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99
그 무렵, 염란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여덟 개의 연기 기둥을 형성한 봉화 폭풍에 휩싸인 그녀의 시야는 흐릿해져 있었고 귓가에서는 쉭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한 이 폭풍에서 발산되는 무궁무진한 흡입력은 금방이라도 그녀의 육신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코앞에 닥친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강한 신통술이라니, 대체 뭐하는 자란 말인가!’
하지만 염란으로서는 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혀끝을 깨물어 피를 한 움큼 뱉어내더니 움켜쥐었다.
“혼환귀술(魂幻歸術)!”
봉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봉화 폭풍을 뚫고 터져 나왔다.
피를 움켜쥔 그녀의 손 틈으로 붉은 안개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뒤이어 그녀의 뒤에 응집된 대량의 붉은 안개가 붉은 길을 형성했다.
이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까지 뻗어 있었다.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이 길의 저 끝에서 먹먹하고 낮은 포효가 울려 퍼진 순간, 피비린내 가득한 살기로 점철된 인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인영이 나타나자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했다.
“아홉 번째 선조다. 염란이 혼환귀술로 아홉 번째 선조를 불러냈어!”
“아홉 번째 선조 나운해! 살육으로 가득했던 그의 일생을 묘사한 벽화를 본 적이 있어! 그 벽화에는 10억 개의 도혼이 구금되어 있지. 그야말로 절대적인 강자야!”
“아홉 번째 선조는 어느 대천존의 손에 죽임을 당했지만 그 강력한 혼은 파멸되지 않고 종파로 돌아왔지.”
피비린내 어린 기운을 풍기는 인영이 나타나자 수련자들이 수군댔다.
살기로 점철된 인영의 머리와 생김새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몸도 흐릿했다. 하지만 짙은 살기만큼은 또렷하고 강력했다.
인영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한 걸음 내딛었다.
콰쾅!
우렁찬 소리와 함께 묵직한 살기가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염란의 주위를 에워싼 봉화 폭풍 역시 그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휩쓸렸고 한제 역시 심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대혼문의 도술은 과연 대단하군! 이곳의 장로로 지내면 큰 이득이 있겠어! 혼연도도 저 혼환귀술도 굉장히 강력해! 반드시 배우고 말겠다!’
눈을 번득이던 한제는 묵직한 살기를 느끼며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체내에서 발산된 도고의 기운이 그의 뒤쪽에 거대한 도고의 허상을 소환했다. 찰나의 순간 실체를 갖춘 듯 또렷해진 이 허상은 오래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얼굴이 한제와 똑같았다.
뒤로 물러나던 한제는 오른손 검지를 뻗어 앞을 가리켰다.
“마도 생사역동(生死逆動)!”
그 손짓에 염란의 표정이 순간 급변했다. 체내의 흘러넘칠 듯했던 생기가 순식간에 사기(死氣)로 변해가는 것을 똑똑히 느낀 것이다. 동시에 허약해진 듯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한제가 마도를 발휘한 순간, 이 세상은 짙은 사기로 가득 찼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대혼문에서 죽어간 수많은 생명에서도 사기가 흘러나와 이 세상을 채웠다.
“우우우우!”
“으아아아!”
대혼문을 뒤덮은 사기에서 혼들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대혼문 장로들은 표정이 급변해 곧장 뒤로 물러났다. 수준이 한참 높은 이들만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 역시 묵직했다.
죽음의 기운은 순식간에 짙게 응집됐고 대지를 빠르게 뒤덮었다. 이에 따라 한제는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다시 한번 포효를 들을 수 있었다.
천우의 포효였다.
천우는 죽은 것처럼 보일 뿐, 사실 죽지 않고 봉인된 상태였다. 그 육신은 대지가 됐고 그 원신은 수많은 생명을 자양하고 있었으며, 그 혼은 짓눌려 있었지만 녀석의 불굴의 의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때 한제가 마도를 발휘하자 대지 깊숙한 곳에서는 하늘을 뒤흔들 법한 죽음의 기운이 폭발했다. 땅을 진동시키며 뿜어져 나온 사기는 안개처럼 대혼문을 뒤덮은 사기와 합쳐져 한제 앞에 거대한 천우를 형성했다.
“캬오오오!”
매섭고 포악해 보이는 천우는 시뻘건 두 눈 가득 죽음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번득이면서 포효했다.
천우의 등장에 대혼문은 발칵 뒤집혔다. 사방의 장로들 중에는 경련하는 이들도 있었고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천우다! 저자가 천우의 형상을 만들어냈어!”
“이건 말도 안 돼!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대혼문 내 가장 깊은 곳, 가장 높은 산봉우리.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이 노인은 청우 진인의 본체였다.
두 눈을 감고 있던 그는 눈을 번쩍 뜨며 드물게도 격앙된 감정을 드러냈다.
“천우를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혼! 선조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맞다! 오래 전, 선조께서 대혼문을 이곳 천우주로 옮겨오신 것도 이 지화 주맥을 봉우리 중 하나로 선택한 것도 모두 그자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지! 천우를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자 동부계에서 온 자! 바로 저자야!”
노인의 눈빛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일렁였다.
“저자는 선강 대륙 사람이 아니라 동부계 출신이다. 선족 구역 72개 주에 봉인된 72마리의 흉수와 매우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 천외에서 온 천우 또한 선강 대륙의 출신이 아니야. 저자도 마찬가지지. 그렇기에 저자는 천우의 혼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던 거야!”
한편, 사기로 이루어진 천우가 나타난 순간, 염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산봉우리
하늘을 향해 포효하던 천우는 곧장 염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염란 뒤에 나타났던 인영도 앞으로 돌진해 순식간에 세 걸음을 내딛었다.
인영의 발이 땅을 박찰 때마다 염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갈수록 강력해지는 위압감이 그 인영에서 발산돼 사기로 이루어진 천우에 대항했다.
콰쾅! 쾅!
천우와 인영이 맞붙기도 전에 그들에게서 발산된 기세가 먼저 충돌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피비린내 어린 살기를 발산하던 인영과 사기로 이루어진 천우 모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 천우는 사실 천우의 의지 일부로 이루어진 존재라 진정한 천우와 비교하자면 발끝도 따라잡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신, 요, 마, 도고무선!”
한제는 중얼거리며 손바닥을 펼쳐 전방을 가볍게 두드렸다. 체내에서 세 고족의 힘이 빠르게 융합하더니 그의 주먹에 녹아들었고 한제는 주먹을 휘둘렀다.
도고무선의 주먹이 뻗어 나가자 한제의 뒤에 나타난 도고도 입을 쩍 벌리고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같이 주먹을 날렸다.
주먹은 허공에 아홉 개의 파문을 일으켰다. 이 파문이 닿은 대지와 하늘은 진동했고 산봉우리와 풀, 나무, 지면의 누각을 비롯해 대혼문의 모든 것은 회색빛으로 물들더니 돌로 변해버렸다.
“큭!”
염란은 한 움큼 피를 토해내며 곧장 뒤로 물러났다. 이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아홉 개의 파문이 염란을 향해 돌진하던 그때, 돌연 누군가의 낮은 호통이 울려 퍼졌다.
“그만! 더는 새로운 장로에게 무례하게 굴지 마라! 파괴된 염맥봉은 내가 따로 보상해줄 터이니 염란 너는 이만 물러가라!”
그 호통과 함께 폭풍 같은 신식 한 줄기가 사방을 에워싸며 도고무선으로 발산된 파문과 충돌했다. 그러자 파문은 층층이 무너져 내리며 흩어져 사라졌다.
염란 역시 그 신식에 튕겨나가 1천 척 이상을 밀려났다.
강력한 신식에 휩싸인 대혼문 장로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사방을 가득 메웠던 어마어마한 격변도 천천히 멈추며 안정을 찾아갔다.
한제와 염란 사이에 강력한 신식과 함께 한 노인이 나타났다. 푸른 옷을 입은 백발노인은 청우 진인의 본체였다.
그의 모습이 또렷한 실체로 응집된 순간, 본원 진신이 나타나 융합하더니 그 뒤에 흐릿한 허상으로 나타났다.
노인의 체내에서 발산되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한제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 기운은 전성기 때의 칠채선존을 훨씬 능가했다.
‘공겁기 후기!’
그는 애써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눈동자가 살짝 졸아드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선조를 뵙습니다!”
대혼문 장로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염란 역시 어둡고 차가운 표정으로도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오직 한제만이 변함없이 덤덤한 얼굴로 청우 진인을 훑어보고 있었다.
“염란, 이 장로는 내가 직접 초빙해온 사람이다. 앞으로 우리 대혼문 장로로서 머물게 될 거야. 네 염맥봉은⋯⋯ 내가 다른 산봉우리를 마련해주마. 또한 장혼각(藏魂閣)에서 사흘간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겠다!”
청우 진인의 말에 염란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방금 전 한제가 보인 무시무시한 모습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선조의 명이 아닌가?
“이 일은 여기에서 끝내라! 이 장로와 관련된 모든 일은 절대 비밀이다. 외부에 유출해서는 안 될 것이야! 이를 어기는 자는 엄벌하겠다!”
청우 진인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며 주위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이내 한제에게 닿았다.
“이 장로 대혼문의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하네.”
청우 진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제 역시 웃음을 머금은 채 청우 진인에게 포권을 하더니 자신에게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처음 방문하는 곳이다 보니 조금 거칠었군. 부디 도우들의 양해를 바라네.”
한제가 먼저 겸손하게 말하자 방금 전 무시무시한 모습을 본 이들은 재빨리 그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해왔다.
“이 장로 축하하네. 이제 우리는 서로 동문이니 서로 돕고 지내세.”
“이 장로의 신통술은 굉장하더군. 우리 같은 수련자 사이에서는 강자가 존경받고 존중받는 법 아니겠나. 방금 일은 모두 이해하네.”
“시간 될 때 송운봉(松雲峰)에 찾아오게. 내 좋은 차를 대접하겠네.”
사방에서 따뜻한 목소리가 이어지자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일일이 포권하며 응대했다.
인사가 끝나자 장로들은 이내 작별을 고하고는 각자 봉우리로 돌아갔다.
곧 그곳에는 한제와 청우 진인, 염란, 그리고 몇몇 제자들만 남게 됐다.
“이 장로 일단 대혼문에서 동부로 삼을 산봉우리를 하나 골라보게. 내 따로 공간을 마련해줄 테니. 대혼문에 익숙해지고 나면 나를 찾아오게. 대혼문 장로에게는 장혼각에 들어갈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니 그곳에 있는 수많은 공법 중 원하는 것을 골라 배우면 돼. 그리고 자네를 위해 아주 오랫동안 준비된 세 가지 선물도 있네. 선조를 대신해 그것들을 주도록 하지.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청우 진인의 말을 통해 염란은 그가 한제를 아주 귀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으나 속으로 냉소했다.
한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염맥봉 쪽을 바라보았다. 당시 붉었던 산봉우리가 지금은 엉망이 된 모습을 본 한제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 그와 염란 사이에는 원한이 없었다. 더욱이 솔직히 말해 상대를 먼저 건드리고 상대의 동부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염란 입장이었다 해도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저는 저 염맥봉이면 충분합니다!”
한제는 색이 바래고 곳곳이 무너져 내린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새로운 동부는 염 장로에게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