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461
461화
58장 총통(銃筒)(2)
현재 고려에서 사용되는 화포들은 후장식(後裝式)이 아니라 앞에 달린 총구 쪽에서 포탄이나 화살을 장전한 다음 심지에 불을 직접 점화하여 발사하는 전장식(前裝式)이다.
재장전 후 발사도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데, 한 번 발사한 후 두 번째로 발사할 때까지 몇 분이 걸려 사격 속도가 매우 느릴 뿐만 아니라 일단 발사한 후 재장전하는 동안 화포병은 아무것도 못 하고 적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취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취약점을 대비하기 위해 전투가 개전하면 화포병이 재장전을 할 수 있도록, 전열에 창병을 비롯한 보병들로 보호하고 있고, 첫발로 적의 전열을 흩뜨리고 나면 즉시 기병들로 소탕하는 위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대군과 상대할 것을 가정한다면, 재장전의 시간은 줄이고, 한 번의 공격으로 한꺼번에 다량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신기전과 비격진천뢰 등 화기와 화약 무기를 만든 이후, 화약량은 줄이면서 한 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날려 보낼 수 있는 ‘일발다전법(一發多箭法)’을 목적하는 방향으로 지속적인 개량과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실제 조선 시대에도 태종 시기부터 일발다전법을 터득하려고 노력했고, 세종대왕 대에 기어코 완성했다. 나도 그것을 떠올려 똑같이 일발다전법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미 신기전 다발을 한 번에 발사하는 화차를 만들었으면서 일발다전을 터득한다고 고생한다는 게 의아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차로 사용하는 한 번에 신기전 수십 개를 사출하는 원리는 화차에 장전된 신기전들의 심지를 길게 늘여서 한 번에 꼬아 점화시켜 점화된 불이 각 신기전에 도달하여 발사하는 식이라, 사실상 지금 내가 모색하던 일발다전보다는 다발다전(多發多箭)에 가깝다.
그리고 일발다전을 원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인 화약 소비량을 줄인다는 목적을 전혀 완성할 수 없어서 화약이 어마 무시하게 소비되고 재장전하는 것은 일반 화포보다 수배는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처음 보고가 올라왔을 때부터 귀를 의심했다.
“…장정 한 명이 능히 들고 다니며 사용하는 화기(火器)를 만들었다고?”
“예. 일발다전은 하지 못했으나, 장정 하나가 간단히 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다면 이 또한 군을 강화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여 전하께 보고를 올린다고 하였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도 개인화기인 ‘총’이 있으면 좋다고 생각은 한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신기전이나 대형 총통에 해당하는 화포들은 어디까지나 지원 화기이고, 개인이 자유롭게 운용할 수가 없다. 개인화기가 늘어난다는 것은 개인의 전력이 늘어난다는 것이니까.
하여 보고가 사실이라면 총병(銃兵)이란 병종을 추가하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다.
문제는 지금 고려의 수준으론 조선 시대 효종 대에 나선정벌에서 러시아군이 쓴 수발총은커녕 조총조차 쉽게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화포랑 달리 복잡한 격발기구도 문제지만, 화약을 만들어놓고 툭하면 갈라져서 화포를 상용화하는 데 오래 걸린 포신 문제가 총을 제조할 때도 답습한다. 이 경우에는 총신, 혹은 총열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단순히 개인화기라면 못 만들 것은 없다. 초 원시적인 핸드캐논인 ‘Handgonne’ 같은 것은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건 만들어봐야 사실상 혼자서는 사용 못 할 정도로 운용이 까다롭고, 명중률이나 화력도 화포에 비해 아주 약해서 차라리 현재 사용하는 쇠뇌를 더 만드는 게 나을 지경이다.
그래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화기는 어디까지나 기병과 보병 등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하는 정도로 사용하기 위해 지원 화기 위주만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 개인이 들고 사용할 수 있는 게 나왔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정말 놀라면서도, 내심 제대로 사용하려면 2인 1조로 사용해야 하는 원시적인 핸드캐논 같은 것을 만들었겠구나 생각했고 말이다.
그런데 어째 설명을 들을수록 초기 핸드캐논보다는 좋아 보이는 것 같았고 묘하게 형태의 설명이 조선 시대 승자총통을 떠올려서 오랜만에 화기의 화력을 확인할 겸 시찰을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진짜 승자총통이네?’
엄밀히 따지면 내가 아는 전근대 무기 중 승자총통에 매우 흡사한 무기고, 승자총통보다는 전체적으로 약간 더 크다. 그래도 형태는 비슷하고 얼추 사람이 들 수 있다는 것에 개인화기라고 불릴 만하다. 성능은 어느 정도일까?
탕. 탕. 탕.
생각하는 동안 시현이 시작됐다. 내 지시를 기다리는 것 따위는 없다. 화포 참관은 멀리서 떨어져서 보는 것이 기본이고, 허례허식을 최대한 줄여서 내가 와서 관람하더라도 별도의 지시가 없으면 평소 훈련과 확인을 하듯이 한번 시작하면 그대로 이어서 하라고 했다.
총통의 총신이 불을 뿜으며 천둥소리 같은 폭음이 울려 퍼졌다. 쥐고 있는 장정들이 몸이 흔들거린 것을 보니 반동이 제법 있는 듯 보였지만 넘어진 사람은 없는 것을 보니 반동과 무게는 개인화기로서 자격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명중률에 대해서는….
“적(的) 삼(三)이요! 불적(不的) 둘(二)이요!”
5명 중 2명이 맞추지 못했다. 덧붙여 총통수로부터 과녁까지의 거리는 약 100보(약 120m)다. 그런데, 절반이 겨우 넘은 것이다. 아무리 허례허식을 줄이고 만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러온다는 이야기를 저들도 들었을 것이고 사람을 골라서 제 나름 연습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만한 명중률이었으니 나와 함께 온 김기손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워져 마치 사단장 방문에 안내하다가 중대가 개판 난 것을 함께 목도한 중대장의 얼굴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런 결과가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 조선의 승자총통을 비롯한 전근대에 총이 핸드캐논보다 개인화기로서 전장을 지배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저런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실, 소형화기로써 이용되는 승자총통들은 대개 위력만 놓고 본다면 조총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명중률과 재장전 속도 문제 등 다른 부분들에서 조총보다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덕분에 총통의 명중률에 초점을 주고 낭패감을 느끼는 김기손과 달리 처음부터 다른 데 초점을 주고 있던 나는 지금 상당히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쁘지 않구나.”
“예?”
조선 시대 승자총통의 최대사거리 700~800m 유효사거리 160m라는 것을 생각하면 100보 앞에 있는 과녁도 제대로 못 맞히는 저 승자총통보다 좀 더 큰 총통의 성능은, 연습 기간을 고려해도 조선 시대 승자총통보다는 떨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딱히 조선 시대 총통과 비교하지 않고 다른 것을 보자면, 정말 뛰어난 성과라고도 해줄 수 있었다.
“저렇게 작게도 만들어 사용하는데 포신이 터지지 않고, 갈라지지 않으니 아조의 화기를 제작하는 능력이 일취월장하였다는 것이 아니더냐? 저것만 하여도 개량만 한다면 장차 노병(弩兵 쇠뇌병)처럼 포병(砲兵)을 편제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어찌 나쁘지 않다는 말이 나오지 않겠느냐?”
“과연! 그렇사옵니다!”
내 말에 김기손도 그제서야 눈앞에 있는 총통의 성능만이 아니라 저 총통이 내구도와 형태에 대해 초점을 돌리며 공감하고 감탄하는 듯했지만, 이건 내가 전근대 화포와 화기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기에 처음부터 넓게 봤기 때문이지. 김기손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신병기라고 내놓았으면 그 신병기 자체를 먼저 보지 않겠는가?
설마 일발다전을 위해 조정하는 노력을 하다가 포대와 포신을 줄이는 기술이 늘어나 개인화기를 만드는데 도달하다니…. 내가 포신과 포구 부분 등에 몇 가지 조언을 한 것이 도움 되었을지 모른다고 해도 완전히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걸 본 기분이다.
심지어 태종 시기까지 실질적으로 가장 작았음에도 완력이 강한 장정들이나 들고 힘이 약한 자는 두, 세 번 밖에 못 쓸 정도로 무겁다고 한 현자총통(玄字銃筒)보다는 훨씬 작고, 제대로 된 개인화기다.
이 정도면 조선 시대에서도 세종 시기 일발다전법 개발한 뒤 만들어진 화포들과 비교가 될 수준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일발다전법을 터득해야 한다. 생각해 보거라. 저 작은 화포에서 많은 공격이 확산하듯 퍼져 나가 화망(火網)을 구사한다면 전방에 있는 적들을 일소시키거나 마비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
성능 자체는 조선 시대에 비하면 떨어지지만 총통을 만들었다면 더더욱 일발다전에 매달려야 한다. 아니, 저것 때문에 일발다전법의 가치는 더더욱 커졌다.
조총 같은 것이라면 일발일전이라도 상관없지만, 조총을 만드는 것은 총통을 만드는 것보다 어려우니 아직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면 명중률이 떨어지니, 화약도 드는 소총통(小銃筒) 같은 위치의 저것을 사용해야 하는데, 뭐, 사용하려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도 조총을 아는 나로선 만족하기 힘들다.
하지만 일발다전법이 가능하게 된다면 그 부족한 명중률을 산탄총 개념으로 개인화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전방에 일렬로 늘어선 총통수가 쏜 총통으로 일시적으로 생기는 화망에 적들이 아비규환이 되는 것을 상상해 보거라. 그렇게 된 적들에게 재장전한 대형화포와 이어진 기병 돌격을 강행한다면 소탕하기가 오죽 어려울까?
“과녁을 맞힌 자, 맞히지 못한 자 가리지 않고 술과 고기를 내리고, 저 총통을 만든 장인들에게 면포 1필을 선물하라.”
“알겠사옵니다.”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개인화기를 만든 것은 큰 발전이다.
‘거기다 어쨌든 작은 포신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잘만하면 휴대 무기로 세총통(細銃筒)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 같고, 정말 많이 발전했어.’
* * *
동경에 주둔해 있던 함대 가운데 김방경이 지휘하는 크고 작은 300척의 함대는 동경을 떠나 대마도를 거쳐 일본 큐슈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우리는 구주에 정박하는 대로 군을 나눠 진지를 구축할 것이오. 이것은 모두 이번에 새로 편제된 수군을 단련시키기 위한 군사 훈련을 위한 것이오. 그대들은 이를 유념하여 신속히 움직여 주길 바라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계급은 이곳에 있는 장수들 중 누구보다 높았지만, 연령은 이곳에 있는 장수 누구와 비교해도 젊은 김방경은 하오체를 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장군. 훈련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정말 괜찮은 것입니까? 본군이 구주에 진지를 구축한다면 왜국에서 군대를 보내 대립하지 않겠사옵니까?”
동북양계(東北兩界)의 선병도부서(船兵都部署)중 원흥도부서(元興都部署:지금의 함경남도 정평)에서 동원된 선병도부서판관(船兵都部署判官) 후순(侯盾)은 김방경의 말에 걱정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수전을 전문으로 하는 수군을 정식으로 창설한 만큼 군사훈련을 한다는 취지는 이해했다. 물에 익숙해지기 위해 바다를 오가는 것도 납득했다.
정식 수군이 창설되기 전부터 신병들에게 물에 익숙해지기 위해 강이나 바다로 배를 띄워 훈련은 자신도 알고 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신이 가는 곳은 고려의 내지나 바다가 아니라 왜국, 그것도 왜국의 땅에 정박하여 진지까지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의 말에 다른 무관들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김방경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구주가 비록 외국(外國)의 땅이긴 하나, 아조에 조공을 바친 지가 오래되었소. 하물며 작금의 구주는 이미 매년 조공을 바칠 정도로 종순하니, 이렇게 도적들을 격퇴하는 정도의 수만 보낸 것이오.”
웃으며 그리 설명하는 김방경의 답변에 여러 장수들은 적어도 왜국과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크게 안도했다. 유일하게 날순만이 눈앞의 젊은 상장군의 대답에도 불안하여 되묻고자 했을 때,
“선병도부서판관(船兵都部署判官)은 걱정 말고 내 말대로 따라주시오.”
“…알겠습니다.”
온화한 얼굴과 목소리와 달리 대답 속에서 단호함을 느낀 후순은 더 이상 그 자리에서 따지지 않았다.
‘무언가 있구나.’
#작가의 말
*작중 태종 시기에 현자총통(玄字銃筒)이 실질적으로 가장 작다고 했지만 단순히 크기만 놓고 본다면 태종 시기에도 이미 조선 전, 중기 현자총통과 더불어 천자총통보다 주력으로 쓰는 황자총통(黃字銃筒)이 만들어지긴 했습니다.
문제는 태종 시기 황자총통은 크기는 작아도 위력도 형편없어서 안 쓰다가 세종 시기 화포 개발이 되면서 주로 사용된 것입니다.
**세종 시기 가장 개인화기에 가까운 세총통(細銃筒)이 있긴 한데, 이건 오늘날로 치면 권총같은 개념의 무기로 이후 개발되는 소총통이나 활, 조총 같은 개인 주력 무기의 위치에는 거리가 있는 휴대 무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