.
* * *
“……오옹?”
“음?”
내가 기숙사 밖으로 나서자 마침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마리아와 윤의 눈이 내게로 꽂혀 들어온다.
뭔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고정된 두 사람의 시선.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어색하니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전력 추가요.”
괜히 음식점 집 사장처럼 말해봤으나 싸늘한 시선들만 앞뒤로 꽂혀 들어올 뿐이었다.
하나같이 기가 센 여인들이다 보니 아무리 나라도 괜히 시선을 피하게 됐다.
뒤에 있는 힐다와 마리.
앞에 있는 마리아와 윤.
넷 사이에서 슬그머니 옆으로 비키자 마리아가 바로 물었다.
“야, 설마……?”
붉은 머리와 눈가의 상처.
또한 허리춤에 걸려 있는 레이로즈 가문의 가보.
물론, 가보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녹슬었으나 마리가 소환되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검이 따로 한 자루 있었다.
내가 죽을 때 잃어버렸던 사자의 검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뭐, 무슨 경위인지 몰라도 지금은 로만이 가지고 있으니까 당연했다.
“네 조상님이신데.”
“와 미쳤네.”
이마를 탁 치며 마리아가 혀를 내두른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바로 검부터 휘두르고 싶다는 충동이 광기 어린 붉은 눈동자에서 흘러 나왔으나.
“뭐라고 해야 되는 거야? 조상님? 아니면 할머니?”
“……할머니까지는 좀.”
미묘한 호칭에 나도 모르게 잠깐 고민에 빠졌다.
생각해 보니까 샬롯은 넬슨을 어떻게 부르나 궁금해진 순간.
“마리아 레이로즈.”
마리 역시, 마리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곧바로 차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마리아가 존댓말 하는 건 꽤나 오랜만에 봤다.
어쨌든 가문의 조상이니까 존댓말은 해야지.
“네 행실은 다른 기사단원들에게 들었다. 아주 정말 아주…….”
‘아이고.’
나도 모르게 쓰디쓴 탄식을 흘렸다. 같은 핏줄은 아니지만 어쨌든 같은 성을 쓰고 있음에도.
“마음에 안 들더군.”
마리아와 마리는 꽤나 반대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독단적인 행동부터 시작해서, 전투를 위해서라면 다소 과격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휘계통을 엉망으로 만들지. 네가 나중에 은빛사자 기사단에 들어올 거라면, 그런 행동은 허락되지 않는다.”
“…….”
“하지만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옆에서 장죽을 피우며 교활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는 윤에게 마리의 시선이 간다.
“내 검술이 아니라 윤의 검술을 배웠다는 점이다.”
“엥.”
뜬금없다고 생각했는지 마리아는 뒷머리를 긁적거렸으나 바로 윤이 마리아의 목을 잡아 당겨 어깨동무했다.
“네 검술보다 내 검술이 뛰어나다는 반증이 아니겠느냐? 그러기에 검술 좀 잘 가르쳐 주지 그랬냐.”
슬그머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지난번에도 말한 적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리와 윤은 꽤나 앙숙 관계였다.
‘생각해 보니까 힐다랑도 그런데.’
윤은 그냥 나 빼고는 거의 모두와 앙숙 관계였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참고로 300년 전, 윤이 혼자서 우리 기사단에 쳐들어왔을 때. 유일하게 일대일로 싸워낼 수 있었던 건 나를 제외하곤 마리뿐이었다.
마리가 제대로 검술을 남기지 않았기에 레이로즈 가문의 검술이 다소 변형되긴 했다.
뭐, 어차피 그대로 알려졌어도 쓸 수 있는 기사는 없었을 것 같지만.
“내가 직접 가르쳤으면 이 아이가 너의 검술 정도에 현혹되진 않았을 거다.”
윤의 말을 그대로 받아치는 마리.
두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검술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와, 둘이 싸우는 거 볼 수 있는 거 아니냐?”
마리아가 은근슬쩍 내게 와서는 속삭인다.
참고로 힐다는 이미 지긋지긋하다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당연히 안 돼지.”
평소라면 상관없지만 지금은 안 된다.
언제 어느 때 마수들이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지들끼리 싸우게 둘 수 없다.
“그럼 바로 검 뽑아, 어디 300년 전에 끝내지 못한 싸움을 계속해보자고!”
윤이 장죽을 강하게 물며 검자루 위에 손을 얹는다.
강자와 싸우는 걸 좋아하고 호전적인 성격인 그녀인지라 당연히 이런 식의 전개가 될 건 예상하고 있었다.
“말려야 되는 거 아니냐?”
마리아가 아쉬워하면서 내게 물었음에도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떤 대답이 마리에게서 튀어나올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하지 않는다.”
단호한 마리의 대답에 당장이라도 태도를 뽑으려던 윤의 자세가 무너진다.
“언제 마수들이 밀려올지 모르는 상황이야. 단순 감정만으로 체력을 뺄 수는 없다.”
내가 이래서 같은 기수이면서 가장 나이가 많은 레잔이 아닌 마리를 부단장으로 임명했다.
그녀의 판단은 보통 나와 같을 때가 많았고, 그것에 보충되는 논리도 튼튼했으니까.
“……하여간 낭만이 없다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리의 판단이 전적으로 옳았기에 윤은 굳이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무르익던 분위기가 팍 식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가던 길을 가버리는 윤.
마리아는 따라갈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마리 쪽을 선택했다.
“뭐 가르쳐 주실 거 있으십니까?”
“…….”
대담한 마리아의 질문.
다짜고짜 물어오는 게 마리아답다면 다웠기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보니까 샬롯은 넬슨 아저씨한테 뭐 많이 배우고 있던데요? 저도 뭐 배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강함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건 강하다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본능에 가깝구나.”
한눈에 마리아의 본성을 알아차린 마리는 옅은 숨을 흘렸다.
슬쩍 내 쪽을 보더니 일종의 허락을 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음, 간단한 거 정도는 알려줘도 무방하지 않을까? 윤이 쌓아놓은 검술에 지장이 가지 않게?”
“……아주 별로군요.”
그래도 마리는 이해하겠지.
지금 당장에 마리아의 검술을 뜯어고칠 수는 없을 테니까.
‘오히려 마리랑 윤의 검술이 뒤섞인 뭔가를 마리아가 만들어낼 수도 있겠네.’
어렵겠지만 왜인지 마리아 레이로즈라는 소녀라면 가능할 것도 보였다.
방금도 말했듯 그녀가 강함을 갈망하는 건 욕심이 아니라 본능의 수준이었으니까.
강해지기 위해서 레이로즈 가문의 검을 놓고, 윤의 태도를 쥔 것처럼.
이번에는 다시, 강해지기 위해서 레이로즈 가문의 검을 쥘 수도 있겠지.
“따라와라.”
“오예.”
바로 신이 나서는 마리의 뒤를 따라가는 마리아.
둘이 이름이 비슷해서 잘못 부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리…….”
내 말에 바로 반응한 마리.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으나.
“……아, 잘 배워 봐.”
“…….”
“미친놈.”
일부러 조금 늦게 ‘아’를 붙이면서 마리아에게 말하자 바로 욕지거리가 날아왔다.
마리에게서도 따가운 시선이 날아왔고, 마리아는 아예 대놓고 중지 손가락까지 들어주었다.
콩!
“아아악!”
그리고 바로 꽂아든 철퇴.
“단장에게 예의를 지켜라.”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고 위계질서는 바로 잡는다. 마리아의 머리에 주먹을 꽂아 넣은 마리.
“나는 단장이 아니라 친구인데요?!”
“그래도 예의를 지켜라.”
“나한테는 라인 레이먼드가 아니라 이안 아이넬이라고요!”
티격거리면서도 일단은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을 보며, 나름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