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92
하지만 그 순간에도 두 눈에서는 살기가 번득였다. 이런 중상을 입은 것은 오랜만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그의 살의를 자극했다. 이에 뒤로 밀려나면서도 한제는 붉은 검을 소환했다.
이 검은 강력하지만 실체를 가진 것만 베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방금 전 한제를 공격한 허상의 화살을 막는 데는 별다를 도움이 되지 않았다. 허나 상대가 수련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터였다.
붉은 검은 이제 거의 다 맞물려 2백 척 정도만 남은 진의 틈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한제는 허공을 꽉 움켜쥐면서 살기를 억눌렀다.
‘뭔가 이상해!’
한편, 노인이 된 백의의 청년은 표정이 어두웠다. 연이어 두 발의 화살을 쏘고도 상대를 죽이지 못한 데다가 생기마저 거의 바닥난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봉계의 진 너머로 한제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멀어져갔다.
‘저자를 죽일 수도 꾀어낼 수도 없다니⋯⋯.’
하지만 그가 막 자리를 뜨려던 그때, 한 줄기 요기가 운해성역에서 튀어나와 엄청난 속도로 진의 틈으로 달려들었다. 청년이 쏜 화살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였다.
뒤이어 귀종의 고요가 허상으로 봉계의 진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아홉 개의 반점이 회전하는, 탐욕 어린 눈으로 노인의 손에 들린 활을 응시했다. 다만 그는 본체가 아닌 분신일 뿐이라 왼쪽 눈동자의 반점도 허상에 불과했다.
이내 고요는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눈 깜짝할 사이 백의의 그 수련자에게 달려들었다.
사실 그는 백의의 청년이 나타났을 때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한데 그 순간, 백의의 수련자가 기이한 표정으로 몸을 홱 틀었다.
“잔챙이만 걸렸군!”
그 목소리가 떨어진 순간 거대한 손바닥의 허상이 달려들었다.
“헛!”
9성급 고요의 표정이 급변했고 두 눈에 담긴 탐욕의 빛도 사라졌다. 그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났지만 봉계의 진으로 돌아가기 전에 결국 거대한 손바닥에 의해 콱 틀어쥐어졌다.
“크아악!”
거대한 손바닥 안에서 고요는 대량의 요기로 무너져 내렸고 이 요기를 흡수한 손바닥은 흩어져 사라졌다.
“장존의 수제자 풍예, 스승님의 명을 받들어 계내의 도우들에게 이 활을 선사하겠다! 활은 여기 있다! 누구든 자신 있다면 가져가 보아라!”
말을 마친 사내는 봉계의 진 너머 계내 수련자들에게 포권을 하더니 들고 있던 활을 휙 내던졌다. 이에 활은 둥둥 떠 봉계의 진에 난 틈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이 활에서 발산된 부드러운 빛은 보는 사람을 광분하게 하는 흡입력을 가진 듯했다.
“단, 조건이 있다. 이 활을 가질 기회는 세 번만 주어진다. 대신 한 번의 기회를 쓸 때마다 우리 계외 수련자의 3할을 돌려보내야 한다. 그게 스승님이 제시하신 조건이다. 어떤가? 도전해보겠는가?”
한제의 두 눈이 살기로 번득였다.
‘장존은 대체 무엇을 위해 저런 제안을 한 걸까? 저 활을 미끼로 누군가를 꾀어내려는 것인가?’
계내는 정적에 잠겼다. 세 번째 단계 수련자들은 한쪽에서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오직 적의의 선비만이 표정이 어두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활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는 풍예의 말을 들은 후에 분노했다. 자신이 다른 이의 손아귀에서 움직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차게 코웃음을 친 선비는 자몽을 힐긋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곧장 봉계의 진의 틈으로 향했다. 그녀를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운자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눈을 번득였을 뿐이다.
적의의 선비는 이내 태고 성신으로 돌아갔고 얼음 동자를 비롯한 계외의 나머지 세 번째 단계 수련자들이 뒤를 따랐다.
“계내에는 이 활을 가질 엄두를 낼 자가 아무도 없단 말인가?”
풍예가 피식 웃으며 계내의 수련자들을 바라보았다.
봉계의 진에 남은 틈은 이제 70척밖에 되지 않았고 완전히 맞물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한데 그때, 태고 성신에서 방금 전의 그 거대한 손바닥이 다시 한번 나타나 봉계의 진에 난 틈을 잡고 쭉 찢었다. 순간 온 우주를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그 틈은 수천 척까지 벌어졌다.
그 손바닥이 발산한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계내를 뒤덮었다. 그 위압감에 홍삼자와 한제 등도 창백한 얼굴로 밀려났다.
“흥! 어디서 수작질이냐!”
홍삼자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몸을 날림과 동시에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붉은 빛이 봉계의 진을 찢은 손바닥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신중한 표정의 남운자가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리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자 그의 뒤로 구름처럼 나타난 허상이 한데 응집해 수많은 조각상으로 변하더니 일렬로 서서 거대한 진을 이룬 채 홍삼자가 쏘아낸 붉은 빛을 바짝 따랐다.
소하의 자몽과 중년 부인, 노부자와 태아라도 동시에 힘을 발휘했고 그로 인해 일어난 밝은 빛 역시 홍삼자와 남운자가 발휘한 법술에 합쳐져 폭풍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
한제의 명령에 따라 영동상인과 주진 역시 신통술을 발휘했다. 말하자면 지금 거대한 손바닥 모양의 허상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것은 계내의 모든 세 번째 단계 수련자들이 발휘할 수 있는 최강의 신통술을 한데 아우른 폭풍이었다.
한제는 고신의 반점을 회전시키면서 오른손을 휘둘러 도고의 머리를 허상으로 소환하더니 거대한 주먹으로 변형시켰다.
불바다와 천둥번개로 휩싸인 이 주먹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폭풍을 뒤따랐다. 현재 계내의 수련자들이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을 품은 이 폭풍이 순식간에 거대한 손바닥으로 돌진했다.
그때였다. 계내에서 한 줄기 요기가 피어오르더니 9성급 고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비열하게 웃더니 입을 쩍 벌려 고요의 기운을 한 움큼 뿜어냈다. 이 기운은 밖으로 뿜어지자마자 한 마리 거대한 용이 되어 달려들었다. 고요의 왼쪽 눈에서는 아홉 개의 반점도 일제히 튀어나와 그 용에 녹아들었고 용은 폭풍과 한제의 주먹을 따라 봉계의 진 너머 손바닥을 향해 돌진했다.
꽈르릉!
홍삼자를 비롯한 이들의 신통술로 이루어진 폭풍이 손바닥 허상에 꽂히면서 온 우주를 뒤흔들 법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거대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윽!”
홍삼자 등은 피를 토하며 재빨리 물러났다. 거대한 손바닥 허상도 무사하지는 못해 다섯 손가락 중 네 개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그때, 도고의 주먹이 하나 남은 손가락에 떨어지면서 다시 한번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가 노인
“쿨럭!”
격렬하게 몸을 떨며 피를 토해낸 한제는 피범벅이 된 주먹에서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뼈가 조각조각 난 듯했고 그는 다시 뒤로 밀려났다.
손바닥의 허상에 남은 마지막 손가락이 무너져 내릴 조짐을 보이면서도 용케 버텨냈다. 하지만 그때 고요가 쏘아 보낸 용이 달려들자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사방으로 퍼져 나간 충격이 봉계의 진 안으로도 밀려들었다. 그러자 진은 눈부신 빛을 발산했고 그 위의 틈은 더욱 크게 벌어졌다.
허나 그 충격에 가장 가까이 있던 활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한편 다섯 개의 손가락 모두를 잃은 손바닥은 뒤로 밀려나면서도 손가락을 재생시키려는 듯 다섯 갈래의 빛을 발산했다.
한데 그때, 한제의 등 뒤쪽 허공에서 왜곡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심신을 뒤흔들 법한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한없이 멀리서 울려 퍼지는 듯하던 고함은 순식간에 커졌다. 홍삼자와 한제 등은 흠칫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는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마치 태양처럼 타오르는 아홉 개의 수련성이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저 멀리서부터 일자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드는 그 수련성들 주위로 수많은 파문이 일어났다.
눈 깜짝할 사이 다가온 그 수련성들은 봉계의 진 너머에 떠 있는 활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때 다섯 개의 손가락을 다시 만들어낸 거대한 손바닥이 활의 앞쪽을 막아서려다가 타오르고 있는 첫 번째 수련성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쾅!
우렁찬 소리와 함께 첫 번째 수련성은 그대로 터져나가며 강력한 충격이 되어 손바닥을 뒤로 밀어냈다. 그리고 손바닥이 수만 척 정도 밀려났을 때 두 번째 수련성이 달려들었다. 이에 손바닥은 한 번 더 떠밀렸다. 이번에는 세 번째 수련성이 곧장 달려들었고 이에 손바닥은 바르르 떨리면서 터져버렸다.
손바닥의 허상이 터져나간 순간, 그 안에서 검은 도포를 입은 누군가의 허상이 걸어 나왔다. 한제가 오래된 무덤 밖에서 보았던 장존이었다.
장존의 허상은 말없이 오른손을 들었다. 비쩍 마른 그의 손에서는 순간 밝은 빛이 번득였다. 마치 그의 손이 꺼지지 않는 빛이 된 것만 같았다.
그는 들어 올린 손으로 달려드는 네 번째 수련성을 붙들었다. 그러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네 번째 수련성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그 반동으로 장존의 허상 역시 뒤로 몇 걸음 밀려났고 그의 손에서 발산된 빛도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동시에 네 개의 수련성이 달려들더니 장존의 허상 근처에서 폭발했다.
콰쾅!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이 계외 태고 성신에 울려 퍼졌다.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태고 성신 깊은 곳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기운에 파괴된 우주에서 튀어나온 장존의 허상은 원신의 기운을 한 움큼 토해냈고 금방이라도 찢어져 버릴 것처럼 몸을 바르르 떨었다.
“죽지 않았구나!”
충격의 기색이 어린 거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죽지 않았다!”
계내 어딘가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와 동시에 아홉 번째 수련성이 활활 타오르며 장존의 허상을 향해 돌진했다.
“크으으…”
장존의 허상은 낮게 포효하며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밝은 보름달이 비춰진 거대한 우물을 소환했다. 그 순간, 장존의 허상은 뒤로 물러나면서 비쩍 마른 왼손으로 우물을 움켜쥐었다. 우물에 비춘 달을 건져 올리려는 것인지 물을 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움켜쥔 물 안에 달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물과 달을 자신에게 달려들던 아홉 번째 수련성을 향해 한꺼번에 내던졌다.
콰쾅!
수련성과 우물물이 충돌한 순간, 우렁찬 소리와 함께 물은 급속도로 증발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홉 번째 수련성에는 보름달 모양의 낙인이 새겨졌고 이 낙인은 수련성을 뚫고 들어가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수련성은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계외에서 살육을 벌였던 당시 너희 태고 5존은 감히 내게 대적하지 못하고 향불을 빼앗기기까지 했지. 한데 그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너는 여전히 약하구나!”
보름달 낙인이 허공을 가르며 질주하는 동안 어떤 허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소 흐릿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 허상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가 검지를 앞으로 뻗어 전(戰) 자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 글자가 완성된 순간 보름달 낙인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세상 사람들은 당시 그가 고함의 힘으로 널 내쫓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 고함에 담긴 경고는 알지 못하더군. 네가 계내에 그림자라도 비추면 죽게 되리라는 그 경고를 말이다! 쥐새끼처럼 담도 작은 녀석이 감히 장존을 칭해? 더구나 감히 이 활을 미끼로 삼다니! 이 활은 이가 외에는 그 누구도 주인이 될 수 없다. 내가 그를 대신해 거두겠다!”
흐릿한 인영은 덤덤한 목소리로 외치며 진 밖의 활에 다가갔다.
“전가 노인! 어찌 네가 아직도 죽지 않았단 말이냐!”
검은 도포의 허상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머리를 뒤덮고 있던 도포 자락이 갈가리 찢겨나가면서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주름이 쪼글쪼글한 노인이었다. 주름 하나하나가 마치 깊은 굴곡이나 나이테처럼 오랜 세월을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그의 얼굴에 수염이라고는 한 올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수염이 자라난 적이 없었던 것만 같았다.
그리고 미간에는 낙인이 하나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 전 누군가가 억지로 새긴 흉터 같은 낙인은 형상이 흐릿해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장존이라 칭한 이자는 사실 그 거대한 손바닥을 관리하는 사환(使喚)이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전가 노인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 눈에서는 원수를 마주한 것 같은 짙은 한이 담겼지만 이내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자신의 수제자를 잡아채 도망쳤다.
한편 흐릿한 인영은 허공의 활로 다가가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순간 놀란 듯 흠칫하며 작은 탄성을 내뱉더니 더욱 빠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팽팽하게 묶여 있던 활의 시위 끝자락에서 일곱 색깔의 빛이 번득였고 그 빛에 휩싸인 현이 뚝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역시 칠채였군!”
흐릿한 인영으로 나타난 노인이 두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끊어진 현에서는 웅 하는 소리와 함께 구슬픈 곡성(哭聲)이 흘러나왔고 일곱 색깔의 빛은 빠른 속도로 활의 형태를 따라 호 모양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