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02
교랑의경 502화
높은 누대 위의 동정을 살피던 범강림이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꽉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흥건했던 땀이 찬바람에 금세 날아갔다.
“이무, 짐이 상을 내리겠노라!”
높은 누대 위에서 들려온 말에 이무가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퉁퉁 부은 그의 얼굴에서는 흥분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오나 저 혼자 받을 순 없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멈칫했다.
“혼자 받을 수 없다? 그럼 네가 만든 게 아니란 말이냐?”
황제가 물었다.
그럼 혹시······.
황제와 누대에 있던 대신들의 뇌리에 이름 하나가 언뜻 스치자, 얼굴에 묘한 표정이 번졌다.
“아닙니다. 소인이 만든 것입니다.”
이무의 대답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황제는 무의식적으로 탁자를 쓸었다.
“다만 소인이 이 물건을 만든 것은 영감을 준 사람 덕분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소인은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소인 혼자 공을 독점할 순 없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하게 웃었다.
겸손한 데다 강직하기까지. 훌륭하구나, 훌륭해.
“그래. 짐이 함께 상을 내리겠다. 그자가 누구더냐?”
이무는 절을 올리며 성은에 감사를 표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옥대교의 강주 정씨 낭자입니다.”
탁자를 쓸던 황제의 손이 움찔했다. 누대에 있던 대신들의 표정도 일순간 굳어졌다.
역시! 이번에도! 그 여인이었어!
왜 어디서나 그 여인이!
대신들 뒤에 서 있던 풍림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찬바람을 맞으며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황제의 행렬이 어가를 느릿느릿 지나갔다. 일 년에 두세 번밖에 하지 않는 출궁이었음에도 마차에 앉은 황제는 바깥의 경치를 내다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귓가에 여전히 쾅 하는 폭발음이 들리는 듯했다. 방금 전, 새로 만든 돌포탄의 위력을 검증하기 위해 이무는 나머지 두 포탄도 마저 던졌다.
아, 아니지. 이무가 그걸 던진다고 하는 게 아니랬는데. 뭐라 부르든 아무렴 무슨 상관이랴.
돌포탄을 던지고 나자, 발석거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 물론 소와 양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 광경이 어찌나 참혹했는지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황제는 가까이 가 보지 않았지만, 대신들 중에는 살펴보러 달려간 이가 많았다. 그들 중 여럿이 고개를 돌리고 구토를 했다.
마차가 흔들리자 황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쨌든 실로 좋은 일이구나. 좋은 일이야.
세밑이 다가오는 이때, 이보다 좋은 새해 선물이 또 있을까. 이무란 자가 참으로 뜻밖이구나.
이무는 폭죽을 만드는 이씨 가문의 후계자인 이신의 서자로, 황제가 직접 관직을 하사하여 감문관으로 지내던 자였다. 얼마 전 일어난 화재로 문책을 당해 관복을 벗긴 했지만.
그때 집에서 폭죽 제조 방법을 개량하다가 불을 냈다고 하더니, 이 돌포탄 때문이었군. 괜히 장난질을 하다 불을 낸 게 아니었어.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씨에게 가르침을 얻었단 말은 또 뭐지? 제자로 거둔 건가?
“폐하께 아뢰옵니다. 저는 감히 제자라 칭할 수 없습니다.”
근정전에서 이무가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한쪽 옆에 서 있던 풍림이 눈을 들어 이무를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범강림 군감이 널 체포했다고 했지?”
“네.”
“거참 기이한 우연이로다.”
기이한 우연이라는 말에 근정전에 있던 대신들은 떠오르는 게 있는지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황제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너는 정씨와 아는 사이냐?”
“말하자면 얘기가 깁니다. 저는 정 낭자를 알지만, 정 낭자는 절 모르지요.”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초 정 낭자는 죽은 오라비들을 맞이하고 성으로 들어와 맛좋은 술을 나눠 주며 거리를 돌았습니다. 폭죽을 터트려 넋을 위로하기도 했고요.”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풀어 가던 이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무는 눈빛을 반짝이며 이리저리 손짓까지 했다.
“그날 본 불꽃놀이를 기억하십니까? 대낮에 펑펑 터지던 불꽃 말입니다.”
그날의 불꽃놀이?
궁에 있던 황제는 당연히 못 봤고, 자리에 있는 대신들 역시 그런 구경이나 하자고 밖으로 나갈 인사들은 아니었다. 가족들이 떠드는 얘기를 들었을 뿐인지라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린 터였다.
“그날 불꽃이 어쨌는데?”
대신 하나가 못 참고 물었다.
“그날 불꽃은 아주 높이 올라갔습니다.”
이무는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 저희 집 폭죽은 다들 최고로 치는데도 기껏해야 삼 층 높이밖에 못 올라갑니다. 그런데 정 낭자의 폭죽은 구 층 높이는 족히 될 정도로 올라갔어요. 폐하, 무려 구 층 높이였습니다!”
구 층 높이가 뭐? 보기 좋다고?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폐하, 폭죽은 높이 올라가고 싶다고 해서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희 이씨 가문에서도 끊임없이 연구에 매진했지만 삼 층 높이가 최고였죠. 소인은 화약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뜻밖에도 화약은 폭죽보다 더 높이 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화약을 만드는 게 가능했어요.”
“그게 네 돌포탄과 무슨 관계지?”
또 다른 대신이 물었다.
“소인은 그 불꽃놀이를 보고, 이를 화약에 접목시키면 전장에서 쓸 수 있는 폭죽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무가 말했다.
“그게 다란 말이냐? 그게 정 낭자가 네게 줬다는 가르침이라고?”
황제가 놀라 물었다.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그게 무슨 가르침이야?
이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
황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소인은 계속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집에 불까지 냈는데도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지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 정 낭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정 낭자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방법을 알려 줬단 말이냐?
황제는 궁금했지만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정 낭자가 소인에게 방법을 가르쳐 준 건 아닙니다.”
이무가 먼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소인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물으며, 이 화약을 어떻게 쓸 생각인지 물었죠. 순간 소인은 정신이 번쩍 들어 깨달음을 얻었고, 돌포탄에 화약을 넣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이무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덕분에 소인은 돌포탄을 개량할 수 있었습니다. 전부 정 낭자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그, 그런 것도 가르침이라 할 수 있나? 겨우 그 정도로?
황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것도 기이한 우연인가?
“정씨를 들라 하라.”
황제가 고개를 들고 명했다. 내시가 얼른 대답하며 뛰어나갔다. 내시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멈칫하며 옆에 있는 이에게 물었다.
“정씨가 어디 있지?”
어제 지진이 일어나면서 대리시에서는 정교랑의 심문이 중단됐다. 이어 지진이 아니라는 소식이 전해지긴 했지만, 궁노원에 일이 생겼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궁노원에 일이 생겼다면 여러 관리들이 처벌될 게 분명했기에 다들 구경하러 달려갔다. 빨리 결정을 내리라고 재촉하러 왔던 어사조차도 가 버린지라 정교랑만 대리시에 그대로 남겨졌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어쨌거나 황제의 입으로 조사하라고 명한 사람이 아니던가.
“뜨거운 물이에요. 아씨, 손 닦으세요.”
감방 안.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온 반근이 바닥을 자리 삼아 앉은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정교랑이 소매를 걷고 대야에 손을 넣어 씻었다.
“좀 있으면 밥이 올 거예요.”
반근은 대야를 치운 후 정교랑 옆에 꿇어앉아 감방을 죽 둘러보았다.
하룻밤을 지낸 곳이지만 여전히 낯설었다. 사실 감방이라 할 순 없었다. 이곳은 본디 옥졸들이 쉬는 곳이었다.
정 낭자의 명성이 마음에 걸렸는지 감옥 사람들은 정교랑을 후히 대해 주었고, 대리시 사람들도 못 본 척 눈감아주었다.
물론, 집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빌어먹을 풍림 그 인간 때문에.”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목소리를 죽여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바깥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모자가 달린 두봉을 두른 사람이 손에 찬합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밥이 왔구나.
반근이 얼른 일어서는데, 밥을 가져온 사람은 벌써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밥 먹어야지.”
그 목소리에 멈칫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던 반근이 깜짝 놀라 외쳤다.
“전하, 어떻게 오셨어요?”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모자를 벗고 환하게 웃었다.
“밥 가져다주러 왔지.”
진안 군왕이 손에 든 찬합을 들고 흔들었다. 반근은 찬합을 받고 얼른 자리를 만들려 했지만, 진안 군왕은 이미 두봉을 두른 채 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있었다.
“괜찮네요. 이 정도면 춥지도 않고. 감방은 처음 와 보거든요.”
진안 군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짓자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 덕분에.”
반근은 말없이 꿇어앉아 찬합을 열어 자리에 하나씩 꺼내 놓았다.
“전하는 드셨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니요. 내가 아침을 좀 일찍 먹어서.”
그 말을 들은 반근이 젓가락을 두 손으로 바치자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받았다.
“태후마마께서 나한테 잘해 주세요. 황궁 최고의 숙수도 내게 주셨죠. 이거 먹어 봐요.”
진안 군왕이 먹어 보라고 권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맛을 봤다.
“그리고 이것도요.”
진안 군왕은 음식을 권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식진 않았어요?”
“아니에요. 난 먹고 마시는 일에 까다롭지 않아요.”
진안 군왕이 빙긋 웃었다.
“네. 단것도 먹을 수 있고 쓴 것도 먹을 수 있죠. 고생도 맛보고 성공도 맛보고.”
“잘 적응하고 만족해야죠.”
정교랑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각자 밥을 먹었다. 한창 먹고 있는데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전하, 전하. 폐하께서 정 낭자를 들라 하셨습니다.”
어린 내시가 고개를 빼꼼 들이밀고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진안 군왕이 얼른 일어나 모자를 쓰고, 정교랑에게 손을 흔든 뒤 뒤돌아 빠져나갔다.
반근이 얼른 진안 군왕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궁에서 온 내시는 벌써 문 앞에 서 있었다.
“정 낭자.”
내시가 미소 띤 얼굴로 실내를 쓱 훑으며 마주 앉은 두 사람과 음식을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정교랑을 부르는 동안 황제도 대신들에게 오찬을 내리고, 편전에 앉아 간단한 수라를 들었다. 대신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이무란 자의 말은 어디까지가 사실인 거요?”
“정말 불꽃놀이를 보고, 말 한마디를 들었다고 그걸 만들어?”
“그러게 정 낭자는 비범하다니까. 또 한 사람을 깨우쳤구먼.”
옆에 있던 이의 헛기침에 대화를 나누던 대신들이 고개를 돌리자, 굳은 표정의 풍림이 보였다. 다들 말을 얼버무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한데, 그 돌포탄이라는 게 대단하긴 합디다.”
누군가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러게나 말이오. 나중엔 방패를 놓고, 양의 몸에 갑옷까지 둘러 주었는데도 소용없었지.”
또 다른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소가죽이 좀 두껍나? 생각해 보시오. 거기 사람이 있었다면······.”
또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거기 사람이 있었다면······.
조정 대신들의 머릿속에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 목격한, 피와 살이 낭자하고 밖으로 튀어나온 오장육부가 여기저기 널린 장면을 떠올리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대신들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리고 타구(唾具)에 구토를 했다.
몇몇 대신들이 보이는 추태에 나머지 사람들도 밥맛이 뚝 떨어졌다. 얘기들이 오가는 가운데 내시가 들어왔다.
“정 낭자가 왔습니다.”
여인인 데다 평민 신분인지라 정교랑에게는 조당에서 황제를 알현할 자격이 없었다. 이번에도 전처럼 편전에서 황제를 단독으로 만나야 했다.
장지문 너머에 서 있는 조정 대신들의 귀에 여인이 엎드려 절하며 예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씨, 이무를 아느냐?”
“압니다.”
황제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는군.
조정 대신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짓고,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이무가 만든 돌포탄이 네 공로라고 하던데.”
황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포탄을 그자가 만들었습니까? 원래 있던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