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86
교랑의경 286화
갑작스럽게 차를 내뿜는 진십삼 때문에 사람들이 일제히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주 낭자도 노래를 멈추고 진십삼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난 괜찮아요.”
진십삼은 시녀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는 웃으며 물었다.
“주 낭자, 이 노래는…….”
주 낭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환한 등불이 그 웃는 얼굴을 비추자, 주 낭자의 빛나는 눈동자가 더욱 돋보였다. 주위에 있던 소년 공자들은 넋을 놓은 채 주 낭자를 바라보았다.
“공자님께 아뢰옵니다. 소인이 일전에 무명의 고수가 차정사에 남긴 글씨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그 글씨에 온 마음을 빼앗겨 온종일 글씨를 감상하다가 불현듯 영감이 떠올라 이 안무를 만들었죠. 그 내용을 첫 소절로 삼았고요.”
주 낭자가 몸을 살짝 굽혀 예를 표하고는 완곡하게 물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세요?”
주위 사람들은 주 낭자의 말을 듣고 나서야 차정사 글씨가 생각나 웃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진십삼을 향해 우스갯소리를 했다.
“십삼낭, 그 글씨들을 안 봤던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놀라?”
진십삼이 미안하다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아니오, 아니야. 낭자가 원하는 대로 하시오.”
주 낭자가 웃으며 예를 올리고 다시 한번 악공에게 눈짓하자, 감미로운 연주에 맞춰 아름다운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기둥 뒤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춘령은 진십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가 주 낭자의 춤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춘령은 눈을 반짝였다.
이 세상의 어떤 사내가 주 낭자에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진 공자도 참 재밌어.”
“일부러 주 낭자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저런 게 아닐까?”
서로 속삭이듯이 의논하는 소리를 듣고 춘령은 고개를 돌렸다.
“진 공자가 누군데?”
놀란 얼굴의 춘령이 뒤에 앉아 있던 두 사환에게 물었다. 두 사환은 좀 전의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구긴 누구야. 주인 자리에 앉은 진씨 가문 십삼공자지. 남의 집 연회에 오면서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온 거야?”
사환이 웃으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춘령은 화들짝 놀랐다.
진십삼 공자! 어려서부터 다리가 불구였던, 박학다식한 진씨 가문의 절름발이! 저 사람이 바로 그 진십삼 공자라니!
춘령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주인 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소년의 시선은 더 이상 주 낭자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다른 한쪽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그의 눈가에는 애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춘령이 진십삼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어두운 옷을 입고 단정하게 앉아 있던 여인도 진십삼을 향해 싱긋 웃음 짓는 것이 보였다.
“저 봐요, 저 봐.”
진 부인이 웃으면서 팔꿈치로 옆에 앉아 있던 진소 부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두 사람, 눈짓으로 무슨 말을 주고받는 건지 모르겠네.”
진소 부인이 술을 한 모금 음미하고 조용히 웃었다.
“사내는 마음이 있지만, 여인은 마음이 없겠지.”
진 부인이 진소 부인을 흘겨보았다.
“언니, 질투하지 마요. 우리 십삼이 정 낭자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데.”
“아무리 가까워도 소용없다니까.”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진 부인을 부채로 가볍게 톡 쳤다.
“흥. 난 안 믿어요. 사람 감정이 그 빌어먹을 원칙 하나 못 이길까.”
진 부인은 정교랑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 낭자의 춤을 진지하게 감상하고 있는 진십삼을 쳐다보더니 잠시 생각에 빠졌다.
감미로운 노랫소리와 아름다운 춤사위, 시끄럽고 떠들썩한 분위기, 다닥다닥 붙어서 앉은 여종들, 환한 불빛 아래에 있는 이 모든 게 더없이 화려하고 흥겨워 보인다고 진 부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한쪽에 앉은 저 여인은 여전히 조용하고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앉아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서 어린 진단랑과 진십팔랑이 작은 소리로 깔깔대며 웃고 있는데도, 저 여인은 혼자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앞의 화려함과 왁자지껄함이 전혀 와 닿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무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쓸쓸한 분위기를 풍겼다.
저 아이도 참…….
“내 저 애를 기필코 웃기고 말겠어.”
진 부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침 햇살이 밝아오자, 삼중으로 겹겹이 세워진 육중한 성문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공자님, 공자님. 그만 일어나세요.”
노복이 마차 휘장을 들어 올리며 불렀다. 왕십칠은 눈을 감은 채 마차 안에 아무렇게나 퍼질러져 있었다.
“공자님, 성문 밖으로 배웅 나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노복이 귀찮다는 듯, 왕십칠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일찍 길을 나서느라 졸려 죽겠어. 주씨 가문 사람들도 따라 나오질 않는데, 배웅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건 또 그렇네.
노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저기 나온 수많은 사람은 정 낭자를 배웅하러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연한 생각을 하는 거겠지?
머뭇거리던 노복은 결국 휘장을 내리고 마부 옆에 앉아 앞쪽을 쳐다보았다.
열댓 명 되는 주씨 가문의 호위들이 말에 올라 마차의 행렬을 이끌었고, 그 뒤로는 정 낭자의 마차, 그 뒤로는 왕십칠의 마차, 그리고 마지막으로 갖가지 짐을 실은 마차 두 대가 일렬로 가고 있었다.
앞선 호위와 마차를 보면서 노복은 뭔가 아리송한 듯 생각에 빠졌다.
본디 경성을 떠나는 일은 우리 쪽에서 책임져야 할 일이었는데, 여인이 입을 열자마자 주씨 가문에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었지.
흠, 주씨 가문은 왜 그 낭자가 입을 열고 나서야 준비를 시작한 걸까?
노복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마부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노복은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성을 드나드는 행인과 마차들이 많다 보니, 이른 시간에도 성문 앞은 붐벼 막히기 일쑤였다. 하지만 노복의 예상과는 달리, 성문 앞까지 가는 길이 뻥 뚫려있었다. 양옆으로 갈라진 행인들과 마차들이 마치 정 낭자의 마차 행렬을 위해 길을 가른 것만 같았다.
정 낭자만을 위해 갈라낸 길이라……. 내가 또 너무 앞서가는 거겠지?
“앞에 배웅하러 온 사람들이 있어 주씨 가문 사람들이 먼저 갔습니다.”
시종 하나가 뛰어와 노복에게 알렸다.
정말 배웅하러 온 사람들이었어?
“누구기에?”
노복의 물음에 시종이 대답했다.
“주 부인이라고 하던데요.”
주 부인? 주 노야가 아침에 분명히 부인의 병이 다 낫지 않아 나오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외숙모가 조카를 이렇게나 챙긴단 말이야? 아픈 몸을 이끌고 나올 정도로?
주씨 가문 사람들이 온 거라면, 왕십칠이 나가 맞이해야 했다.
“공자님, 공자님. 어서 일어나세요. 주 부인이 배웅하러 나오셨답니다.”
왕십칠이 투덜거렸다.
“날 배웅하는 것도 아니잖아.”
물론 왕십칠의 불평이 노복에게 통할 리 없었다. 노복이 억지로 왕십칠을 마차에서 끌어 내리고 앞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마차 앞에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서 있는, 화려한 옷차림의 아리따운 미모를 가진 여인이 보였다. 누가 무슨 재미있는 말이라도 했는지, 여인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호호 웃기까지 했다.
저게 어딜 봐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야!
“음? 주 부인이 어디 계신데?”
왕십칠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노복이 흠칫 놀라고는 고개를 돌려 왕십칠을 쳐다보았다.
“저기에 있는…….”
노복이 마차 앞에 서 있는 여인을 가리키자, 왕십칠은 도리어 되물었다.
“어디에 있다는 거야?”
“저기 저분이요! 아, 저기 대전이 인사드리러 가네요.”
노복은 다시 한번 여인을 가리켰다. 마침 왕씨 가문 시종 하나가 웃으며 여인 쪽으로 인사하러 가고 있었다.
“부인께서 병중인데도 일부러 나오시고…….”
왕씨 가문의 젊은 시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태도가 불손하여 맞았다지만, 이번에는…….
여종 하나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시종이 놀라서 여종을 쳐다보는 찰나, 맑은 따귀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을 본 노복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끔 감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왜 또 맞은 거지?
“네 이놈! 부인께 무슨 말버릇이더냐!”
여종이 눈썹을 치켜뜨며 호통치고는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젊은 시종을 때려 내쫓으라고 명령했다. 노복은 아차 싶어 빠른 걸음으로 젊은 시종에게 걸어갔다.
“멀쩡한 사람을 병자 만들다니,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인 게야!”
여종은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듯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멀쩡한 사람을 병자로 만들어?
노복이 다급하게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그리고 즉시 왕씨 가문 사람을 시켜서 젊은 시종을 데리고 가게 했다.
진 부인은 아랫것들의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정교랑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진 부인이 뭐라 말한 건지, 주위에 있던 시녀와 여종들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정교랑만 빼고.
“이것도 재미가 없어? 일부러 배웅까지 하러 나왔는데, 좀 웃어줘요.”
진 부인이 정교랑의 어깨를 잡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교랑이 진 부인을 잠시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유령(劉伶)이라는 자는 술을 절제하지 않고 마시며 제멋대로 굴고, 집에서는 옷을 벗은 채 알몸으로 있곤 했죠. 누가 그 집에 놀러와 유령의 모습을 비웃자, 유령은 이렇게 대꾸했죠. ‘나는 하늘과 땅을 내 집이라 여기고, 이 방을 내 바지라 여긴다네. 그런데 자네는 왜 내 바지 속에 들어와 있나?’”
갑작스러운 정교랑의 이야기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넋을 놓았다. 가장 먼저 이야기에 반응한 사람은 진 부인이었다. 진 부인이 박장대소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정교랑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못 말리는 아이구나, 정말!”
진 부인은 배를 부여잡고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웃었다. 허리도 펴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는 옆에 있는 여종들을 붙잡으며 계속해서 못 말린다는 말을 내뱉었다. 정교랑은 그저 말없이 싱긋 웃고는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펴서 예를 올렸다.
다른 한쪽에서는 노복이 젊은 시종을 꾸짖고 있었다.
“저 진짜 별말 안 했습니다. 주 부인께 인사를 올렸을 뿐인데.”
시종이 뺨을 부여잡고 말했다. 솔직히 이번에 맞은 건 그리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시종은 억울해서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왜 내가 입만 열면 맞는 거야? 억울해 죽겠다고!
“사람을 잘못 알아본 거야. 맞을 짓을 했네. 저분은 주 부인이 아니야.”
왕십칠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주 부인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왕십칠은 인사를 하러 가지 않은 것이다.
역시 아니구먼. 그럼 저 여인은 누구지? 뿜어져 나오는 기품과 시종들의 숫자를 봐서는 보통 가문이 아닌 것 같은데.
노복이 옆에 있던 주씨 가문의 사환을 붙잡고 묻자, 사환은 콧구멍이 다 보일 정도로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설마 저분도 모르는 거요?”
사환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한마디가 있었다.
어쩜 이리 식견이 없을까!
“저희가 경성에 머무른 시간이 짧아서 그렇습니다. 저분이 어떤 분이신지요?”
깔보는 태도에도 노복은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저 마차를 보시라고.”
주씨 가문의 사환이 턱으로 마차 쪽을 가리켰다. 왕씨 가문 사람들은 일제히 진 부인이 타고 온 마차를 쳐다보았다.
좋은 마차네.
“저 연꽃 문양은 공주부의 표식이고, 저분은 진 부인이십니다!”
시골 촌뜨기들이 마차만 보며 감탄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함을 참지 못한 사환이 알려 주었다.
공주부, 진씨 가문!
비록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왕씨 가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씨 가문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진씨 가문에서 저리 잘 보이려고 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설마…….
“저, 진 부인이 설마 정, 정 낭자를 배웅하러 오신 거요?”
노복이 말까지 더듬으면서 묻자, 주씨 가문의 사환은 풉 웃음을 터트리고 노복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럼, 댁들을 배웅하러 나오셨겠소?”
작가의 말:
정교랑이 진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들려준 재미있는 이야기의 출처는 명나라 문장가 풍몽룡(馮夢龍)이 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