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47
한 번의 눈길
한 시진 뒤, 허상은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그제야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허상으로 나타난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화산이 폭발했을 때 타오르는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던 것과 그중 몇몇이 자신들 쪽으로 날아오던 것까지도.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바다의 영혼이 분노한 결과라 믿었다.
벽에 기대어 앉은 한제의 눈물은 그의 얼굴 주름을 따라 흐르며 옷깃을 적셨다. 허상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머릿속은 텅 비었고 오직 그 여인의 모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과연 진실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설마 이것조차 꿈인가?’
한참 뒤, 한제는 고개를 숙여 멍하니 해수면을 바라보았다.
★ ★ ★
시간은 또다시 흘러갔다. 한 달, 두 달, 세 달⋯⋯.
출항한 지 아홉 달째 되던 날, 한제는 진정한 바다의 분노를 목격했다.
그날 밤, 검은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으며 우렁찬 소리와 함께 줄기줄기 번개를 쏘아냈다.
그중 몇 갈래는 바다를 때릴 듯 달려들었고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번개가 밤하늘에 수시로 번쩍거렸다.
번개가 사방을 밝힐 때마다 한제는 집채만 한 파도를 볼 수 있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는 천둥소리에 비할 만큼 요란했다. 거센 바람에 바닷물이 배 위로 쏟아졌다.
깊은 밤, 두려움에 질린 선원들은 최선을 다해 상선을 통제하고 바다의 분노에 저항했다. 모든 이들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한편 다음 날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한제는 기둥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그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휘청이었고 광풍이 불어닥칠 때마다 바닷물에 온몸이 젖었다. 백발에서도 바닷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지만 그의 두 눈만은 밝게 번득였다.
분노한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점점 더 밝게 빛났다. 이때 그의 심장은 온 세상을 다 품을 수 있을 정도로 확장된 상태였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힘이자 진정한 도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무정함이야!’
한제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천둥이나 바닷바람에 묻혔지만 그럼에도 그의 가슴을 호탕한 기개로 가득 채웠다.
한제는 선원들이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모습을 금방이라도 침몰할 듯한 상선이 격렬하게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았고 동시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 상황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목격했다.
하지만 그 의지는 불어닥치는 비바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닷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강한 파도가 불어닥치면서 쩌적 소리와 함께 상선의 돛대가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돛대에 어느 선원이 깔려버렸지만 다행히 중상을 피한 듯 버둥거리며 기어 나와 계속해서 밧줄을 당겼다. 살기 위함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분노한 바다 앞에서 상선은 하나의 낙엽처럼 미약했다. 계속해서 철썩이는 거친 파도에 배는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절망적인 기운이 번져 나갔다. 한제는 단단히 붙잡고 있던 기둥에서 손을 떼고는 다른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성난 바다에 저항했다.
“포기하지 마라, 아직 힘이 있으니⋯⋯.”
어느 중년 선원이 씁쓸하게 웃으며 밧줄을 힘껏 잡아당겨 돛을 내렸다. 거센 파도가 막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 그때, 삶과 죽음 사이에 선 그는 배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선원의 노래를 불렀다.
“절망하지 마라, 아직 꿈이 있으니⋯⋯.”
스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소년이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고함에 가까운 노래로 사라졌던 용기를 다시 찾으려는 듯했다.
“낙담하지 마라, 내일이 있으니⋯⋯.”
뒤이어 더 많은 선원들이 쏟아지는 비와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로 합쳐져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굴복하지 마라, 그럴 수 없으니⋯⋯.”
“눈을 감지 마라, 태양을 봐야 할 테니⋯⋯.”
“비바람이 몰아쳐도 살아남으려 하는 우리의 목소리를 덮을 수는 없다네! 바다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두려울 것 그 무엇이랴! 바다의 분노에 침몰할지언정 우리의 노래까지 막을 수는 없으리!”
입을 모아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노래를 부르는 선원들의 목소리에서는 불굴의 의지가 삶에 대한 갈망이, 그리고 위기 앞의 용기가 느껴졌다. 늙은 한제는 우르릉 쾅쾅 하는 천둥소리 아래 울려 퍼지는 그 노래를 들으며 전보다 더 밝게 눈을 번득였다.
‘이것이 바로 거역이다! 하늘에 대한 저항의 의지! 삶과 죽음… 저항심은 바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탄생하는구나! 불굴의 의지에서 탄생하는 거야! 만약 불만을 품지 않는다면 불굴의 의지를 품지 않는다면 삶과 죽음 사이에 서지도 못할 테지. 살면 살고 죽으면 죽겠다는 순응적인 태도를 갖게 될 테니까. 이제 알겠어!’
한제의 심신이 마구 진동했다. 원인과 결과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 속에서 내내 혼란스러워했던 그는 지금 이 순간, 선원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꼭 꿈에서 깨어난 듯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삶과 죽음!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다. 그리고 그 두려움 앞에서 사람의 태도는 순응과 저항, 이렇게 둘로 나뉘었다.
삶과 죽음에 순응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첫 번째 경지였다.
하지만 만약 그것에 저항하는 마음을 품고 삶을 삶으로 보지 않으며,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삶과 죽음의 두 번째 경지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생사를 파악한다’는 말을 쓰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생사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생사를 얕잡아볼 뿐이었다.
저항심을 품은 채 생사를 얕잡아본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죽음을 결심했다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간파한 것은 아니다.
삶과 죽음의 세 번째 경지, 즉 한제가 추구하는 도리인 이 마지막 경지 또한 생사를 간파하거나 초월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한 마디 말이었다.
이 한 마디 말은 한제의 머릿속에는 존재했으나 한제는 그 말을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한 겹의 막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생사를 얕잡아보고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는 선원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자 천둥번개는 점차 흩어져 사라졌고 높이 솟구쳐 오르던 파도도 천천히 물러갔다. 이내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선원들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환호했다.
한제는 뱃머리에 앉아 아침 해를 바라보았다. 하늘 위로 하얀 새가 날아가며 울었다.
출항한 지 열한 달이 되던 때, 바다 끄트머리로 대륙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원들은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얼마 후, 거의 1년을 함께해온 선원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 한제는 상선을 떠나 낯선 대륙에 발을 들였다.
이 대륙에는 일반인들의 나라와 종파도 많았고 수련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나라 중 화분국이 있었다.
한제는 진지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며 낯선 땅과 낯선 산, 그리고 낯선 강을 보았다. 또한 오가는 와중에 낯선 사람들과도 만났다.
이곳에 온 것은 난생처음이었지만 그의 이름은 이곳에까지 퍼져 있었다. 고향에서만큼은 아니었지만 한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평범한 나그네처럼 곳곳을 돌아다녔다.
눈 깜짝할 사이 3년이 지났다. 조나라를 떠나온 지 벌써 19년이 넘은 것이다.
한제의 몸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는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힘겹게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는 여러 종파를 찾아가 수많은 수련자를 만났고 일반인 귀족과 왕족도 적잖이 만났다. 점차 그의 이름은 이 낯선 대륙에서도 유명해졌다. 어느 나라든, 어느 종파든, 사람들은 한제를 ‘유명한 대학자’라 불렀다.
한제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때로는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고도 그저 지혜로운 눈빛만으로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어느 가을날, 한제는 수많은 화산이 있는 지역에 이르렀다. 그가 막 발을 들였을 때, 마침 화산 하나가 폭발하고 있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볼 수 있었다. 뜨거운 열기도 훅 끼쳐왔다.
고개를 들어 검은 연기 기둥을 바라보는 한제의 두 눈이 전에 없이 부드러워졌다. 그 검은 연기 기둥에서 걸어 나오는 하얀 인영을 보았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를 양 어깨 위로 늘어뜨린 백의의 여인은 방금 폭발한 화산 안에서 뭔가를 취한 듯 손에 옥병 하나를 들고 돌아서다가 저 멀리 선 한제를 보았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눈빛에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마치 1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눈빛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곳에 온 것이 오직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여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눈빛 또한 한없이 낯설기만 했다.
여인은 한제를 한 번 훑어보고는 마치 난생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거두더니 홱 돌아서서 먼 곳으로 떠나갔다.
한제는 점점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은 채 작은 한숨을 토해냈다.
‘내 평생 꿈속에서 만났던 이들은 내게서 설명할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다. 주예도 그랬고 서희도 그랬고 류미도 그랬지. 조나라를 떠나 돌아다닌 지난 19년간 방문했던 종파 내에서 봤던 수련자들도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저 여인만은⋯⋯ 저 여인만은⋯⋯.’
한제의 얼굴은 한층 더 늙어 보였다. 그는 곁의 고목에 기대어 서서 두 눈을 떴다. 두 눈에서는 혼란한 빛이 맴돌았지만 그보다는 복잡한 깨달음의 빛이 더 강했다.
한제는 씁쓸한 표정으로 걸었다.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뜨고 지는 해도 보지 않았다. 화분국 대지 위에서 그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저 점점 더 먼 곳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하루하루가 지나고 여러 달이 지났다.
한제의 두 눈에 담긴 복잡한 빛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는 혼란한 빛으로 그 복잡한 빛을 거의 완전해진 깨달음을 가렸다. 아직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날, 한제의 앞에 산이 하나 나타났다.
이미 생명을 잃은 화산이었다. 어쩌면 과거 언젠가는 굉음과 함께 무궁무진한 용암을 쏟아내고 시커먼 연기를 뭉게뭉게 피워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화산은 죽어 있었다.
땅은 고리 형태로 굳은 용암의 흔적으로 가득했고 바스라진 검은 돌조각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죽음의 기운이 맴도는 반경 수백 리에는 인적이 없었다.
한제는 멍한 눈으로 죽은화산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윽고 두 눈을 뒤덮었던 멍한 빛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그는 몸을 덜덜 떨면서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저건⋯⋯?”
눈앞에 자리한 것은 그가 배 위에서 보았던, 허상으로 나타난 세상 속에서 폭발하고 있던 그 화산이었다. 산 위의 두 갈래 균열은 마치 하나의 표식처럼 얽혀 있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표식은 한제에게 이 화산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꿈이 묻다
화산을 눈에 담은 한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도 더 이상 이전에 얻은 깨달음을 숨길 수도 없었다. 바다 위에서 보았던 장면 하나하나가 지금 눈앞에 그대로 겹쳐지고 있는 듯했다.
바다 위에서 보았던 허상이 지금 눈에 담긴 광경과 합쳐지면서 한 줄기 형태 없는 힘을 형성했고 그 힘은 한제의 체내로 뚫고 들어갔다. 50년 넘는 시간 동안 이어온 한제의 거짓말과 기만은 그 강력한 힘에 그대로 흩어져 사라졌고 한제는 난생처음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똑바로 마주하게 됐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어. 하지만 난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한제, 너처럼 나 역시 나 스스로를 속였다. 하지만 넌 나 역시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잊었겠지.’
죽은화산을 가리킨 한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서는 어째서인지 슬픔이 느껴졌다.
‘오직 그녀만은⋯⋯ 나로부터 어떠한 익숙함도 느끼지 못했어. 그저 낯설어했지. 이한제, 만약 지금의 삶이 네 전생이라면 그리고 만약 후세에 이모완과 함께할 수 있다면 내가 그녀의 원인과 결과의 고리를 끊어 버리기를 원하느냐? 지금의 내가 한바탕 꿈속 존재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내가 꾼 꿈속 수련자로서의 삶이 진실이라면 잠들어 있는 나는 슬픔과 모완에 대한 정 때문에 이 꿈속에서 그녀가 나를 기억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냐?’
생각은 폭풍처럼 몰아쳤다.
“후세에 혹은 꿈에서 깨어난 세상에서 모완을 고통스럽고 긴 기다림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원하는 게냐? 나를 만나기 전에 그녀가 그러했듯 그저 즐겁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를 내가 아닌 다른 사내와 부부의 연을 맺고 그렇게 누구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거냐? 그런 것이냐!’
한제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의 인생을 간파하는 것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곤 하지만 지금 한제는 그저 알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한제, 정말 그러기를 원하는 거냐? 어찌 모완이 너를 잊게 할 수 있느냐? 정말 다른 세상의 너인 내가 무려 2천 년도 넘게 이어진 원인과 결과의 고리를 끊어버리기를 원하는 것이냐!”
한제가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