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13
교랑의경 513화
월식이 일어날 거라는 선포가 있자 경성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지난번에도 그랬잖아. 일식, 일식 하더니 어쨌어? 그 사람들이 말하던 날짜엔 아무 일 없고, 다른 날에 갑자기 일어나 식겁하게 했지.”
“어쨌든 일식이 있었던 건 맞잖아. 시간이 안 맞았을 뿐이지. 아무튼 대비해야 해. 언제 일어나도 놀라지 않게.”
사천대가 믿음직스럽지 않아 월식 예고로 인한 공황 분위기가 다소 희석되는 면이 있기도 했다.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섣달 보름은 예정대로 다가왔다. 그날 밤 달이 천천히 이지러지기 시작하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탄식이 절로 나오는 모습이었다.
동시에 경성 전역에 북소리와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는 절을 올리기 직전 시간을 확인했다.
축시 사각, 참으로 정확하구나!
그때 황제와 같은 동작을 하는 이가 하나 더 있었으니, 다름 아닌 곽원이었다. 침착한 모습의 황제에 비해 곽원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정신 없는 모습이었다.
아버지, 소자가 드디어 아버지의 명성에 부응하게 되었습니다! 천문관이라는 자리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단 말씀입니다!
곽원은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큰 북소리와 징 소리가 온 거리를 뒤덮었다. 물론 정교랑의 저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씨, 이러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까요?”
반근이 물었다.
“놀라지 않아. 오히려 가깝게 느끼지.”
회랑 아래에 서서 예를 마친 정교랑은 손을 단정히 모은 후 하늘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달을 보며 말했다.
“가깝다고요?”
반근이 물었다.
“하늘이 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거잖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 환기시켜 주는 거지. 그런데도 가깝지 않아?”
반근은 그 말뜻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하늘은 사람을 속이지 않으니, 두려워할 것 없어.”
정교랑이 말했다.
“사람을 속이는 건 사람이니, 사람이 두렵죠.”
반근이 기쁘게 웃으며 정교랑을 쳐다보자, 정교랑도 반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두려워할 것 없어. 천도(天道)기도 하니까.”
반근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서도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정교랑 옆에 서서 하늘의 달을 올려다봤다.
동녘이 밝아지면서 흉조로 인한 공포도 서서히 걷혔다. 천구(天狗)를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달을 지켜낸 것이다. 북소리와 징 소리가 잦아들고 온 경성이 기쁨에 취했다.
하지만 월식으로 인한 여파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천문 현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실정(失政)으로 인한 일이니 폐하께서는 죄기소를 내려 만백성을 위로하시옵소서.”
“조정의 부덕이 꼭 군주의 부덕이라 할 순 없지요. 신하들이 덕을 닦지 않는 것 또한 부덕이외다.”
“신하들이 덕을 닦지 않는 것은 군주의 명이 지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조당에서는 이런 논쟁이 벌써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무료함을 견디다 못한 대황자는 이따금 발을 움직였고, 옥좌에 앉은 황제조차도 성가시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보라니까. 다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자신의 죄라고 인정하면 큰일 나는 줄 안다니까. 천자한테만 죄를 인정해라, 벌을 받아라 하며 난리야.
“위(魏)나라 문제(文帝) 7년 8월에 일식이 있었고, 8년 2월에도 일식이 있었으며, 커다란 별이 보였소이다. 문제 재위 기간의 천문지(天文志)만 보더라도 일식이 열여덟 번 이상 있었지요. 문제는 선정을 베풀어 재위하는 삼십 년 동안······.”
“그건 문제가 덕을 닦은 덕분이지요. 과거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자, 진시황은 운석 근처에 살던 이들을 모두 주살하고 그 돌을 없앴다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반면 제(齊)나라 경공(景公)은 형혹성(熒惑星: 화성)이 심수(心宿: 전갈자리)에 머무르는 것을 걱정하였지만, 민정을 살피며 백성을 위하자 형혹성이 3도가량 옮겨갔고요.”
“올해 일식이 일어난 후 서북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폐하 또한 옥체가 더욱 강건해지셨소이다. 이것이 천벌이란 말이외까?”
황제 귀에 듣기 좋은 말이었다. 고능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게 뭐랬나. 폐하의 부덕 때문이 아니라니까!
“폐하, 천문에 이상한 조짐이 나타났고 민심이 흉흉하니 달래셔야 하옵니다. 상공에게 그 책임을 묻고, 사죄하는 글을 내리게 하시옵소서.”
고능준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 말에 조정 대신 몇 명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국사를 위해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 백성을 위무하는 것은 재상의 직책이외다.”
고능준이 진소를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진 상공, 거절하진 않으시겠지요?”
사죄하는 글을 쓴다? 진소가 어디 그럴 사람이던가! 사죄하는 글을 내리면 백성 앞에 그 죄를 인정하는 꼴인데, 아무 죄도 없이 그런 오명을 뒤집어쓸 사람은 없었다.
진소의 성정상 황제가 죄기소를 내리도록 고집할지언정 자신이 죄를 인정할 리는 결코 없었다.
폐하의 나랏일과 집안일이 전부 뜻대로 풀리고 있는 걸 보면 하늘이 폐하를 벌하려 드는 건 결코 아니야. 그런데도 진소가 폐하를 압박한다면 그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진소가 독한 마음을 먹고 죄를 인정할 수도 있지. 그럼 더 좋고. 언젠가는 이 일을 따져 물을 기회가 올 테니까. 부덕한 신하가 무슨 자격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 드는 거냐고.
고능준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천문 현상은 두려운 것이지만, 그 두려움은 대체로 다른 사람을 겁주는 데 쓰였다. 한나라 성제(成帝)가 재상 적방진(翟方進)을 죽였듯이.(편집자 주: 수화 2년, 형혹성이 심수에 접근하는 현상이 일어나자, 이로 인해 황제가 입을 재앙을 大臣이 대신 입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고, 성제는 적방진에게 그 동안의 가혹한 정치를 비난하는 글을 내리면서 자결을 명함. 적방진은 바로 목숨을 끊었고, 성제는 적방진의 자결을 숨기는 한편 여러 차례 조문하였다고 함.)
따지고 보면 매사가 기회지. 진 대인, 미안하게 됐소이다. 이번 기회는 이 사람이 가져가겠소.
“신은 그리할 수 없습니다!”
진소가 대전에서 돌연 목청을 높였다.
“신은 만천하에 사죄할 만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번 일은 폐하의 조정이 부덕했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고능준도 분노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급보입니다!”
이때 황성사 제거 만류방(萬留芳)이 목청 높여 소리치며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형남(荊南)의 무평에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조당이 일순간 소란스러워졌다. 황제 역시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류방, 뭐라 하였느냐?”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만류방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와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높이 들어 올렸다.
“폐하, 형남 무평의 유소동(劉小童)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이라······.
순간 고능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올여름 무평에 가뭄이 들어 백성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겨울에 이르러서는 이레 동안 폭설이 이어져 사상자가 부지기수인지라 이재민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상소문을 읽는 황제의 손이 쉴 새 없이 떨렸다. 표정은 놀라움에서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일을, 이런 일을 짐은 어찌하여 몰랐단 말이냐!”
황제가 상소문을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폐하, 방금 알아본 바로는 보름 전에 무평에서 구휼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사온데 상부에서 막았다 하옵니다.”
“누가 감히?”
“정사당의 고능준입니다.”
관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고능준의 얼굴에서 더 이상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무평이 폭설로 피해를 입은 일은 분명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경사가 연달아 생긴 데다 곧 세밑인지라 조금만 미루었다가 상소를 올릴 생각이었다. 게다가 고능준이 본 상소에서는 재해 상황이 그리 심각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았기에 반란은 더더욱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태가 그리 심각한 줄 알았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고능준이 그걸 막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상해, 이상해. 뭔가 문제가 있어. 나한테 올라온 문서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온전한 문서가 아니었던 거야!
재해 상황에 대해 소상히 적은 문서는 분명 진소의 손으로 들어갔겠지. 저들이 작심하고 벌인 일이렷다?
순간 어떻게 된 일인지 확 깨달은 고능준은 고개를 들어 진소를 바라보았다. 마침 진소도 고능준을 보고 있었다. 늘 점잖아 보이던 진 상공의 눈에 설핏 냉소가 스쳤다.
그랬군. 진소가 천문 현상을 들어 하늘이 벌을 내린다며 폐하께 죄기소를 내리시라 고집한 이유가 그래서였어. 저자가 원하는 게 어디 폐하의 죄기소였겠나. 분명 나와 똑같은 생각이었겠지. 이번 기회에 거슬리는 자를 쳐내려 했던 게야!
또 누가 있을까?
고능준의 시선이 어느새 문밖으로 물러나 있는 만류방의 몸에 고정됐다.
이런 급보를 만류방 같은 환관 놈이 가져오다니! 조정의 일을 다루는 상소문에 개입하여 손을 쓰는 건 내시에게 엄청난 금기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마어마한 유혹이 있지 않은 이상 만류방이 이런 짓을 할 리가!
고능준은 이를 악물었다.
진소 네 이놈!
겉으로는 군자인 체하며 이리 음험한 수완을 부리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더냐!
고능준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귓가로 들려오는 황제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하지만 지금은 패배를 인정할 때가 아니었다.
“폐하, 신이 본 상소에서는 재해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능준은 한숨을 내쉬고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한들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지.
“재해 상황이 심각한지 아닌지는 짐이 판단하는 것이오!”
황제가 일갈했다.
“신 등이 죄를 지었나이다.”
대신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신 등이 죄를 지었나이다. 신 등이 죄를 지었나이다. 이제야 죄를 인정하는군!
“일식에 이어 월식까지 있었는데 다들 죄를 인정하지 않더군. 짐에게 뒤집어씌우려 하며 짐이 부덕하여 정사를 잘못 돌봤다고 비난했어!”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재해가 일어났는데도 짐을 속이고 있으니 하늘이 보다 못해 그런 천문 현상으로 경고한 게 아니오! 아주 잘난 신하들이야!”
진소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 홀판을 높이 들었다.
“신은 성총을 가린 고능준의 죄를 청하옵니다. 고능준을 벌하여 하늘에 그 죄를 고하시옵소서. 또 폐하의 덕정에도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사면령을 내리시고 진언을 들으시옵소서.”
황제는 냉랭한 얼굴로 조당을 훑어보았다.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소. 일식과 월식에 이어 재해까지 일어나며 천벌이 계속되고 있는데 짐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짐이 하늘에 죄를 고하고 사면령을 내리겠소.”
황제의 말에 고능준은 속으로 비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까지 죄를 인정했으니 황제를 그러한 지경으로 내몬 신하의 죄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늘 기러기 사냥을 하던 이도 기러기 부리에 눈을 쪼이는 날이 있다더니.
그래, 좋다. 어디 두고 보자!
“신의 죄가 크옵니다.”
하늘에서 나타난 흉조로 인해 황제는 죄기소를 내렸고, 고능준은 죄를 인정하며 사직을 청했다.
폭설이 내린 무평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퍼져 나갔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백성이 두려워하는 것은 미지(未知)일 뿐, 하늘의 변화를 미리 알고 있는 지금은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