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46
한제는 웃음을 머금은 채 말없이 술을 단번에 비웠다.
“어르신, 술맛이 꽤 좋지요? 하하! 저희 할아버님은 대장장이가 아니라 술을 만들어 파시는 분이었습니다. 대장간을 연 건 저고요.”
사내 역시 술을 단숨에 비웠다.
대장간 안의 열기와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한제는 조용히 앉아 천가의 술을 마셨다. 이 상황이 꿈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참 뒤, 눈발이 조금 약해지자 한제는 작별을 고했다. 사내는 아무래도 나이가 든 한제가 걱정스러웠는지 떠나는 그에게 술을 한 동이 건넸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동안 하늘은 점차 어두워졌지만 눈 쌓인 길은 오히려 환하게 빛났다. 한제는 달빛에 길게 그림자를 남기며 걸었다.
잠깐의 휴식으로 한제는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발을 들이지 않은 주작성 곳곳으로 향했다.
설역국에서 온 손님
그렇게 조나라를 떠난 지 15년이 지났고 한제는 어느새 일흔 살이 되었다.
등은 전보다 더 굽어 있었고 이제 곧 세상을 떠날 것만 같은 기운이 느껴졌지만 두 눈만큼은 태양처럼 밝게 빛나 어떤 누구도 감히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의 두 눈에는 원인과 결과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이 배어 있었다. 당시 스승으로 모셨던 소도영도 이런 기질을 갖춘 적은 없었다.
어느 낯선 나라에 이른 한제는 길가의 정자에 서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막처럼 쏟아지는 비 너머로 바다가 언뜻 보이는 듯도 했다.
거대한 바다는 두 개의 대륙을 갈라놓고 있었다. 그 바다의 건너편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다. 그곳은 한제가 마지막으로 가볼 곳이기도 했다. 그가 또 다른 삶에서 사랑했던 여인이 살던 곳이기도 한 그곳은 반드시 가봐야 했다.
한제는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빗속 저 멀리서 한 여인이 걸어왔다. 온몸에서 짙은 한기를 발산하는 그녀 주위의 빗방울은 쩌적 얼어붙어 얼음 결정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그녀는 품에 아이를 안고 있었다. 두꺼운 포대기에 싸인 아이는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지는데도 깊게 잠이 든 상태였다.
정자 앞에 이른 여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중년으로 보였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아름다운 여인에게서는 한기만이 아니라 짙은 살기도 풍겼다.
“그대가 대학자 이한제인가?”
감았던 두 눈을 뜬 한제는 여인을 덤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설역국에서 왔다.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여인의 목소리는 그녀가 내뿜는 한기만큼이나 서늘하고 차가웠다.
한제는 냉랭한 여인과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냉랭한 표정의 여인은 차가운 바람을 품은 듯한 두 눈으로 한제를 그리고 한제 뒤쪽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이름은 우리 주작성 곳곳에 널리 알려져 저 먼 설역국에서도 들을 수 있다. 이 시대의 대학자로서 수많은 수련자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이 세상을 깨우치게 했으며 알 수 없는 길 위의 지침이 되었다지? 내가 오늘 그대를 찾아온 것은 바로 이 아이 때문이다.”
여인은 고개를 숙여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았다. 내내 차갑기만 했던 두 눈에는 부드러운 빛이 어렸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대는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있다더군. 원인과 결과의 순환을 냉철한 삶과 죽음을 그리고 모호하여 확신하기 어려운 진실과 거짓을 파악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이 아이가 걸어 나가야 할 길을 알려줄 수 있겠나?”
여인의 목소리에서 서늘한 빛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품 안의 아이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우연히 눈 속에 묻힌 이 아이를 발견했을 때, 아이의 아비와 어미는 이미 죽은 후였지. 아이 또한 온몸은 꽁꽁 얼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상태였어. 한데 자세히 살펴보니 자질이 훌륭하더군. 또한 이 아이의 체내에는 태생적으로 오행의 기운이 구비되어 있었어. 만약 살아난다면 필히 우리 주작성에서 내로라하는 인재가 될 터.”
여인은 고개를 들어 한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만 이 아이의 삶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을 게야. 예측에 능한 나는 이 아이가 아주 큰 재난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이미 이 아이의 생에 연루된 이상, 나는 아이가 그 재난을 무사히 넘기도록 도울 수밖에 없어. 아이는 커갈수록 위기 또한 또렷해질 걸세. 나로서는 신통술로 아이의 성장을 제한해 갓난아이 상태로 유지해두는 게 전부였지. 그러다가 그대에 관한 소문을 듣고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오게 됐네..”
콰르릉!
쏟아지는 빗속에 돌연 한 줄기 번개가 내리치더니 뒤를 이어 천둥이 울려 퍼졌다. 그 우렁찬 소리 때문인지 잠에서 깬 아이는 조금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듯 맑은 눈을 번쩍 뜨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응애! 응애애!”
천둥번개가 지나간 뒤에도 아이의 울음소리는 계속됐다.
“내가 좀 안아보겠네.”
한제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인은 잠시 경계하는 듯하더니 안고 있던 아이를 한제에게 건넸다. 아이를 조심스레 받아 든 한제는 고개를 숙여 울고 있는 아이와 눈을 맞췄다.
여자아이였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울고 있는데도 퍽 귀엽고 예뻤다. 한데 아이의 미간에는 꼭 그 아이의 영혼에 찍힌 듯한 붉은 점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요란하게 울던 아이가 한제의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그치더니 하염없이 맑고 순수한 눈으로 한제를 가만히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한제의 노회한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가 손으로 코를 톡 건드리자 급기야 아이는 재미있다는 듯 웃기까지 했다.
“이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가?”
한제가 조용히 물었다.
“아이의 부모가 일찍 죽었으니 나도 이름은 모르네. 아직 이름을 지어주지도 않았지. 괜찮다면 그대가 지어보게.”
여인의 말에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바라보다가 그 아이의 몸에서 익숙한 흔적을 어렴풋이 느꼈다.
한참 뒤 고개를 든 그는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울창한 숲에서는 화려한 색채의 나비 한 마리가 나뭇잎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날개가 비에 젖어 날지 못하는 나비에게 훅 불어닥치는 강한 바람은 사람에게 불어닥치는 거센 폭풍과 다를 바 없을 터였다.
울창한 숲속의 나비를 바라보던 한제는 이내 뭔가를 깨우친 듯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홍접… 홍접이 좋겠군. 빗속의 나비는 그 화려한 색채로 고고하고 아름다운 길을 걸어 나갈 테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은 얼굴로 한제는 부드럽게 말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한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까르르 웃었다.
“나는 신통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네. 이 아이가 재난을 피하게 할 방법도 알지 못하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꿈속에서 보았던 그림을 하나 그려주는 것뿐이야. 만일 자네가 그 그림을 이해한다면 이 아이의 재난도 피하게 할 수 있겠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여자아이를 여인에게 넘겨준 한제는 빗물에 손을 적셨다. 뒤이어 뭔가를 떠올리듯 눈을 감더니 정자의 돌 탁자에 복잡한 도안 하나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 도안은 하나의 진법이었다. 매우 비밀스럽고 오묘한 진법을 보며 설역국 여인은 흠칫 놀랐고 그 도안을 똑똑히 기억에 새겼다.
한참 뒤, 한제는 도안을 다 그려낸 뒤에야 눈을 떴다.
“이 진을 다 이해했다면 그 아이의 머리카락 한 올을 취해 진 안에 두도록 하게.”
한제는 복잡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먹구름이 조금 흩어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한제가 그린 도안은 조금씩 흩어져 사라졌다.
설역국 여인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한제를 향해 깊이 절을 하고는 아이를 품에 안고 빗속으로 멀어져갔다.
묵묵히 정자에 서서 점차 가늘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한제의 눈에 혼란한 빛이 담겼다.
“원인과 결과⋯⋯ 이 인과는 과연 전생의 삶과 같은 진실인가 아니면 그저 나 혼자 완성하려 하는 거짓인가⋯⋯?”
한제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이때, 마침내 비가 멈추었고 하늘에는 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숲속 나뭇잎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나비도 날갯짓을 몇 번 하더니 한제의 시선 속에서 저 멀리 날아갔다.
한제는 바다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는 두 대륙 사이를 오가는 상선에 올라 바다 건너편의 대륙으로 향했다.
눈앞에 펼쳐진 해수면은 끝이 없었다. 일렁이는 파도는 상선을 오르락내리락하게 했고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그의 백발을 헝클어뜨리고는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다에서 보는 해와 달, 별은 운치가 있었다. 난생처음 바다에 나왔지만 한제는 이 상황이 전혀 낯설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하기만 했다.
바다 위로 펼쳐진 하늘에서는 한 무리의 바닷새가 날았고 밝은 햇살이 해수면 위로 내리쬐었다.
다섯 달이 지났을 때, 상선은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선원들의 독특한 노랫소리를 듣던 한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항해를 시작한 지 여섯 번째 되는 달의 어느 날 이른 아침, 한제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 밖으로 나갔다. 갑판에 오른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와 반년 동안 함께해온 선원들이 동쪽을 향해 꿇어앉아 절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한제는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동쪽 바다 위, 흐릿하고 모호한 하늘 위로 허상이 보였다. 폭발하고 있는 화산의 허상이었다.
산 전체가 진동하면서 용과 같은 두 갈래의 거대한 균열을 드러냈는데 그 균열은 마치 하나의 표식 같았다. 뜨거운 용암은 검은 연기를 뭉게뭉게 피워올리며 끝없이 흘러내렸다.
멀리 보이는 허상은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매우 생생했지만 약간 흐릿하기도 해서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멍하니 그 허상을 바라보던 한제의 머릿속에서 쾅 하는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진실과 거짓⋯⋯ 진실과 거짓⋯⋯ 책에 따르면 바다에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이 토해내는 숨은 산의 형상과 같은 허상이 된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 광경은 대체 진실인가 거짓인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광경인가 아니면 완전한 허상인가?’
“바다의 영혼이시여, 진정하십시오.”
선원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허상을 마주한 그들의 심신은 진동하고 있었다. 선원인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허상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역시 아니었다.
뱃사람들 사이에서는 출항 중 허상을 마주하는 것은 화가 난 바다의 영혼이 뱃사람들을 벌하기 위함이라는 전설도 있었다.
허상으로부터 눈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던 한제는 사방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가 짐들을 바다에 내던지며 바다의 영혼을 진정시키려 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이건 거짓이야. 진실된 존재가 아닌 허상일 뿐이야.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리는 없어. 이건 수련자가 해저에서 신통술을 발휘해 일으킨 현상이 분명해!”
한제가 중얼거렸다. 세상의 수많은 이치를 깨달은 그였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거짓이야⋯⋯ 이건 거짓⋯⋯.”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중얼거리던 한제의 말이 뚝 끊겨버렸다. 그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해수면 위에 나타난 허상의 화산을 가리켰다.
“저⋯⋯.”
허상으로 나타난 세상 속, 화산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하얀 옷을 입은 그녀의 외모는 절세 미녀라고 할 정도는 못 되었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검고 긴 머리와 옷자락을 나풀거리는 그녀는 먼지 연기 속에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선녀 같았다.
검은 연기 속에서 걸어 나온 그녀가 고운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키자 화산이 바르르 진동하면서 점차 폭발을 멈출 기미를 보였다.
한편, 그 여인을 본 순간 한제는 모든 힘을 잃은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섰다. 동시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온몸을 관통했다. 슬픔에 잠식된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그녀다.”
노쇠한 그의 몸은 이 순간 더욱 나약해졌다. 그는 벽에 기대어 선 채 허상으로 나타난 세상을 그리고 백의의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