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71
그의 곁에는 그의 딸 청상이 서늘한 얼굴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따르고 있는 주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주일은 청상의 그런 표정에 이미 익숙해진 듯 전혀 상처받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움이 가득한 눈으로 청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눈앞의 청상은 그가 사랑한 청상과 똑같이 생겼지만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고 심지어 그를 기억하지도 못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주일은 청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제야, 나와 내 딸은 떠날 준비가 됐다. 환생을 감수할 것이다!”
청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제는 고개를 돌려 주일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로도 출발하기 전까지 주은혜와 신공호 등이 한제 곁에 앉았다. 떠날 준비를 마치고 모인 이들의 수는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출발 전일. 선계의 하늘에는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빗속을 가르며 백의를 입은 모은미가 마치 빗속에 흩날리는 버드나무 씨앗처럼 날아왔다.
한제는 빗속으로 우산을 받쳐 든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는 칠을 한 듯 먹빛이었고 선녀 같은 얼굴과 특유의 분위기에 주위까지 차분해졌다. 오직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모은미, 정확히 말하자면 류미의 아름다움이었다. 이 순간 모은미의 그 모든 것, 옷차림부터 연한 화장을 한 얼굴, 비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자신을 바라보던 표정까지, 한제는 평생토록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가는 길 평안하기를⋯⋯.”
우산을 받쳐 든 채 빗속에 선 모은미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 사이로 울려 퍼지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지금까지와 달리 서늘함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한제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뿐, 그녀는 동부계에 남기로 결정했다. 이후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한제로서는 알 수 없었다. 현명한 그녀가 남기로 했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한제는 그녀를 설득할 수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보름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더욱 거세졌다. 하늘 가득 구슬로 엮은 발이 드리운 듯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가 하늘을 향해 한 걸음 나섰다. 동부계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들이 긴 빛을 그리며 그의 뒤로 따라나섰다. 그 빛들은 비 내리는 저녁 하늘을 수놓으며 멀어져갔다.
한제는 잠시 멈춰 서더니 고개를 숙여 저 멀리 대지를 그곳에서 우산을 받쳐 든 채 서 있는 모은미를 바라보았다.
빗속에 보일 듯 말 듯한 그녀 역시 한제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우산 아래 낭창한 그녀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슬픔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살아남는다면 돌아올지도⋯⋯.”
“돌아온다면 환영할지도⋯⋯.”
모은미는 우산을 살짝 숙여 얼굴을 가린 채 답했다.
한제는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일곱 개의 본원을 가동해 손바닥에 모았다. 그러자 빗속의 대지를 환하게 비추는 빛의 검이 나타났다.
본원의 힘이 녹아든 데다가 도고의 기운까지 풍기는 이 검에서는 어마어마한 위력이 느껴졌다.
“언제 다시 동부계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몰라. 1천 년이 걸릴 수도 1만 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이 검을 주지. 몸조심하게!”
작게 한숨을 내쉰 한제는 다시 뒤돌아 서더니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그를 기다리던 이들이 뒤따랐다.
이천매는 고개를 돌려 모은미를 힐끗 보더니 다시 몸을 날렸다.
모은미는 고개를 들어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눈물에 시야가 흐려졌다. 마치 문 앞에서 먼 길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처럼, 그녀는 모두가 멀어질 때까지 그렇게 우산을 받쳐 든 채 눈길로 그들을 배웅했다.
“몸조심하게⋯⋯.”
모은미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 그녀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한제가 남긴 본원의 검을 쥔 그녀는 이내 몸을 돌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한제는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동부계를 돌아보았다. 이 순간이 이 곳과의 영원한 이별은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진이 있으니 다시 장존 같은 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 정도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겠지. 태고오존 중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중상을 입었고 남몽도존 선배님과 남운자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다만 그렇다 해도 몇 가지 문제가 남아 있긴 하다. 우선 주작… 주작 장군은 이곳을 떠났다. 계외 타락의 땅에서 만난 1대 주작이 정말로 주작 장군의 분신이라면 그 역시 이곳에서 사라졌겠지. 그렇다면 2대 주작과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긴 했으나 그는 타락의 땅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타락의 땅은 쉽게 볼 곳이 아니야. 천역주의 나침반 바늘이지.’
한제는 눈을 번득였다. 어떤 추측이 떠오른 것이다. 다만 지금은 그 추측을 확인하기에 좋은 때가 아니었다.
‘일전에 놓아주었던 적혼자도 있고 일찍이 수도자와의 싸움에서 도와주었던, 풍의 선계에 갇혀 있는 듯한 신비로운 인물도 있지. 그는 풍의 선계에서 빠져나왔을 터.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동부계의 문이 열린 것을 느끼고 찾아올지도 몰라. 이해되지 않는 것들과 장소들도 아직 많이 남았지.’
한제는 두 눈을 감았다. 이런 모든 의문과 추측은 선강 대륙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와 하나하나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네 개의 영혼이 연 몽도(夢道)
‘선강 대륙은 내 고향이 아니다. 고향은 이곳이지. 지금 떠나는 것은 말하자면 여행과 같은 것.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한제는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내가 죽지 않는다면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그 모든 비밀을 밝혀내겠다!’
지금 수준이라면 그 비밀들을 얼마든지 밝혀낼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의문과 비밀들을 고향에 대한 기억과 추억으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이는 일종의 집념이었다.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남겨둠으로써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고향을 잊지 않으려는…‧.
그렇게 수십 개의 빛이 한제를 위수로 우주를 질주했다. 나천성역의 동부계 대문으로 향하는 이들은 모두 수준이 높았기에 이동은 매우 빨랐다. 비교적 느린 편인 이천매도 한제의 도움으로 아무런 문제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현라와의 약속을 며칠 앞뒀을 때, 한제와 일행들은 동부계 대문 앞에 이르렀다. 우주에 우뚝 솟아 밝고 부드러운 빛을 발산하고 있는 금색 문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마치 우주를 떠받친 듯한 그 거대한 문 옆으로는 현라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사방을 에워쌌다.
한제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도착한 순간, 현라는 감았던 눈을 뜨더니 한제와 그 뒤에 선 이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약속한 기한까지는 며칠 남았지만 상관없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환생을 감당할 자격이 있구나!”
현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한제 일행의 숫자에 내심 안심하기도 했다. 스무 명도 안 되는 수라면 수고를 훨씬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대로 그 수가 수백에서 수천 명에 달했다면 현라에게도 퍽 어려운 일이 됐을 것이다.
사실 한제는 동부계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 열성적으로 알리지는 않았다. 그가 더 열심히 알렸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제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현라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기 위해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현라가 결인을 그린 두 손을 양옆으로 휘두르자 우주가 진동했고 하나하나 일어난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콰쾅 하는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처음에는 그다지 격렬하지 않았지만 곧 천둥소리만큼이나 우렁찼고 종국에는 이 세상 모든 소리를 뒤덮었다. 현라 대천존의 옷자락이 마구 나풀거렸고 그의 머리카락 역시 넘실댔다. 마치 그 안에서 대량의 기운이 발산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내 현라의 뒤로 거대한 붉은 태양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그러자 금색 문에서 발산된 빛은 꼬리를 감추듯 곧장 어두워졌다.
“첫 번째, 용황(龍皇), 현라의 이름으로 소환한다!”
현라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힘이 실려 있었다. 그 목소리에 우주에서 울리던 굉음은 더욱 격렬해졌고 셀 수 없이 많은 파문이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했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회오리에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일 듯한 흡입력이 발산됐다. 그리고 그 회오리 가장 깊은 곳은 다른 세상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다.
회오리의 회전이 절정에 이른 순간.
“쿠오오오!”
그 안에서는 용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한제의 귀가 웅 하고 울릴 정도였다.
소리는 점점 거세지면서 한제 뒤에 선 이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현라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한제 역시 진동하는 심신을 느꼈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회오리를 들여다보았다.
회오리 안에서 울려 퍼지는 포효에는 끝이 없었다. 한제는 그 안 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볼 수 없었지만 회오리에서 튀어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며 포효하는 한 마리 용의 모습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잠시 후, 포효가 우주를 다 무너뜨릴 정도로 거세졌을 때, 회오리에서 거대한 머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회오리는 순식간에 어스름한 빛으로 무너져 내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대한 머리의 주인은 한 마리 용이었다.
그 용의 머리에는 하나의 뿔과 길이가 수천 척에 달할 법한 두 가닥 수염이 달려 있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 비늘로 뒤덮인 녀석의 눈에서는 서늘하고 냉혹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용의 머리에 달린 뿔의 끝이 뾰족한 게 아니라 각이 진 네모꼴이라는 것이었다. 멀리서 보면 제왕의 관처럼 보일듯한 뿔이었다.
이렇게 나타난 용은 머리만 해도 그 길이가 1만 척에 달했다.
머리를 내민 용은 곧 몸을 뒤틀어 회오리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려 했다.
“이 용은 나의 가장 강력한 아홉 개의 무기 중 하나, 용황이다! 선강 대륙 동쪽 교외에서 찾아냈지. 그곳에는 거친 흉수들이 아주 많은데 이 녀석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더 거칠고 포악한 녀석이었지. 난 당시 공겁기 중기 수준이었던 이 녀석을 죽이고 그 혼을 취한 후 육신을 제련하고 뼈를 뽑아내 무기로 삼았다! 이 녀석은 내 채찍이다. 난 선강 대륙의 규칙을 향해 이 채찍을 휘둘러 너희들을 환생시킬 틈을 만들어낼 것이다!”
현라가 웅혼하게 외치며 거대한 용을 향해 뻗은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콰쾅!
“쿠오오오!”
용은 포효하며 허공에서 빠져나왔다. 이내 수십만 척에 달하는 녀석은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뒤 현라에게 달려들었고 급격히 줄어들다가 1천 척 길이의 붉은 채찍으로 변했다.
채찍에서는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느껴져 한제는 그것을 본 순간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채찍의 위력을 감히 감당해낼 수 없을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의 채찍이었다.
현라는 용황 채찍을 쥔 손을 휘둘렀다.
휙!
채찍이 동부계 문을 향해 달려들면서 거대한 용이 포효했다.
콰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동부계 대문이 맹렬하게 진동했다. 그 안에서 발산되던 금빛은 흐릿해지더니 채찍이 떨어진 순간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강력한 힘이 밀려들어 동부계 대문 너머 안개에 거대한 균열 하나를 냈다. 이 깊은 균열은 어디로 통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두운 균열은 주위에서 밀려드는 안개 때문에 빠르게 수축됐다.
현라는 연거푸 아홉 번 채찍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빠르게 불어난 채찍은 아홉 번째 채찍질을 마칠 무렵 수십만 척으로 늘어난 채 그대로 동부계 대문으로 달려들어 안개를 흩어버리며 길을 열었다. 선강 대륙으로 이어진 길이자 환생의 길이었다.
“환생할 때는 선강 대륙의 규칙에 저항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길을 잃을 위험에도 대비해야 한다. 용의 몸으로 만들어진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환생할 수 있다. 그 사실을 꼭 기억해두도록!”
현라는 결인을 그려 합장을 하더니 이내 손을 확 떼어내며 휘둘렀다.
“두 번째, 산요(山妖), 현라의 이름으로 소환한다!”
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전방에 하늘을 뚫을 듯 높은 설산의 허상이 하나 떠올랐다. 어찌나 높은지 끝이 보이지도 않았고 온통 하얀빛이었다.
“환생의 길을 걷는 도중 환각이 나타나 방해할 게다. 이 산요는 내가 선강 대륙의 어느 오래된 산과 셀 수 없이 많은 산혼을 응집해 요선(妖仙)으로 완성한 법보다. 이것이 너희들의 혼이 흩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줄 것이다!”
현라가 손을 크게 휘두르자 허상의 거대한 설산은 곧장 흩어지더니 동부계 대문으로 돌진했다. 쩌적 소리와 함께 나타나 용의 몸으로 이루어진 길 사방을 봉인한 하얀 얼음은 끝없이 뻗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윤회의 길은 설산으로 보호됐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세 번째, 검선(劍仙), 현라의 이름으로 소환한다!”
현라가 왼손을 들어 미간을 가리켰다. 그러자 미간에 한 줄기 균열이 일어나더니 그 안에서 보라색 빛을 번득이는 손바닥만 한 검이 튀어나왔다.
“선강 대륙 밖의 부서진 별 99999개로 제련해낸 검이다. 또한 이 검에 어울리는 검령을 만들기 위해 선족 선인 99999명의 혼을 거뒀지. 그만큼 거친 이 검이 너희들의 환생을 보호하게 할 것이다! 이것의 보호를 받는 한 너희는 안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