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98
얼마 남지 않은 향은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천산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 한제는 한 달 정도 날아야 닿을 수 있을 비취색 산봉우리 상공에 파문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혼연도⋯⋯ 그 술법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확인해봐야겠어!”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상한 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부근에는 적지 않은 생명이 있었지만 딱히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없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산봉우리의 나무를 휩쓸었다. 나뭇잎들이 흔들리면서 쏴아아 하는 청량한 소리가 울렸다.
한데 몸을 돌려 떠나려던 한제가 우뚝 멈춰 서더니 바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말 그대로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한제는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어서 손을 휘둘러 광풍을 일으켰다. 광풍은 대지에 자라난 수많은 나무를 휩쓸고 그 잎들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흔들리는 나무들이 하나의 글자를 형성했다.
이(李)자였다.
한참을 말없이 그 글자를 내려다보던 한제는 기이한 눈빛을 번득이며 몸이 다시 세상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방금 창룡종 근처였다. 그가 첫 번째 자맥의 혼을 흡수하고 두청을 만났던 곳이기도 했다.
한제가 아래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엄청난 충격에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머릿속에서 콰쾅 하는 굉음이 울렸다.
이 대지에는 지화 자맥이 말라버리면서 줄기줄기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한데 그 균열들은 뚜렷한 두 글자를 이루고 있었다. 그 두 글자는 바로 ‘한제’였다.
‘아까 그 글자가 나타난 곳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곳이야. 그런 글자가 나타난 현상을 설명할 방법은 아주 많다. 허나 분명 이곳에는 글자 따위 없었어!’
두 글자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한제는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이곳에 일어난 균열이 그가 당시 자맥을 흡수할 때 생겨난 것임을 이후에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놓은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균열들은 자연스레 발생한 것이었다.
한제는 다시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고 알 수 없는 천우주 어느 지역 상공에 나타났다.
그는 신식을 펼쳤지만 이곳의 대지에서는 아무런 글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저 아래로는 그저 평범한 강만 한 줄기 흐를 뿐이었다.
한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한제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다시 내려다보니 흐르는 강에는 너무 오래돼 거의 쓸 수 없게 된 돌다리가 하나 있었다. 어찌나 오래됐는지 세월을 가늠할 수조차 없는 다리는 물가에 연결된 부분만 겨우 남아 있었는데 그 옆에는 흐릿한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하나 박혀 있었다. 이 돌다리의 이름을 새긴 비석인 듯했다.
몸을 훌쩍 날려 비석 옆에 이른 한제는 그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또다시 경련을 일으켰다.
“귀래교(歸來橋)⋯⋯.”
이한제 귀래(歸來)!
‘이한제, 돌아와라’라는 뜻이었다.
그 다섯 글자가 마치 천둥번개처럼 번득이며 심신에서 울렸고 한제는 망가진 다리 옆에서 덜덜 떨리는 몸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갔고 두 눈에서 천천히 서늘한 빛이 흘렀다.
“재미있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점술이라, 정말 흥미로운 신통술이야. 대혼문이 정말 나와 무슨 연이 있는 건가?”
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인은 이 정도면 됐다. 대혼문의 청우 진인도 그가 말한 강력한 선조도 내가 대혼문을 방문해 지화 주맥을 흡수할 거라는 사실을 예측했다. 그 사실을 알고 그곳에서 날 기다렸다면 그것은 어떻게든 나와 연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는 뜻이지.”
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미소를 지었다.
“그런 예측에서 벗어나기는 쉬워. 허나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대혼문은 나를 장로로 삼고 싶어 하고 나는 그런 대혼문을 통해 선강 대륙을 더욱 많이, 더욱 잘 알 수 있는데 말이야.”
한제는 발아래 나타난 파문과 함께 사라졌다.
★ ★ ★
천산에는 지치지도 않고 푸른 눈이 내리고 있었다. 햇빛에 비칠 때마다 푸른빛으로 번득이는 눈에서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은 듯한,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 풍겼다.
그 눈 속에 가부좌를 튼 청우 진인의 백발은 불어오는 바람에도 한 가닥조차 휘날리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푸른 눈이 응집해 형성된 향이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타들어 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돌연 천산 위에서 푸른 눈이 빠른 속도로 한데 응집되더니 회오리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제가 걸어 나왔다.
그가 눈 쌓인 산 정상에 내려선 순간, 향은 다 타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돌아왔구나.”
청우 진인의 본원이 두 눈을 뜨며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바로 혼연도의 공법이다.”
그 말과 함께 청우 진인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어스름한 빛이 번쩍이며 나타나더니 그의 손에 보라색 옥패가 쥐어졌다. 아주 오래된 물건인 것 같았다.
청우 진인은 한제의 선택은 묻지도 않은 채 손을 휘둘렀다. 보라색 옥패는 휙 하고 한제를 향해 날아갔다.
한제는 손을 뻗어 옥패를 받더니 살짝 훑어보고는 덤덤한 얼굴로 그것을 거두었다.
“가자 대혼문으로.”
청우 진인은 몸에 쌓인 푸른 눈을 살짝 털어내더니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자 길이가 3척 정도 되는 구름이 그의 발아래에 나타났다. 수증기가 아니라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기단(氣團)처럼 보이는 그 구름에 올라탄 청우 진인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한제는 축지성촌을 발휘하는 대신 긴 빛을 그리며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멀어져갔다.
대혼문에는 여러 개의 주봉(主峯)이 있었다. 지화의 주맥과 연결되어 있던 붉은 산봉우리는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 봤을 때 볼 수 있는 높은 산들 중에는 안개로 휩싸인 채 음산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산들은 거대한 귀신 얼굴로 휩싸여 있기도 했다. 귀신 얼굴이 내지르는 소리 없는 포효는 파문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대혼문을 구성하고 있는 주봉은 360여 개였다. 이런 주봉과 주봉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멀기도 했고 어떤 것은 꽤나 가깝기도 했는데 모두 화려한 누각과 대전, 광장 그리고 여러 개의 동굴이 있었다.
대혼문의 10만 제자는 이렇게 거대한 종파 안에서 지내며 여러 가지 신통술을 익혔다. 대혼문에는 다양한 신통술이 있는데 그중에는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낸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구한 세월 동안 다른 종파와의 쟁탈전을 통해 빼앗은 것이 더 많았다.
이때 염맥봉은 색이 완전히 바뀌어 더 이상 붉은색이 아니라 어두운 보라색이었다. 곳곳에 균열이 일거나 무너져 내린 부분도 있어서 퍽 볼썽사나웠다.
이 산봉우리의 주인인 염란은 안색이 매우 어두웠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된 상태였다. 억눌러둔 어마어마한 분노는 언제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천우의 사혼(死魂)
한제와 청우 진인이 저 먼 곳에서 다가온 순간, 염란은 서늘한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온몸에서 강력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염맥봉의 모든 제자는 들어라. 이 스승을 따라 우리 산봉우리를 파괴한 도둑놈을 죽여라!”
말을 마친 염란은 긴 빛을 그리며 돌진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열 명이 넘는 핵심 제자가 따랐다. 그중에는 반산로와 반산몽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여인으로만 구성된 그들은 봉황과 같은 대형으로 대혼문 밖에서 막 날아오고 있던 한제와 청우 진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대혼문 근처에 이르렀을 때, 청우 진인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미간을 팩 구겼다.
한제는 그의 표정이 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 마리의 거대한 봉황 허상이 대혼문에서부터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황의 머리에는 여인이 있었다. 무척 아름답지만 온몸 가득 살기를 번득이는 그녀는 지화 주맥 깊은 곳까지 한제를 추격해왔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도둑놈! 우리 산봉우리를 파괴하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염란 정도 되는 수련자라면 대혼문의 선조가 지금 한제를 손님으로 모시는 중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조라 해도 설명을 해야만 할 터였다. 염란도 대혼문의 장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염란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똑똑하기도 했다. 혼자가 아니라 핵심 제자들과 함께하는 상황에서 선조가 한제를 보호하려 든다면 그것은 일맥을 포기하고 배신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제자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염란은 더 이상 대혼문에 남아 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염란은 배수의 진을 친 셈이었다.
또한 염란은 봉황의 허상까지 소환한 상태였다. 이 허상은 매우 거대했고 강력한 위압감을 발산해 대혼문 안에 어마어마한 기세를 퍼뜨렸다.
이는 선조인 청우 진인이 아니라 나머지 주봉의 장로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와 친분이 있는 몇몇 장로는 그 봉황 허상의 기운을 느끼자마자 자신의 산봉우리에서 나오기도 했다.
염란은 대혼문의 모든 이에게 자신의 행태를 똑똑히 보이려 했다. 게다가 그녀는 대혼문의 편에 서 있으니 선조라 해도 자신을 함부로 어쩌지는 못할 터였다. 짧은 시간에 이런 결정을 내리고 행동에 나선 것을 보면 그녀는 과연 만만치 않은 인재였다.
그녀가 달려들자 대혼문 주봉 중 몇 곳에서 강력한 기운과 함께 인영들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나타난 이들의 수준은 공령기에서 공겁기 초기까지 다양했다.
“감사합니다. 선조께서 이 염란을 위해 직접 그 도둑놈을 잡아 오셨군요. 이 쥐새끼 같은 놈, 이번에는 어떻게 도망치는지 보자!”
염란은 한제를 향해 몸을 훌쩍 날렸다. 그녀는 봉황의 머리가 된 상태로 그 거대한 부리는 지금 한제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공겁기 초기 수준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수준은 불안해 언제라도 쇠락해 버릴 듯했다. 한제와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은 그녀는 엉망이 된 산봉우리의 모습에 분노해 치료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제는 눈빛을 번득였고 물러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대혼문의 장로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단을 내린 한제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오른손을 들더니 주먹 쥔 손으로 허공을 강타했다.
“신진!”
한제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우렁찬 소리와 함께 대대적인 왜곡이 일어났다. 이 왜곡은 곧 거대한 회오리로 변해 빠르게 회전했다. 그로 인해 세상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았지만 오직 한제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회오리가 나타나 온 세상을 회전시킨 순간, 봉황이 된 염란 역시 그 기세에 이끌려 왜곡을 일으켰다. 이내 봉황의 허상은 회오리에 빨려 들어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당시 한제가 이 신통술을 사용해 맞섰던 전가 노인 역시 공겁기 초기의 강자였다.
신진의 위력이 발휘된 순간, 사방에서 다가오던 대혼문 장로들의 표정이 분분히 급변했다.
염란의 두 눈동자도 바짝 졸아든 상태였다. 분명 한제와 이미 맞붙은 적이 있지만 상대가 이런 신통술을 발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도고의 기운이다! 고국 수련자야!”
청우 진인은 한제가 동부계에서 왔다는 사실도 그가 도고의 혈맥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를 숨길 필요도 없었고 그 위력을 드러냈을 때의 후폭풍 또한 청우 진인이 수습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기에 한제는 도고의 혈맥임을 숨기지 않았다.
청우 진인은 골치가 아픈 듯 속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살짝 흔들었다. 순간 어마어마한 힘이 일어나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한제가 발휘한 도고의 기운을 뒤덮었다. 그러자 그 범위 밖에 있는 이들은 더 이상 그 기운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
“요술, 봉화성산!”
허공에 꼿꼿이 선 한제의 백발이 휘날렸다. 그는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뻗었던 주먹을 거두어 손바닥을 펼치더니 다시 크게 휘둘렀다.
염란이 소환했던 봉황의 허상이 눈 깜짝할 사이 무너져 내린 이때, 왜곡된 세상에서 줄기줄기 봉화가 튀어나와 한제를 에워쌌고 여덟 개의 거대한 연기 기둥을 형성했다.
“끼야아아!”
연기 기둥 안에서는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마치 폭풍처럼 한제의 주위를 맴돌다가 곧장 염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염란이 그 폭풍에 휩싸인 순간,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이 광경에 대혼문 장로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중하게 변했다. 한제의 신통술과 기세는 너무도 강력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순수한 고도의 신통술이야! 고도의 신통술은 대부분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개를 중첩시켜 발휘되다가 마지막에 어마어마한 힘을 폭발시키지.”
“고국 수련자는 육신의 힘이 어마어마하지. 저자 또한 그럴 터! 한데 저런 자를 선조께서는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