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59
교랑의경 659화
“어서 내쫓게. 아주 멀리 내쫓아 버려.”
황궁 안. 태후는 고능준을 앞에 두고 울며 하소연했다.
“그 애는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거기까지 말한 태후가 돌연 말을 멈췄다.
“아니지, 미친 게 아니야.”
태후는 불안에 떨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애는 이제 위낭이 아니야. 그 여인이 불러들인 야차가 몸에 들러붙었어.”
고능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마마, 틀렸습니다. 이게 바로 진짜 위낭입니다. 예전의 그 아이는 폐하와 마마의 비위를 맞추고자 연극을 한 것뿐이었고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무거운 어조였다.
“그러니 이제 절대 경성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태후가 멈칫했다.
“왜 또 보내지 말라는 게야? 빨리 경성에서 내보내라며 재촉할 땐 언제고? 그리 말 잘 듣고 온순할 땐 쫓아 보내려 하더니, 이제 저 꼴로 변하니까 남겨 두라는 게야?”
“전에는 그나마 연극이라도 했잖습니까. 기꺼이 연극을 한다는 건 본분을 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연극도 안 하겠답니다. 다시 말해 본분을 내팽개치겠단 거죠. 본분조차 내팽개친 사람입니다. 마마, 그런 자를 풀어 주어 경성에서 멀리 떠나게 하는 건, 호랑이를 키우는 꼴입니다.”
“그, 그 애가 뭘 할 수 있는데? 모반이라도 꾀한단 말인가?”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반’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태후는 저도 모르게 탁자를 내리치기도 했다.
“어서 죽여 버리게. 죽여 버려.”
고능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 버리려고 경성에 남겨 두겠단 겁니다. 경성에서 내보내면 죽일 기회는 더 줄어듭니다. 그런 일을 벌여 조당을 시끄럽게 하고 유림이 원성을 쏟아내게 했으니, 경성에 남겨 두는 건 우리에 가둬 두는 꼴과 다름없지요. 죄를 묻기도 더 쉬워지고요.”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더구나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진안 군왕 그 대역무도한 놈을 처리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일보다 시급한 게 있다고?
“애가를 해치려 든 아이야. 황후의 양자로 들어가 태자가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태후가 초조한 듯 탁자를 치자 고능준이 웃음을 지었다.
“양자로 들어가 태자가 되기엔, 아직 그만한 수완이 없습니다. 우선 스스로 명성을 땅에 떨어뜨렸으니 양자 입적을 하더라도 진안 군왕에게로 차례가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태자가 있는 한, 그 누구를 양자로 들이더라도 명분이 서지 않지요.
그러니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태자의 국혼입니다. 서둘러 황태손을 봐야 폐하의 혈통이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딴마음을 품는 이들도 그만 단념할 테고요.”
그렇지. 태자의 국혼을 깜빡했군.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조한 투로 물었다.
“그럼 태자비 자리에 적당한 인선은? 우리 집안에 적당한 여식이 있는가?”
고능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마, 우리 집안은 그 어느 가문보다 적절치 않습니다. 하오나 염려 마십시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습니다.”
더 적합한 사람?
태후가 멈칫하며 물었다.
“그게 누군데?”
고능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의사를 물어보고 있는데,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소식이 오거든 마마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태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두르시게. 하루라도 빨리 정해져야 마음이 놓이지. 요즘은 이게 사는 건지 뭔지도 모르겠어.”
태후는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마, 염려 놓으십시오. 복과 화는 붙어 있다지 않습니까. 곧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고능준은 웃으며 태후를 위로한 후, 작별을 고하고 물러갔다.
같은 시각, 측전.
오늘은 진십팔랑이 닷새에 한 번씩 입궐해 공주들에게 글씨를 가르치는 날이었다.
“진 낭자, 이렇게 쓰는 거 맞아요?”
나이가 가장 어린 사공주가 앳된 목소리로 묻자, 진십팔랑이 다가가 몸을 낮추고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정말 잘 쓰셨어요, 공주님.”
진십팔랑이 웃으며 칭찬하자, 예닐곱 살쯤 된 공주는 기쁜 얼굴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붓을 들어 글씨를 더욱 열심히 따라 썼다. 진십팔랑은 한쪽 옆에 꿇어앉아 사공주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한편 나이가 좀 더 많은 이공주는 글씨 쓰기에 전념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진단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십구랑, 글씨를 정말 잘 쓰네요.”
진단랑이 미소를 지으며 이공주를 향해 예를 표했다.
“진 낭자한테 오래 배웠나 보네.”
진단랑과 동갑인 삼공주가 질 수 없다는 듯 끼어들자, 진단랑은 고개를 가로젓고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언니한테 배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요. 정 언니한테 더 오래 배웠죠.”
정 언니?
시선을 주고받은 두 공주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글씨를 잘 쓰는 언니가 또 있어요?”
이공주가 물었다.
“아니요, 정 낭자요. 아, 아니지, 진안 군왕비 말이에요.”
진단랑은 절로 싱글벙글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안 군왕비가 대문 앞에서 자리를 깔고 글씨를 쓰자 이를 견학하려는 이들이 몰려든 건 아시죠?”
두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에 관한 일은 황궁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음으로 양으로 끝도 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럼, 정 낭자를 스승으로 모신 거예요?”
“그때 그 광경을 직접 봤어요? 어떤 광경이었는지 빨리 얘기해 봐요.”
신분의 차가 있고 처음 만난 사이라 다소 서먹하긴 했지만, 열한두 살 남짓한 아이들은 금세 어울려 떠들기 마련이었다. 특히 공동의 화제가 있을 땐 더더욱 그랬다.
누군가가 무거운 헛기침을 하자, 서로 머리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모여 있던 셋은 얼른 떨어져 단정히 앉았다.
진십팔랑이 엄숙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배울 땐 온 심혈을 기울여야 해요. 단랑, 넌 공주님들과 함께 글씨 쓰라고 데려온 거야. 함께 어울려 떠들라고 데려온 게 아니라.”
진단랑은 알았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면서도 공주들과 눈웃음을 교환하는 걸 잊지 않았다. 두 공주도 고개를 숙이며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문밖에서 궁녀 하나가 웃으며 들어왔다.
“진 낭자, 태후마마께서 부르세요.”
진십팔랑은 얼른 알았다고 대답하고, 공주들에게도 예를 표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세 공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반절로 답례했다.
“단랑,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진십팔랑의 당부에 진단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궁녀들과 함께 나가는 진십팔랑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십구랑, 우리랑 같이 가서 놀아요.”
이공주가 말했다.
“맞아요. 정 낭자랑 같이 글씨 공부한 얘기 좀 들려줘요.”
삼공주도 맞장구를 치며 거들었지만 진단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요.”
“진 낭자는 정말 엄격하네요.”
삼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진단랑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추고 덧붙였다.
“언니가 혼인한 후로 점점 더 엄격해져요.”
뒤에서 남 이야기를 하는 데다 그 상대가 자신의 언니다 보니, 진단랑은 민망한 듯 혀를 날름거렸다. 하지만 세 공주는 그 말 덕분에 진단랑과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우리랑 같이 가서 우리 궁에서 놀아요. 진 낭자한테는 우리랑 같이 글씨 연습하러 갔었다고 하면 되잖아요. 그럼 나무라지 않을 거예요.”
이공주가 말했다.
“맞아요. 지금쯤이면 새로운 다과를 가져왔을 거예요. 싱싱한 과일도 들여오고요. 십구랑, 같이 가서 먹어요.”
대공주도 거들었다.
또래가 보이는 선의에 진단랑도 마음이 흔들렸지만, 어머니와 언니의 당부가 생각났다. 진단랑은 결국 고개를 가로저으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앞으로는 언니와 자주 올 거예요. 다음에 갈게요.”
이공주와 삼공주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켰다.
“그럼 그렇게 해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공주가 진단랑 옆으로 오더니 손을 뻗어 진단랑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을 찡긋거렸다.
“십구랑.”
앳된 목소리의 사공주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태후마마한테는 가지 마요. 거긴 태자가 있거든요. 엄청 무서······.”
사공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이공주와 삼공주가 동시에 사공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바람에 사공주는 말을 끝맺지 못하게 됐다.
“그럼 십구랑은 여기서 기다려요. 우린 이만 갈게요.”
이공주는 그 말만 남긴 채 진단랑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사공주를 잡아끌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숙녕, 손 상궁이 말한 거 잊었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니까.”
“숙혜 언니가 왜 현비마마께 보내져 자란 건지 잊은 거야?”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태후의 침궁을 떠나자, 측전은 고요를 되찾았다.
“낭자, 앉아서 차 드세요.”
두 궁녀가 미소를 지으며 차와 간식을 올렸다.
“고마워요, 언니.”
진단랑이 예를 표하며 말했다. 두 궁녀는 더 밝게 웃으며 곁에 꿇어앉아 진단랑의 말벗이 되어 주었다.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 뒤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에 쾅 하고 부딪히다시피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가 가죽으로 만든 공을 손에 든 채 와아 하는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측전에 있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등장에 비명을 질렀고, 진단랑 역시 얼른 두 궁녀의 뒤로 숨었다.
“겁내지 마세요, 겁내지 마세요.”
궁녀들이 진단랑을 안아 주며 말했다. 그중 한 궁녀가 기둥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사람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서 잡아라, 어서!”
“전하는 왜 나온 거야?”
전하?
‘전하’라는 말을 들은 진단랑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궁녀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제 황궁에 ‘전하’는 한 분뿐인데.
그 전하라는 분은 신체 건장하고 힘센 내시 둘에게 허리가 붙잡혀 있었다. 달리기가 워낙 빠르다 보니 우악스럽게 붙잡은 통에 태자는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지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에 진단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몸을 떨었다. 측전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울면 안 돼요. 울면 안 됩니다.”
바보는 울음소리 또한 정상인과 달라 괴이하게 들렸다. 진단랑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태자를 내시 몇 명이 마구 잡아끌며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태자는 일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허공에 대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측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뭣들 하는 거냐. 어서 데려가라니까. 못 나오게 문단속 단단히 하라고 했잖아.”
진단랑 옆에 있던 궁녀가 진단랑을 다독인 후, 짜증을 내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후마마는 조용히 쉬셔야 한다니까.”
“전하가 비명 못 지르게 해.”
“그 약 안 먹였어? 왜 또 멋대로 뛰어다니는 거야?”
두 궁녀가 툴툴거렸다. 순간 태자의 울음소리가 뚝 그치더니 웁웁 하는 소리만 났다. 진단랑이 고개를 돌리자, 내시가 태자의 입에 헝겊을 마구 욱여넣은 모습이 보였다. 궁녀들의 재촉 때문인지 발버둥 치는 태자 때문에 인내심이 극에 달한 탓인지, 내시들은 거칠고 우악스러운 동작으로 태자를 뒤로 끌어냈다.
뚱뚱한 태자는 웁웁 하는 소리를 내고 발버둥 치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화가 난 건지 답답한 건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더욱 무서워 보였다.
함부로 끌려나가다가 손까지 밟히고······.
진단랑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바보인 사람은 통증도 못 느끼나?
두 궁녀도 앞으로 다가가 함께 거들었다.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데 누군가가 공을 건네주었다.
“전, 전하, 이거, 말씀하시는 거죠?”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언제 가까이 다가온 건지 겁먹은 표정의 진단랑이 보였다.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 내시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태자가 진단랑에게 확 달려들었다. 진단랑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고개를 돌리면서도 여전히 앞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손이 확 잡아 당겨지나 싶더니, 누군가가 공을 낚아챘다. 예상한 바와는 달리 때리는 등의 행동은 전혀 없었다. 상대는 하하 웃고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진단랑은 천천히 일어나 허리를 곧게 펴고, 저쪽으로 달려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공처럼 둥글둥글하면서도 뒤룩뒤룩한 사람이 전각에서 기쁘게 뛰어놀고 있었다. 손에 든 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가 줍고, 다시 떨어뜨렸다가 또 주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