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22
교랑의경 522화
“노야께서 아씨한테 손님을 맞이하라고 하셨다고? 무슨 손님? 친척이야?”
빈근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관료 집안의 여식이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드물었고, 친척 아니면 가까운 벗들이나 만나는 정도였다. 하지만 경성에는 정 이노야의 친척이 없었다.
“노야의 벗이라고 하세요.”
어린 몸종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무슨 친구?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집까지 찾아오는 친구가 있어?”
이거 정 이노야가 사람을 너무 쉽게 사귀는 거 아니야? 그러잖아도 아씨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이런 식으로 아무나 와서 만나자고 하면 어떡하자는 건지.
정교랑이 말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반근 역시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따라 나왔다.
정 이부인도 정사랑과 정오랑, 정칠랑, 정오낭을 전부 데리고 와서, 자리에 앉은 두 사내에게 예를 표했다.
어린 몸종이 들어와 큰 아씨가 오셨다는 말을 전하자, 소란스럽던 대청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정 이노야마저도 말을 더듬었다.
항렬로 따지자면 정교랑은 집안에서 넷째였지만, 그렇게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교랑이 갑자기 정사랑이 되어 버리면, 방금 인사한 나머지 딸들의 이름은 또 어떻게 부른단 말인가.
정 이노야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저쪽의 두 사내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정 낭자.”
사내들이 웃으며 인사하자 정교랑이 몸을 숙이며 예를 표했다.
“관고원(官誥院)의 어르신들이다.”
정 이노야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분 어르신을 뵈옵니다.”
정교랑이 예를 올리자 두 사내는 얼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마친 정 이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물러갔다.
“저 어르신들이 답례로 또 초청을 할 거야. 그럼 교교, 네가 우리랑 같이 가자꾸나.”
정 이부인은 옆에서 옷소매를 잡아끄는 정칠랑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머지 애들은 아직 어리기도 하고, 경성은 처음이니 겁먹을까 봐 그래.”
“네.”
정교랑의 대답에 정 이부인이 활짝 웃었다.
누가 얘더러 괴팍한 성격이래. 괴팍하긴, 말도 이렇게 잘 듣는데.
같은 시각 다시 자리에 앉은 대청 안 손님들도 활짝 웃고 있었다.
“중지(重之), 자네는 참 복도 많군.”
그중 한 사내가 정 이노야의 자(字)를 친근하게 부르며 말했다.
“처자식이 전부 화목하여 보기 좋아.”
정 이노야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득의양양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아랫것들을 시켜 얼른 주안상을 준비하라고 했다.
“아, 주안상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중 한 사내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을 들며 말했다.
“중지의 집까지 온 김에 정통 과로신선 맛이나 한번 보자고.”
정 이노야가 멈칫했다.
과로신선이라······.
“아, 그래, 그렇지. 과로신선이 중지 자네 집안 거잖아.”
먼저 말했던 사내가 웃으며 거들었다. 하지만 과로신선 얘기가 나오자 정 이노야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신선거와 태평거 그리고 약포까지. 참, 이제는 이씨 가문의 폭죽까지 쳐야겠군. 거기서 폭죽만 보낸 게 아니잖아. 배당금을 약조하는 계약서를 시녀가 챙기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그 사업들이며 돈이며 집에서 먹고 입고 쓰는 것까지 전부 시녀가 관리하고 있으니, 아내가 무릎만 안 꿇었을 뿐이지 그 시녀한테 얼마나 비굴하게 살랑거리는지 몰라. 내 짐짓 못 본 척하고 있었다만,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냔 말이다!
여기가 누구 집인데! 일개 시녀 따위가 이 집을 좌지우지하다니! 체통은 어쩌려고!
친구들 앞인지라 정 이노야도 못마땅한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으며 찻잔을 들었다.
“지고(志高) 형, 농담하지 마시게. 그건 내 것이 아닐세.”
정 이노야의 목소리에는 시기심이 묻어났다. 두 사내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중지, 우리 앞에서 궁색한 척을 왜 하나?”
지고라고 불린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 돈 빌려달라고 안 하니까 걱정 말라고.”
“그래도 중지, 신선거 별실에서 한 끼 하고 싶을 땐 자네한테 도움 좀 청하겠네.”
다른 사내도 웃으며 말했지만, 정 이노야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정 이노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글쎄 나한텐 결정권이 없다니까. 전부 내 것이 아닐세.”
“중지, 거긴 자네 큰딸의 것이 아닌가?”
사내가 이상하다는 듯 웃음기를 거두며 물었다.
“그렇지.”
정 이노야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자네 큰딸 거면 그게 곧 자네 집안 거지.”
사내들이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집안 거면 그게 곧 자네 거고.”
정 이노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앞에 있는 사내들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중지, 우리랑 형, 아우 하는 사이니 이 말은 꼭 해야겠군.”
사내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방금 한 말, 다시는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게.”
“무슨 말을?”
정 이노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재산은 자네 것이 아니라는 말.”
다른 사내가 대답했다.
“아닌 것을 아니라 한······.”
정 이노야는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이 끊겼다.
“중지! 그 재산들은 자네 큰딸 명의로 되어 있잖나! 자네가 생전에 있는 한, 그런 말은 남 앞에서 절대 하면 안 돼. 그럼 자네 큰딸이 불효의 오명을 쓰게 된단 말일세!”
정 이노야가 멈칫하여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중지.”
다른 사내가 정 이노야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성인께서 말씀하셨잖나. 부모께서 생존해 계시면 사사로운 재물을 갖지 않는다(父母存, 不有私財 – ). 율법에도 정해져 있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재산을 따로 나누지 않지(父子無異財 – ).”
부모와 자식 간에는 재산을 따로 나누지 않는다!
정 이노야의 시선이 다른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 역시 손을 뻗어 정 이노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중지. 영애를 생각해서라도, 말을 신중히 하게.”
사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날이 밝자 거리에 사람이 많아졌다. 고씨 가문은 고능준이 외직 부임을 자청하고, 황제가 이를 윤허한 일로 침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씨 저택의 대문 앞은 여느 때처럼 북적였다. 앞쪽 대청이고 뒷마당이고 가릴 것 없이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물론 끊임없이 드나드는 사람들로 분주하기만 했다.
“무대도 꽉 찼으면 좋았으련만.”
누군가가 저쪽 정자 근처의 텅 빈 무대를 보며 말했다.
“지난해에 일식과 월식이 연달아 일어난 데다 눈 피해도 크고 민란까지 일어났잖나. 천자께서 나라와 백성이 불안에 떨 일을 근심하시며 유희를 금하셨네. 새해에 폭죽을 터트리고, 대보름 때 꽃등 놀이를 하도록 윤허하신 것만도 다행이지.”
옆에 있던 이가 말했다.
“그래도 집에서 자기들끼리 가무를 즐기는 건 괜찮지.”
누군가가 대청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기는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머나, 주 낭자까지 모셔 왔잖아?”
대청에 흩어져 앉아 있던 사내들도 고개를 돌렸다.
“모시기 어렵다지 않았어?”
“어려워도 누가 초청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대청 밖의 소란은 대청 안까지 전해졌다. 대청의 휘장 뒤에서 눈을 감고 앉아 어린 두 시녀에게 안마를 받고 있던 고능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인, 입춘이 지나고 출발하려 하십니까?”
옆에 있던 막료가 물었다.
“그럴 수야 있나.”
고능준은 눈을 감은 채로 말을 이었다.
“난 진심으로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벌을 받으려는 걸세. 보름이 지나면 바로 출발해야지.”
“정세에 따라 움직이시는 것도 좋지요. 평왕이 하루가 다르게 장성하시잖습니까. 벌써 열네 살이 되셨습니다. 지난해에 일식과 월식이 있었으니 올해는 개혁을 단행하겠지요. 겸사겸사 태자로 책봉되실 수 있을 겁니다.”
“태자로 책봉되면 내가 가장 먼저 공격 대상이 될 걸세.”
“네. 대인께선 외척 신분이니 조당에 오래 계실 수 없겠죠. 이번에 외직으로 부임하시면 폐하의 뜻에 순응하면서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일이 잠잠해지고 나서 돌아오신다면, 누가 감히 대인을 막겠습니까?”
거기까지 말한 막료가 웃음을 터트리자, 눈을 감고 있던 고능준도 따라 웃었다.
“그러니 나쁜 일을 만나도 초조해할 것 없네. 나쁜 일도 좋은 일이 될 수 있거든. 물론 좋은 일도 나쁜 일이 될 수 있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고능준은 돌연 손을 들어 웃음을 제지하고 눈을 뜬 다음 시녀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았다.
“바깥의 칠현금 소리가 듣기 좋군.”
양옆에 있던 두 사람이 휘장을 들어 올리자, 대청에 앉아 칠현금을 연주 중인 낭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덕승루의 주 낭자입니다.”
막료의 말에 고능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꽃 중의 꽃이라는 화괴의 명성에 걸맞은 낭자로구나. 얼굴은 모란처럼 아름답고 피부는 작약처럼 고우며, 갖춰 입은 옷은 화려하면서도 저속하지 않아.
“훌륭하구나, 훌륭해.”
고능준이 말했다. 칠현금 연주를 칭찬하는 것인지 사람을 칭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고능준은 어린 시녀에게 기댄 채 손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고, 여유로운 정월 분위기를 즐겼다.
한편 정 이부인은 정교랑의 손을 잡고 어느 집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마중을 나온 여종들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고원의 가지고(賈志高) 대인은 경성 분으로, 선조 중에 종친과 인척을 맺으신 분이 있습니다. 여러 사업을 하며 가세를 키우셨지요.”
여종 하나가 정 이부인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억해 두겠네. 반근이 또 뭐라고 하던가?”
“다른 말은 없었고, 부인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랍니다.”
편하신 대로? 경성 관리의 식솔들과 교제하는 일인데 어찌 강주와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정 이부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정교랑과 그 옆의 하녀를 바라보았다.
둘 다 반근인데, 왜 그 반근은 안 데려오고?
후당에는 벌써 사람이 꽤 여럿 와 있었다.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다 전부 화려한 차림이었다.
가 부인이 직접 나와 맞이했다.
“정 부인, 오셨어요?”
“가 부인.”
정 이부인도 얼른 답례했다. 답례를 마치기도 전에, 가 부인의 웃는 얼굴은 벌써 정교랑을 향해 있었다.
“정 낭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듣고 보니 어째 말이 좀 이상한데······.
가 부인은 다정한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아무렴 어떠랴.
정 이부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대청 안에 있던 이들이 전부 일어나 웃으며 인사했다. 물론 그 환대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모두 짐작하고도 남았다.
“주 부인, 저번에 주 부인 댁에서 접대할 땐 생질녀를 왜 안 불렀어요? 그때도 불렀으면 좋았을 것을.”
대청 안의 화기애애한 장면을 보며 문밖에 선 부인 하나가 옆에 있던 주 부인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주 부인의 시선은 정 이부인의 뒤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 낭자는 벌써 두봉을 벗고, 그 나이대에 맞는 고운 겨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차림새며 얼굴에서 푸르른 새봄 같은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다들 기쁜 마음으로 그 순간을 즐기고 있는 와중에, 주 부인은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정 낭자도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주 부인은 바늘에 눈을 찔리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
난 저 애한테 잘해 줬어. 진심으로 잘해 줬다고. 난 저 애를 해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
주 부인은 가슴을 쓸며 불경을 외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주 부인, 주 부인?”
옆에 있던 부인이 주 부인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손을 뻗어 붙잡았다.
“왜 그래요?”
퍼뜩 정신을 차린 주 부인이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옆에 있던 부인이 뭔지 알겠다는 듯 빙긋 웃었다.
“부러워서 그러죠? 부러워할 것 없어요. 저 여자는 후처일 뿐이잖아요. 주 부인은 엄연한 진짜 외숙모고요. 주 부인이 저쪽으로 가서 서면 저 여자가 어딜 감히 서 있겠어요?”
부럽다고? 저 둘이 오는 줄 알았으면 난 절대 안 왔을 거야.
주 부인은 다시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정 이부인이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난 부럽지 않아.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웃음도 안 나왔을 거야.”
주 부인이 중얼거렸다.
가엾은 정 이부인······. 지금 자기 뒤에 있는 게 돈을 벌어들이고 복을 나눠 주는 보살인 줄 알겠지? 그건 분명 야차야!
“여기서 실없는 소리나 할 때가 아니에요. 어서 생질녀한테 인사 좀 시켜 줘요. 운 좋으면 나도 무슨 깨우침을 얻을지 모르잖아요.”
옆에 있던 부인이 주 부인을 떠밀며 재촉했지만, 주 부인은 몸을 돌렸다.
“갑자기 몸이 좀 안 좋네요. 먼저 돌아가야겠어요.”
주 부인은 옆에 있던 부인이 붙잡기도 전에 쌩하니 가 버렸다. 그 후로 주 부인은 쭉 병을 핑계로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정월 내내 모든 연회 초청을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