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ary Hero is an Academy Honors Student RAW novel - Chapter (595)
595.
턱을 괸 레오가 마차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항상 차디찬 대륙 북부와 대부분이 사막 지대인 무더운 대륙 남부와 달리 대륙 서부는 비교적 뚜렷하게 계절이 나뉘는 편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족 여행을 가는 것도 오랜만이네.”
레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이나가 창밖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괜찮아요?”
“뭐가?”
“제르딩거에는 별로 오고 싶어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랬었지.”
레이나가 창문에 머리를 기대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풍경이 붉은 눈동자에 담긴다.
저 멀리 제르딩거의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영웅 명가 제르딩거.
한때 그 이름을 등에 짊어진 시절도 있었다.
‘찬란한 시절이었지.’
세계가 주목하는 영웅 후보생이던 때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제르딩거의 여기사.
늘 학년 탑을 놓치지 않았으며 최고 우등생으로 루메른을 졸업했다.
졸업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전공을 세우며 빠른 시일 내에 히어로 레코드에 이름을 올릴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레이나는 영웅이 되지 못했다.
영웅 던전 공략 중 죽을 위기에 처한 친구를 대신해 몸을 던져 스스로를 희생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귀환할 수 있었지만 레이나는 오러를 잃고 말았고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은퇴 이후에도 가문에 남을 수 있었다.
비록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제르딩거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레이나는 스스로 원하는 삶을 위해 가문을 뛰쳐나갔다.
“딱히 옛날 일 때문에 미련이 남아서 제르딩거에 오기 싫었던 건 아니야.”
레이나가 빙긋 웃었다.
“나는 지금이 옛날보다 훨씬 즐거운걸?”
친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스스로 가문의 이름을 버린 것 역시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했고.”
레이나는 옆에 앉아 있는 데이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팔짱을 꼈다.
“이렇게 멋진 아들도 낳았으니까.”
“금슬이 아직도 좋으시네요.”
“그럼. 아빠랑 엄마는 평생 이렇게 오순도순 살 거야. 그렇지? 데이드?”
“물론이지. 레이나.”
아직도 깨소금이 쏟아지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레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 두 사람은 평생 저럴 거야.’
레오가 고개를 저을 때였다.
“본가에 오기 싫었던 건 장로회 때문이야.”
레이나가 혀를 찼다.
“아직도 옛날 일로 짜증 나는 말을 해댈 게 뻔하거든. 어휴. 지긋지긋해.”
‘그러고 보니 장로회는 지금의 로드렌 황제와 어머니를 정략결혼 시키려고 했었지?’
장로회는 제르딩거 가문의 번영에만 신경 쓰는 집단이기에 레이나를 정략결혼의 도구로 이용하고 싶어 했다.
비록 오러를 잃었다고는 해도 제르딩거의 직계이자 명성 높았던 기사였던 만큼 레이나가 원했다면 충분히 황비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한테는 황제보다 데이드가 더 멋진 남편인데 말이야!”
“쑥스러운데.”
데이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든 지금은 레오, 네가 높은 명성을 가지게 되었잖아?”
레이나가 빙긋 웃었다.
“이제는 그딴 헛소리를 안 하겠다 싶어서 냉큼 왔지. 아니, 오히려 그때 황제랑 결혼했으면 어쩔 뻔했냐고 장로회에게 한마디 해줄 수 있겠다.”
전대미문의 영웅의 탄생.
신이 인정한 세계를 구한 대영웅의 후계자.
물론 후계자가 아니라 장본인이었지만 레이나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후후후. 늙은이들 표정이 썩어 들어갈 걸 생각하니 정말 즐거운걸? 오호호호호호!”
마녀처럼 웃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레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부부라.’
이번 생의 부모라는 걸 떠나서.
레오는 데이드와 레이나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전생에 고아였기에 부모님의 따듯함을 모르던 레오에게 부모님의 사랑을 알려주었고 또 평범한 일상의 즐거움을 알려준 것이 데이드와 레이나였다.
‘이 두 사람의 삶은…… 우리가 해낸 일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졌었는지 내게 가르쳐줬으니까.’
레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 아들이 또 저런 영감님 같은 표정을 짓네.’
아들이 가끔 깊이를 알기 힘든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놀려도 재미가 없단 말이지.’
화염의 마녀라는 이명을 가진 건 단순히 전장에서 화염을 두르고 적을 불태웠기 때문이 아니다.
가끔 주변인들에게 심술을 부리기 때문에 얻은 이명이었다.
‘우리 아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아서 귀여운 맛이 없다니까.’
툴툴거리던 레이나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레오.”
“예.”
“여자친구는 안 생겼니?”
한참 사춘기 소년인 만큼 이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다.
게다가 루메른에는 아름다운 소녀들이 많다.
‘우리 아들도 좋아하는 여자애 한 명 정도는 있겠지?’
“여자친구야 많죠.”
“뭐?”
레오의 대답에 레이나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너 혹시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니? 엄마는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여자인 친구가 많다고요.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이게 아주 엄마를 가지고 노네.”
레이나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예쁜 친구들이 많던데 연애는 안 하니? 공부도 좋고 수련도 좋지만 학창시절에는 연애지. 르왈린 가문의 첼시도 있고 여름 방학 때 보니 첸 시아라는 아이와 클로에라는 아이도 예뻤잖니?”
레이나가 레오의 친구들에 대해 떠올렸다.
“엘런과 베르가의 딸 이름이 루니아와 아르라고 했던가? 게다가 에르사르 가문의 에이란이란 아이도 있고.”
한 손, 한 손.
떠오른 여학생들을 꼽아보던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면 최고의 며느리 감이라고 이 엄마는 생각해. 엄마는 손주를 빨리 보고 싶으니까 속도위반을 해도 안 혼낼게.”
“저보고 애들을 건드리라고요?”
“너도 애거든?”
레이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레이나를 보며 레오가 미간을 좁혔다.
“어휴. 어떻게 눈 하나 까딱 안 하니? 귀염성 없게.”
“어머니, 대체 몇 살이십니까?”
“마음만은 영원한 17세.”
“추태인 거 아시죠?”
“엄마를 함부로 말하는 게 요 얄미운 입이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레오의 한쪽 볼을 꼬집는 레이나의 이마에는 힘줄이 잔뜩 솟아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사이.
플로브 가문의 사람들을 태운 마차는 제르딩거 성의 정문에 도착해 있었다.
***
마차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가운데를 길처럼 비워둔 채 좌우로 도열한 제르딩거의 기사들이었다.
그걸 본 레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비록 가문의 이름을 버렸다지만 한때 직계였던 레이나의 방문.
그런 만큼 예우를 위해 많은 이들이 마중을 나오는 건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제르딩거 혈통은 한 명도 안 보이는데.’
검은 머리에 붉은색 눈동자.
제르딩거의 혈통으로 보이는 이는 한 명도 없다.
게다가 도열 해 있는 기사들은 한 명, 한 명이 날 선 기세를 내뿜고 있다.
누가 봐도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레오 혼자 왔다고 하면 딱히 문제 될 건 없다.
하지만 지금 레오와 함께 온 데이드와 레이나는 일반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레이나는 기사로서 꾸준히 단련을 해왔기에 오러를 잃었어도 날 선 기세를 받아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데이드는 아니다.
위해를 끼치진 않겠지만 안색이 질릴 것이다.
‘어머니가 가문에서 쫓겨난 게 아버지와 결혼해서니까.’
양팔 벌리고 환영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레오도 마찬가지였다.
차기 가주인 리스와 셀리아가 레오를 각별하게 대하고 레오의 명성이 높았기에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애초에 제르딩거 내에서도 갑작스럽게 직계의 칭호를 획득한 날 아니꼽게 보는 자들이 있었지.’
레이나는 장로회에 한마디 해주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영웅이 되어 대단한 위업을 이루었다고 해도 아직 어린 아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을 걱정해 함께 온 것이리라.
어쨌거나 제르딩거는 역사가 긴 영웅 명가다.
그만큼 가문 내에서 뒤섞인 이해관계도 복잡했다.
이걸 본다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라고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것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데이드와 레이나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탁-
레오가 마차에서 내렸다.
기사들의 시선이 레오에게 쏠렸다.
저벅-!
“크흡?!”
“컥?”
레오가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어마어마한 기세가 기사들을 덮쳤다.
‘유치한 기싸움은 환영이야.’
날 선 기세가 순식간에 밀려났다.
기사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중에는 휘청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레오의 뒤를 이어 마차에서 내린 데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드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레이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마중 나온 기사들이…… 장로회 기사들이네.”
기사들의 어깨에 수놓아진 문양을 보며 레이나가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 레오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어머니. 가시죠.”
레오의 말에 데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털썩-! 털썩-!
레오가 지나갈 때마다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자들이 속출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레오와 기사들 간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저벅-
이윽고 플로브 가문의 세 사람이 저택 앞에 섰다.
잠시 후.
끼익-
거대한 저택의 문이 열리며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 장로로 보이는 이들을 대동한 채 걸어 나왔다.
노인의 얼굴을 확인한 레이나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그 말을 들은 데이드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레오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제르딩거의 선대 가주.
레가스 제르딩거가 입을 열었다.
“장로회의 환영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군.”
레가스의 시선이 데이드와 레이나에게 잠시 향하더니 최종적으로는 레오에게 향했다.
“날뛴 걸 보니 말이야. 레오 제르딩거.”
그 말에 레이나의 눈이 꿈틀거렸고 데이드는 미간을 좁혔다.
레오의 성을 제르딩거라 부른 것.
그건 레오의 친가를 부정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직계로 인정을 받았지만 레오의 성씨까지 변한 건 아니었다.
레가스의 말에 레오가 빙긋 웃었다.
“환영 인사가 개판이던데요.”
“감히 가문의 어른들에게 무슨 망발인가!”
레가스의 뒤에 있던 장로 중 한 사람이 발끈했다.
그런 그를 깔끔하게 무시한 레오가 말했다.
“그리고 날뛴 적도 없어요. 그냥 장로회 기사들이 빈약할 뿐이죠.”
“이놈이!”
“결정적으로.”
레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 이름은 레오 플로브인데요? 레가스 제르딩거 선대 가주님.”
불꽃의 심장이라는 이명을 가진 늙은 영웅.
레가스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레오의 붉은 눈을 빤히 바라보던 레가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과연.”
레가스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네가 괴물을 낳기는 했나 보구나. 레이나.”
“손자에게 괴물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버지. 그리고 처음 보는 손자를 시험하는 할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레이나가 툴툴거리자 레가스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보고 싶었을 뿐이다. 말 많은 레오 플로브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 과연 대단하구나!”
즐겁다는 듯 웃은 레가스가 씩- 웃었다.
“제르딩거에 온 걸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