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01
교랑의경 201화
진 노태야는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을 편히 가지랬다고?”
진 노태야는 다시 한번 말을 곱씹으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독한 말이로구나, 아주 악랄해! 분을 못 이기고 원한을 품은 채 폐인이 된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편히 가진단 말이냐! 신선이 와도 그건 힘들지!”
진소 역시 따라 웃었지만, 그 웃음은 다소 억지스러웠다.
“가엾긴 합니다.”
진소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리되다니요. 병이 서서히 진행됐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이건 너무…… 차마…….”
사람은 약하디약한 존재다. 순풍에 돛 단 듯 아무 장애물 없이 순항하던 사람도, 작은 손가락의 지목을 받으면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라도 된 듯 산산조각 난다.
그 손가락은 헤아릴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아서 언제 자신의 몸을 가리킬지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공포스러운 일이다.
그 여인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손가락처럼 움직이고 있다. 그녀의 가벼운 손놀림에 강주에서부터 경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생사의 변화를 겪었다. 참으로 무서운 이가 아니던가.
진 노태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자가 가엾어 보이느냐? 정 낭자는 못됐고? 유 교리와 정 낭자는 이미 불구대천의 원수다. 저쪽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이지. 전쟁이 시작되면 인의와 도덕, 염치 따위는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이기면 왕이고 지면 역적이 되는 법인데, 어찌 이긴 자는 악하고 패한 자는 선하다는 말이 나와? 넌 이제 정사당에 들어가 일할 사람이다. 위선자가 될 생각은 집어치워.”
진소가 얼른 예를 표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소자는 유 교리가 가엾다는 뜻도, 정 낭자가 악하다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다만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한다지 않습니까. 같은 관료로서 연민이 들었을 뿐입니다. 정 낭자는, 정말이지…….”
진소는 말을 끝맺지 않고 삼켜 버렸다.
정말 독하고 악랄하다. 모질고 잔인하다. 앞길에 걸림돌이 있어 힘들어지면 보통은 뒤로 물러나거나 피해서 가기 마련인데, 정 낭자는 눈앞에 놓인 걸림돌을 깨부수거나 박살을 내 버린다. 어찌나 깔끔하게 치워 버리는지 흔적도 남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였다. 아마 그녀 손에 죽은 이조차도 자신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아, 이제 훤히 아는 사람이 하나 생기긴 생겼구나. 입을 움직여 말할 순 없으니, 모르느니만 못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이고 먼저 도발한 건 저쪽이라 해도, 이토록 독하고 악랄한 이라면 경계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상 인간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사람과 사람이 교류하면서 말실수를 하거나 누군가에게 밉보이는 일이 없을 거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정말이지……. 무엇보다도, 아직 소녀가 아닌가.
진 노태야는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선함보다는 다들 악함에 더 신경을 쓰기 마련이지. 한 번 악한 것이 백 번 선한 것을 덮는 법이다.”
“아버지, 그 낭자가 벌인 일이란 걸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내막을 알면 사람들은 진소 부자처럼 그 여인의 가엾은 처지를 동정할 리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부터 생각하는 법이니까.
그녀가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고, 어떤 어려운 일에 처했는지는 보지 않을 것이다. 본다 해도 딱히 느끼는 바가 없겠지. 대신 그녀가 남에게 당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해치려던 사람을 해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들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했고, 모든 계획이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은 것처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으며, 조금의 빈틈도 없고 흔적도 남지 않았다. 피를 보지 않고도 살인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이에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위험이다. 위험한 사람을 마주하면 보통은 물러서거나 피한다. 하지만 막강한 힘을 쥐었다면 위험을 없애는 길을 택할 것이다.
힘이 막강하고 능력이 대단한 사람일수록 그리 위험한 인물이 주변에 있도록 용납할 리 없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위험을 제거할 능력이 있지 않은가.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도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게다. 그러니 치밀하게 움직였겠지. 신중하게,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진 노태야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세히 알아봤느냐? 빈틈은 전혀 없었어?”
“유 교리는 발병 당시 ‘내가 시랑이 됐다’고 소리쳤습니다. 제가 승진하면서 이부시랑 자리를 놓고 관청에서 말이 많이 돌았는데, 유 교리가 가장 유력했답니다. 다들 웃고 떠드는데 진 시강의 아들이 지나가다가 웃으며 축하를 건네자, 유 교리가 바로 쓰러졌답니다.”
“진 시강? 그 댁 아들이 거길 왜 갔는데?”
“듣기론 귀덕낭장 주씨 가문의 일 때문이랍니다.”
진소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진 공자는 주 공자와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 일로 들렀다가 관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축하를 건넨 것이니, 이상할 일도 아니죠.”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할 건 없지, 이상할 건 없어.”
진 노태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힘주어 말했다.
“아주 적절하구나, 적절해. 치밀했어.”
거기까지 말한 진 노태야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유 교리가 참으로 억울하겠구나. 평생 몸을 바짝 엎드리고 신중하게 움직인 자다. 그자 손에 죽은 이가 한둘이 아닌데, 결국 어린애 둘한테 당하다니. 유 교리는 명석한 사람이라 지금쯤 진상을 알았을 게야.”
그 여인이 유 교리의 병을 진단하며 했다는 말이 또다시 떠올랐다.
마음을 편히 가져야 빨리 낫는다고 했으렷다. 염병, 참으로 악랄하구나. 진 노태야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십삼.”
대청 안. 진 시강은 문후를 올리고 물러가려는 진십삼을 불러 세웠다.
“네, 아버지.”
진십삼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진 시강은 말없이 잠자코 아들을 쳐다봤다.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요 며칠 관청에 드나든 게 주씨 가문의 일 때문이냐?”
진 시강이 한참 만에 물었다.
“네 아버지. 역시 아버지 눈은 못 속이겠네요. 아버지께 누가 된 건 아니겠지요?”
진 시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이다.”
진 시강이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유 교리가 시랑으로 진급했다는 소식을 누구한테 들었느냐?”
진십삼이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사당에 있는 사람들한테요. 아버지, 소자가 괜히 입을 놀렸습니다. 웃고 떠드는 자리에 끼어드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랬으면 유 교리께서도…….”
진십삼은 괴로워하며 자책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니?”
방 안에서 진 부인의 소리가 들렸다.
“승진하고 좌천되는 관료는 셀 수 없이 많아. 기뻐하는 이도 있고 슬퍼하는 이도 있지만, 유 교리처럼 풍질을 얻었단 소리는 금시초문이야. 견문이 없어 도량도 좁은 게지. 정말 우스워 죽겠어.”
진 부인은 말재간이 뛰어났고 잘못을 두둔하는 일에 도가 튼 이였다. 진 시강은 부인과 입씨름하는 대신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가 봐라, 괜찮아.”
진 시강이 진십삼에게 손짓했다.
“소자가 내일 유 교리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필요 없다.”
진 시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필요 없어.”
다 같은 관료라고는 하나 그런 자와 진 시강 같은 명문세족은 결이 달랐다. 조정에서 함께 관료로 지낼 때에는 예의상 왕래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진십삼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지팡이를 짚고 사환의 부축을 받아 나갔다. 벌써 십수 년이나 본 일인데도, 아들이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진 시강은 눈이 찌르는 듯 아팠다.
“됐어요, 그만 보세요. 사람만 좋으면 됐죠.”
진 부인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진 시강은 표정을 수습하고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등불로 환히 밝힌 실내에는 꽃이 그려진 자리가 깔려 있고, 쌍육과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수하미인도(樹下美人圖: 나무 아래에 여성을 배치한 그림. 풍요와 다산을 상징)가 그려진 육곡 병풍도 있었다. 하지만 탁자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 교리의 병이 수상하긴 하오.”
진 시강이 바둑판 앞에 앉으며 말했다. 사락사락 옷자락 소리가 들리더니 진 부인이 병풍 뒤에서 부채질을 하며 나왔다.
“뭐가 수상한데요?”
“진소의 영전은 이상할 게 없는데, 유 교리가 후임이라는 소식이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소.”
진 시강은 바둑돌을 들고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내려놓지 않았다.
“오늘 물었더니 누군가는 내가 말했다고 했다더군.”
“당신이 말했어요?”
진 부인은 맞은편에 앉아 소매를 털며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그 얘기가 나온 적이 있긴 한데, 그건 십삼이 얘기를 꺼냈을 때였소. 남들이 물을 땐 대충 둘러댔지, 유 교리라고 말한 적 없어. 내가 폐하를 곁에서 모신다고는 하나, 나도 누가 후임인지는 몰랐거든.”
진 시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다들 떠들어대는데 어디서 나온 말이면 뭐 어때요. 근거 없이 나온 말도 아니잖아요. 누가 말했든 뭔 상관이에요. 원래 모든 일은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 마련인걸요.”
진 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 후,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진 시강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관둡시다. 그자의 도량을 탓해야지.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운이 참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오.”
진 시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승진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스스로를 해친 거죠. 누굴 탓하겠어요.”
진 부인이 웃으며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내가 이겼네요.”
밤새 내린 비로 무더운 여름 날씨가 서늘해졌다. 비는 날이 밝을 무렵까지도 부슬부슬 쉬지 않고 내렸다.
말에서 내린 정사낭은 삿갓을 고쳐 쓰고 대문을 쳐다봤다. 주씨 저택의 현판이 보였다. 그래, 바로 여기다. 정사낭은 고개를 돌려 선물 상자를 들고 있는 사환을 보며 당부했다.
“젖지 않게 잘 간수해라.”
사환은 정사낭의 말대로 선물 상자를 꼭 껴안았다. 또 다른 사환이 앞으로 다가서며 문을 두드렸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문간방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고 이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정사낭이 예를 표했다.
“강주 정씨 가문의 넷째가 인사차 들렀소.”
“누구라고?”
주 부인이 물었다.
“강주 정…….”
여종이 대답했다. 이번엔 제대로 들은 주 부인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창백해진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어서 내쫓아라!”
눈 아랫부분이 검게 변한 주 부인의 얼굴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서, 어서 내쫓아. 우리 주씨 가문은 정씨 가문과 불구대천이야! 그, 그 사람들은 우리 교교를 괴롭혔어! 절대 용서 못 한다!”
여종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얼떨떨했지만 주 부인의 호통에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에라, 모르겠다. 주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 원수인 건 맞으니, 왕래할 필요도 없겠지. 내쫓으라니 내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