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65
교랑의경 465화
“단랑!”
두루마리 족자 한 개를 품에 안고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가던 진단랑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무시했다. 누군가가 단랑의 이름을 두어 번 더 부르면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멈춰 세웠다.
“뛰긴 왜 뛰어?”
진십팔랑이 숨을 헐떡이면서 물었다.
“볼일이 있어서 그래. 나 방해하지 마, 언니.”
진단랑은 진십팔랑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진십팔랑이 실소를 터트렸다.
“네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그래? 자수도 이제 배우기 시작했고, 공부할 것도 얼마 없으면서, 노는 것 말고 또 무슨 볼일이 있어? 됐고, 자, 이리 와. 와서 나랑 글씨 연습하자.”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진단랑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안 그래도 지금 글씨 연습하러 가는 길이란 말이야. 나, 정 낭자한테 가서 글씨 배우려고.”
진십팔랑이 깜짝 놀랐다.
“저, 정 낭자는 글씨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너 어리다는 핑계로 괜히 가서 정 낭자 귀찮게 하지 마.”
“그런 거 아니거든?”
진단랑이 까르르 웃으면서 말했다.
“정 낭자가 글씨를 가르치는 건 아니지만, 자기가 글씨 쓰는 걸 보는 것은 된댔어.”
글씨 쓰는 걸 봐도 된다고?
진씨 가문의 마차가 옥대교 앞에 멈춰 섰다. 사실 마차가 멈춘 것이라기보다는, 엄청난 인파로 인해 길이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어차피 못 가. 나는 내려서 걸어갈게.”
진단랑이 쪼르르 마차에서 내렸다. 진십팔랑은 얼른 진단랑을 챙기라며 몸종들을 재촉했다.
“언니, 필요 없어. 사람은 많고 자리는 좁으니까 나 혼자 가면 돼. 종이 펴 주는 몸종 하나, 먹 가는 몸종 하나에 시중드는 몸종 하나까지 곁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진단랑은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혼자서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갔다.
글씨 쓰는 걸 봐도 된다고?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차에서 내린 진십팔랑은 몸종과 사환의 호위를 받으며 간신히 옥대교 저택 앞에 도착했다. 저택 앞에서 고개를 드는 순간, 진십팔랑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진십팔랑의 눈앞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파가 모여 앉아 있었다.
진십팔랑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광경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매년 꽃등 놀이를 할 때마다 인산인해의 장관을 봤으니,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많은 사람 축에도 끼지 못했다.
항상 텅 비어 있던 옥대교 근처 정교랑의 저택 앞이 오늘은 사람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나이대는 다양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한쪽씩 나눠 앉아 있었는데, 여자들은 너울을 쓴 차림이었다. 작은 서안을 들고 온 사람도 있고, 무릎 앞에 종이를 깔고 글씨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좀 더 뒤쪽으로는 가난한 집의 어린아이도 어디선가 나뭇가지를 주워 와 바닥에 대고 글씨를 쓰고 있었다.
인파로 북적거리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이하고 경외감이 드는 풍경이 옥대교 앞에 펼쳐졌다.
정중앙에 앉아 있던 여인은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붓을 들고 탁자 위에 놓인 종이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진단랑은 간신히 정교랑 근처까지 비집고 들어갔다. 어린아이다 보니, 진단랑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단랑은 진지하게 종이를 펼쳐 놓은 후,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낭자, 낭자, 그 글씨는 어떻게 썼는지 자세히 못 봤어요. 다시 써 주세요.”
진단랑이 소리치자 정교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다시 붓을 들고 조금 전의 글씨를 써 내려갔다.
정교랑이 방금 썼던 종이를 옆에 놓자, 몸종 하나가 종이를 들고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진십팔랑은 순간 사람들의 눈에서 빛이 쏘아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저요.”
한 사람이 손을 높이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제가 가져갈 차례인 듯합니다.”
반근이 걸어가 손에 든 종이를 그 사람에게 건넸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 가득한 눈빛을 받으며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종이를 보물 떠받들다시피 두 손으로 받았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잠시 쳐다보다가, 얼른 다시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행여나 정교랑이 쓰는 한 획이라도 놓칠까 봐.
“십팔랑.”
누군가가 등 뒤에서 진십팔랑의 이름을 불렀다. 진십팔랑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박양 군주 댁에서 봤던 그 소녀들이었다.
“십팔랑, 너도 정 낭자가 글씨 쓰는 걸 보러 온 거야?”
소녀 중 하나가 웃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와 벼루를 진십팔랑에게 흔들어 보였다. 진십팔랑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소녀가 대꾸했다.
“에이, 진 낭자께서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평왕께 서예를 가르치러 가기에도 바쁜 몸인데. 글씨라고는 일절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이랑 다르겠지.”
진십팔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옷소매 안의 손을 꽉 쥐었다.
“서둘러야겠네. 정 낭자는 매일 반 시진만 글씨 연습을 하신대. 이러다 또 놓칠라.”
두 소녀는 진십팔랑의 양옆으로 지나가면서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몸종이 분한 얼굴로 서둘러 진십팔랑을 부축했다.
“아씨, 저희도 저리로 갈까요?”
몸종 중 하나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리로 가겠느냐고? 저리로 가서 뭐해?
– 글씨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 감상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에요. 소녀는 감상을 위한 서예를 할 줄 모르고, 더욱이 남을 가르치는 법도 모릅니다.
남을 가르칠 줄 모른다고 했던 사람인데, 내가 저길 가서 뭘 해? 정 낭자에게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진십팔랑은 잠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방금 전 두 사람의 말처럼, 반 시진이 지나자 정교랑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남아 있던 몸종들은 정교랑이 글씨를 썼던 종이를 사람들에게 나눠 준 후, 붓과 먹 그리고 탁자를 치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단랑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대문이 닫히자 서둘러 자리를 뜨는 사람도 있고,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계속 자리에 앉아 글씨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붓으로 자신의 지인과 장난을 치는 사람도 있고, 연못에서 붓을 씻는 사람도 있었다.
조용했던 옥대교 저택 앞은 다시 마차와 사람들이 오가면서 원래의 활기를 되찾았다.
“저런 게 바로, 진정한 은둔자는 저잣거리에 살고, 가장 통속적인 것이 곧 가장 우아한 거라는 말이로군.”
“출신도 배경도 따지지 않고, 배우고 싶으면 누구든 와서 배우라는 저 마음가짐이, 진정한 의미의 대유(大儒)일세.”
“당초 강주 선생이 망주(望州) 광양의 나무 아래에서 경서를 가르친 것이 생각나는군. 그때도 족히 백 명은 넘는 사람이 강주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지. 강주 선생의 가르침이 소리가 있는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강주 낭자의 가르침은 문 앞에서 자리를 깔고 글씨를 쓰는, 무성의 가르침이구려.”
“그럼, 이제 강주 선생이 두 명 있다는 거요?”
강주 선생.
본적지를 자신의 칭호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 유명한 진소조차도 진 상공으로 불릴 뿐, 구주 출신이라고 해서 진구주라 불리진 않았다.
진십팔랑이 심호흡을 한 뒤 정교랑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언니, 나 지금 안 가.”
진십팔랑이 들어오는 것을 본 진단랑이 외쳤다. 진단랑이 뭘 하려는 건지 소매를 동여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십팔랑은 그런 진단랑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정 낭자랑 같이 간식 만들 거야.”
진단랑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간식을 만들어?
그때 정교랑이 옷을 갈아입고, 소매를 동여맨 채 안에서 걸어 나왔다. 회랑 아래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세 몸종이 공손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할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도 무료하니, 재미로 요리나 좀 해 볼까 싶어서요.”
정교랑이 말했다.
재미? 저 낭자가 재미를 안다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목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십팔랑이 어색한 웃음을 쥐어짜냈다.
“낭자와 조용한 곳에서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청 안. 진십팔랑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해가 안 가는 게 한 가지 있어요.”
“나와 관련 있는 거라면 편하게 말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낭자가 글씨를 잘 쓴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 이게 다 뭐죠?”
진십팔랑이 심호흡을 한 뒤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난 지금, 이렇게 지내요. 매일 글씨 연습을 하고 있고, 그게 남에게 보여주지 못할 일은 아니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니 와서 보라고 한 거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교랑.”
진십팔랑이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고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솔직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남들과 똑같은 거짓말쟁이였네요. 당신이 쓴 글씨가 좋지 않다고요? 그렇게 좋지 않은 글씨가, 어떻게 천하제이 행서로 불릴 수 있죠? 어떻게 귀비, 태후, 그리고 폐하까지 좋지 않은 글씨를 칭찬하시냐고요!”
“그건 그들의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에요. 난 내 글씨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걸요. 난 나 자신에게 솔직할 뿐이에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내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진십팔랑은 마치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고 어찌할 수도 없다고요?”
눈시울이 붉어진 진십팔랑이 손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럼 당신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나 진소(陳素)가 온 경성의 웃음거리가 된 건 알아요?”
“몰라요.”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진십팔랑이 다시금 실소를 터트렸다.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참았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모른다고요? 네, 당연히 당신은 모르겠죠.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으니까.”
“신경 쓰지 않긴 해요. 진소, 세상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난 그 많은 사람을 일일이 신경 쓸 수 없어요. 오롯이 신경 쓸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죠. 우린 누구나 자신을 신경 쓸 수밖에 없어요. 남을 신경 쓰지 말아요. 진소, 날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자신을 챙겨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당연히 남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겠지! 무슨 일을 하든 자신만의 원칙이 있잖아. 당신의 그 원칙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야. 정나미도 없고 오직 원칙뿐이야. 당신 눈엔 사람 사이의 정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잖아!”
진십팔랑은 말을 끝내자마자 문을 홱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당에 서 있던 시녀와 몸종들, 그리고 진단랑은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놀라서 방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니!”
진단랑이 진십팔랑을 향해 외쳤지만, 진십팔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그런 진십팔랑의 모습에 진단랑은 민망하고 마음이 급해져 일단 그녀를 쫓아 나갔다.
진단랑이 나간 뒤,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반근이 서둘러 안쪽을 쳐다보았지만, 정교랑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아씨, 괜찮으세요?”
반근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하지만 다른 사람이 어떨지는······.
정교랑의 괜찮다는 말 한마디에, 반근은 울면서 뛰쳐나간 진십팔랑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