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76
동부계와 선강 대륙 사이의 허공. 창백한 얼굴의 한제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체내에서 도고의 힘을 끊임없이 발휘해 사방에서 몰려드는 압박에 저항했다.
이 압박은 이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만약 흡혈마수의 왕이 없었다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흡혈마수의 왕 역시 속도가 한층 느려진 상태였다. 힘겹게 몸부림을 치듯 나아가는 녀석은 수시로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한제의 두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본원의 힘은 이미 바닥났기에 이제 선강 대륙의 법칙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도고의 육신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 1년 동안은 허공을 표류하는 유해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끝내 이곳까지 이른 수련자나 흉수는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한제 주위를 맴돌던 혈룡도 일찍이 흩어져 사라졌다. 심지어는 미간에 남은 붉은 문양도 거의 없어질 듯 흐릿해진 상태였다.
지난 7년은 한제의 삶에서 가장 힘겨운 시기였다. 특히 뒤에 놓인 자신의 아내, 모완을 보호해야 했기에 감당해야 할 고통은 더욱 컸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 ★ ★
눈 깜짝할 사이 또 1년이 지나 여덟 번째 해가 찾아왔다. 이 무렵, 선강 대륙의 법칙은 더욱 강한 압박을 가해 와 마치 허공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처럼 가르고 나아가기 힘겨웠다.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고 두 눈동자는 흐려졌다. 한제는 자신이 거의 한계에 봉착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한제는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흡혈마수의 왕에게 손을 얹었다. 이곳이 정말로 이 흉수 선조들의 고향이었다면 흡혈마수의 왕은 아마도 지금처럼 힘겨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곳에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녀석이 아니다보니 지금은 더 나아가기도 힘들어 보였다.
흡혈마수의 왕은 이미 지쳐 있었다. 녀석은 선강 대륙의 규칙과 더욱 많이 융합하면서 수차례 탈변을 거쳤다.
“같이 가겠다고 고집부릴 것 없어. 이곳이 너의 고향이라면 그냥 머물러도 좋아. 넌 이미 나와 2천여 년을 함께 했다. 그러니 이만⋯⋯ 가라.”
흡혈마수는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날카롭게 포효했다.
“캬오오오!”
적막으로 가득한 허공에 울려 퍼지는 포효에는 의지가 어려 있었다. 처음으로 한제의 명령에 불복하려는 의지였다. 녀석은 한제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제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한제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감출 수 없는 기쁨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간단한 동작마저도 엄청난 부담이고 수고였다.
마침내 완전히 일어선 순간, 한제의 두 눈에서는 오래 전 흩어져 사라진 밝은 빛이 번득였고 체내에서는 펑, 펑 하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고의 힘을 모두 다 뿜어내 일시적으로라도 직접 움직이려는 것이다.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린 한제는 흡혈마수의 왕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도록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나 흡혈마수는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그 자리에 멈춰버렸고 한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긴 빛을 그리며 돌진했다.
“가! 이곳은 네 고향이야! 이제 가서 네 삶을 살아!”
한제의 굳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소매를 휘두른 그는 이전에 거둬놓았던 아홉 마리의 흡혈마수도 풀어 주었다.
순식간에 먼 거리를 이동한 한제의 귓가에 날카로운 포효가 닿았다. 흡혈마수의 왕이 내지르는 포효였다. 마치 가족과 떨어진 아이가 절망에 가득 차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한제 또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하지만 그는 끝내 돌아보지 않고 남은 힘을 모두 짜내 돌진했다. 그는 자신이 이 길의 끝까지 살아남을 가능성이 1할도 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굳이 흡혈마수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
잠시 후에야 봉인에서 풀려난 흡혈마수는 붉은 두 눈을 번득이며 돌진했다. 녀석은 한제와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죽더라도 주인의 곁에서 죽고 싶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흡혈마수가 아무리 몸부림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한제가 워낙 빠르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가 흡혈마수에게 건 봉인의 힘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쿠오오오!”
애달픈 포효에 한제는 고개를 돌려 녀석이 있는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이를 악물고 더욱 속도를 높였다.
흡혈마수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한제의 뒤를 쫓았지만 결국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 몸을 바르르 떨다가 강력한 압력에 멈춰 섰다.
허나 녀석은 포기하지 않은 듯 몸을 홱 돌리더니 아홉 마리의 흡혈마수와 함께 후방으로 돌진했다.
이곳의 기운을 더 많이 융합해 진화를 거친 후 자신의 주인을 찾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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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1년이 지났다. 한제가 이곳에 온 지는 9년째, 흡혈마수와 떨어진 지도 1년째가 되는 해였다.
한제는 이미 극도로 지쳐 있었다. 어마어마한 압력에 저항하며 내딛는 걸음은 한없이 무거웠고 눈빛은 흐려졌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강력한 의지뿐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갖춰온 반항심에서 기인하는 의지였다.
수련자가 되기 위해 피를 철철 흘리며 계단을 올랐던 평범한 일반인 소년은 2천 년이 지난 지금 불굴의 의지로 또다시 강력한 압박에 저항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 ★
현라가 칠도종이 있는 산봉우리 꼭대기의 검은 안개로 둘러싸인 대전 앞에 가부좌를 튼 지도 벌써 수년이 흘렀다.
한제와 약속한 10년의 기한은 이미 반년이나 지난 상태였지만 현라는 떠나지 않고 기다렸다. 미간에서 번득이던 붉은 문양은 이미 흩어져 사라진 상태였다. 문양이 사라졌다는 것은 한제에게 길을 안내해 줄 수 없게 됐다는 뜻이고 이는 한제가 죽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실패한 건가⋯⋯?”
현라의 눈빛이 순식간에 슬픔으로 물들었다. 허나 그는 조금 더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어쩌면 진짜 천만분에 일이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기적을 믿어보기로 했다.
★ ★ ★
동부계와 선강 대륙 사이의 허공. 머리가 산발이 된 한제는 피천관을 등에 업은 채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의지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몸을 바쳐 아내를 보호하는 것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미간의 붉은 문양은 이미 반년 전 사라졌다. 그러니 그는 그저 같은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지내는 것만으로도 미칠 듯 괴로울 어둠 속에서의 10년. 한제는 묵묵히 견뎌냈다. 만약 강력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그의 심신은 진작 무너져 내렸을 것이었다. 사실 반년 전 사라진 붉은 문양이 없었더라면 그때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터였다.
‘도고의 힘도 거의 바닥났군. 무슨 수라도…’
그때, 저 앞에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미약한 빛은 한 구의 시체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또렷해진 빛의 근원은 보라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두 눈을 꼭 감은 노인에게서는 어떠한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몸에서는 하얀 빛이 발산되고 있었는데 이 빛은 어두운 허공에서 유난히 눈에 잘 띄었다.
어디에서 왔을지 모를 노인은 이미 죽었지만 기이한 힘 한 줄기가 응집되어 있는 듯한 하얀 빛을 확인한 순간, 한제의 눈이 번득였다.
뒤이어 맹렬히 고개를 든 그는 몸부림을 치듯 다가가 오른손을 시체의 가슴팍에 얹었다. 그러자 노인의 몸에서 발산되던 하얀 빛은 빠른 속도로 한제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가슴팍에 얹었던 손을 떼자 빛을 잃은 노인의 시신은 뒤로 날아가 버렸고 한제의 낯빛은 한층 나아져 있었다.
이 힘이 무엇인지 한제는 알지 못했다. 다만 반년 전에도 이런 시체를 마주친 적이 있었고 그때 흡수한 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서늘한 힘이었다. 하지만 그 서늘함 덕분에 한제의 머릿속은 맑아졌다. 힘을 빨아들임에 따라 말라붙었던 본원도 소생할 조짐을 보였고 도고의 힘 역시 약간이나마 회복됐다. 거의 불가사의한 변화였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마주친 수많은 시체 중 이런 힘을 가진 시체는 단 둘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한제는 두 눈을 번득이며 곧장 선강 대륙의 법칙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등에 멘 관을 매만져 모완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묵묵히 나아갔다. 빠르지는 않았지만 멈추지도 않았다.
“방금 전과 같은 그런 시체를 조금 더 찾아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한제는 신식을 뻗어 조금 전처럼 빛을 발하는 시체가 있는지 찾았지만 그런 시체를 발견하는 것은 순전히 운에 달려 있었다. 방향을 바꿀 수 없으니 특히나 운이 따라야 했다.
또다시 1년이 지나는 동안 한제의 힘은 거의 바닥났고 원하는 시체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는 비쩍 마른 상태라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한제의 두 눈에서 번득이던 빛 역시 점점 옅어지다가 결국은 완전히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시체 같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이 두려움은 한 사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한제의 굳건한 의지마저 그런 두려움 앞에 휘청대기 시작했다.
한제는 흔들릴 때마다 등에 진 피천관을 매만짐으로써 굳은 결의를 다졌으나 현실의 잔혹함은 세월이 흐를수록 강해졌다.
그리고 세 달이 더 지났을 때, 한제의 마지막 의식마저 꺾여버렸고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그의 몸에서는 어떠한 기운도 발산되지 않았다.
허나 그 상태에서도 한제는 자신의 몸으로 피천관을 보호했다. 이 무렵에는 피천관에도 이미 균열이 가득했다.
한제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선강 대륙 법칙의 압력은 흩어지듯 사라져 더는 그를 짓누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이한 변화를 한제는 알지 못했다. 이때 그는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관을 짊어진 채, 한제는 알 수 없는 곳으로 정처 없이 둥실 떠갔다. 마치 그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봐왔던 다른 시체들처럼.
★ ★ ★
현라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기다린 지도 15년이었다.
아직 좀 더 기다리고 싶었으나 저 멀리서 전해져오는 강력한 선기에 더는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다.
강력한 선기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고 그 소리와 함께 나타난 금색 태양 안에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인영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태양에서도 누군가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현라는 자신이 이만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자여, 잘 지내거라. 그리고 만약… 살아 있다면 반드시 도고 일맥으로 찾아와라.”
속으로 한숨을 내쉰 현라는 이내 소매를 휘둘러 핏빛 태양으로 변하더니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