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03
“아직은 내가 쓸 데가 있으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꼭 돌려주지.”
말을 마친 한제는 다시 활을 거두었다.
이씨 가문의 노인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상대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한제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신분이라면 약속 따위 하지 않아도 될 터.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언을 한것은 약속을 지킬 마음일 테니까. 더욱이 원래 이씨 가문의 것이었다 한들 지금 가진 자는 한제였으니 상대가 주지 않기로 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한제는 노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허이국이 조성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의 기억을 되찾아주는 것은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그전에 그는 이부에 머물면서 전각 안에서 전도를 확인하고 살펴볼 생각이었다.
유금표도 내심 기뻤다. 한제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자신 역시 이곳에서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을 테니까.
★ ★ ★
눈 깜짝할 사이 사흘이 지나갔다. 사흘째 되는 날 오후, 이부 상공에 돌연 대량의 파문이 일더니 그 안에서 강력한 위압감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뒤이어 이부를 뒤덮은 그 위압감에 이씨 가문 사람들이 곧장 튀어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공의 파문에서 번득이는 금빛과 함께 나타난 것은 푸른 옷을 입은 고고한 표정의 사내였다.
“이한제는 어디 있느냐? 속히 나와 황제의 칙령을 받으라!”
두루마리 하나를 손에 쥔 그는 이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데 이부 깊은 곳의 전각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읽거라.”
이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목소리에 선황의 사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멍하니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았다. 선황의 칙령을 가지고 온 사자는 선황과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법인데 상대는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이…”
사자는 분노한 듯 이를 갈았으나, 잠시 망설이다가 속으로 차게 코웃음을 치고는 두루마리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제법 긴 서신이었으나 요약하자면 7일 후 이른 아침 황궁 선도전(仙道殿) 앞에서 책봉식이 거행된다는 것뿐이었다.
한제는 자양종에서 모든 약천존은 선황으로부터 책봉을 받는데 그것은 일종의 형식이자 상징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또한 책봉식이 거행될 때 다른 이들로부터 도전을 받을 수 있는데 지금까지 그런 도전은 대부분 무시됐다고 했다. 약천존 수련자는 선조의 천존열을 통해 인정을 받은 만큼 굳이 도전을 통해 실력을 내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자는 칙령을 모두 전할 때까지도 한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불쾌한 듯 두루마리를 홱 내던지고 떠나버렸다.
‘책봉식에서 연도진은 또 무슨 수작을 부릴까? 어쨌든 그곳에서라면 광인… 연도비를 볼 수 있겠지.’
한제는 말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이미 동성 전역을 신식으로 살폈으나 연도비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 ★ ★
조성 정중앙, 선족 황궁.
이른 아침, 저 멀리 하늘 끄트머리에서 퍼져 나온 첫 햇살이 어둠을 물리치며 황궁을 밝혔다. 황궁 대전 앞에는 조성 곳곳에서 온 명망 있는 선족 수련자와 황성의 중신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백발 약천존의 책봉 소식이 지난 7일 동안 온 조성을 휩쓸면서 조성 각 가문 수련자들이 선황의 동의를 얻어 일제히 황궁 선도전 앞의 거대한 광장에 모여든 것이다.
날이 완전히 밝았을 무렵 광장에 모여든 수많은 수련자의 수는 적어도 수만 명에 달했다. 대부분 수준이 매우 높았고 천존 수련자는 물론 약천존도 몇 명 있었다. 이들은 황궁에서도 매우 극진하게 대접받았다.
황궁 밖으로 통하는 전송진은 매우 바쁘게 가동되고 있었다. 전송진은 쉴 새 없이 번득였고 그때마다 수련자들이 걸어 나왔다.
이들은 아홉 개의 문을 통해 선도전 앞 광장으로 빠르게 모여들어 순서와 차례에 따라 가지런히 도열했다.
그중에는 사방 1천 척 정도의 공간을 차지한 세 개의 자리에는 조성 4대 왕 중 세 명이 있었다.
한편 선도전 앞 광장에는 흑갑을 두른 금병(禁兵)도 두 부대나 있었다. 황족에 속한 이들은 오직 선황에만 충성하는 세력으로 모두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단 십만 명에 불과함에도 그 살상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군대였다. 이들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두 마리의 검은 용을 연상케 하는 검은 갑옷 차림의 금군이 두 줄로 도열한 채 싸늘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루고 있는 두 줄은 광장을 가르고 아홉 개의 문밖에까지 확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도전 앞 광장의 문 아홉 개는 각각 10만 척 간격이었다. 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문처럼 생긴 건물에 가까운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검은색이었고 짙은 위엄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문들의 끄트머리 돌문 밖 전송진으로부터 나타난 이씨 가문 사람들이 아홉 개의 문을 통해 광장 안에 이르렀다.
“시간이 다 됐다! 문을 닫아라!”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 앞 선도전에서 푸른 옷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평범해 보이지만 두 눈이 밝게 번득이는 노인은 대전 밖으로 나와 전방을 한 번 훑어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광장에 이르러 있던 조성 수련자 수만 명의 시선이 일제히 아홉 개의 문으로 향했다.
뒤이어 십만 금병이 입을 모아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하면서 바람과 구름이 휘몰아치더니 아홉 개의 문이 기이한 검은색 빛을 번득였다. 이 빛은 점점 짙어지더니 확산돼 하나로 연결됐고 이에 선도전 앞 광장에는 아홉 개의 빛으로 이루어진 한 줄기 곧은 통로가 생겨났다. 허상의 검은 빛과 십만 명에 달하는 금병들의 몸으로 이루어진 통로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수만 명의 수련자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이 검은 빛으로 이루어진 통로와 첫 번째 문밖에서 번득이는 전송진의 빛을 바라보았다.
밝은 빛을 번득이던 전송진에서는 이내 백의백발의 사내가 덤덤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전송진 앞에 선 채 뒷짐을 진 한제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맑은 아침 바람에 살짝 날렸다. 덕분에 그의 모습은 한층 더 여유로워 보였다.
청년 같은 외모와 달리 그에게서는 세월의 흐름이 깊게 느껴졌다. 그 얼굴에서도 알 수 없는 피로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아홉 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검은 통로 너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만 명의 수련자와 그 뒤로 웅장하게 솟은 거대한 궁전을 보았다.
그 궁전 뒤로는 비슷한 궁전들이 수도 없이 중첩되어 있었다. 그 모든 건물들이 다 선황의 황궁을 구성하는 것이다.
실로 거대한 궁전이라 그 끝을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한제는 이곳에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난 금제가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그 금제는 가동되지 않고 있었지만 만약 일단 가동되면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터였다.
‘이곳이 바로 선황의 황궁이로군.’
어느새 한제의 시선은 황궁 안,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흐릿하게 보이는 어느 석상에 닿았다. 석상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백발 약천존 이한제!”
냉랭하면서도 위엄 어린 목소리가 선도전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지며 상념을 방해하자 한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선도전에서 걸어 나온 청의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아홉 개의 문 너머에 선 한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한제, 모든 약천존 수련자는 선황 폐하로부터 책봉을 받는다. 허나 책봉을 받기 전 한 차례의 시험을 치러야 하지. 바로 이 아홉 개의 문을 건너오는 것이다. 아홉 개의 문을 모두 지나 내 앞에 이르면 책봉식은 정식으로 시작된다! 그럼 선황 폐하께서 친히 너를 책봉하실 것이고 국사께서 네 미래를 예측해주실 것이다!”
노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지금 이곳의 모든 상황은 황궁의 진을 통해 송출되고 있다. 선족 구역 72개 주 곳곳의 각 종파에서도 보고 있음을 명심해라!”
청의의 노인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뒤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광장의 네 왕을 포함한 모든 수련자는 한제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한제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이씨 가문의 약천존 노인에게서 모든 약천존이 책봉식을 정식으로 거행하기 전 아홉 개의 문을 건너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허나 그것은 상징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약천존은 이미 선조가 만든 천존열 시험장을 통해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아홉 개의 문은 황권의 상징일 뿐, 실질적인 힘은 없기에 아무런 문제없이 지나칠 수 있다고 했다.
한제의 눈은 아홉 개의 문 너머 두 마리의 용처럼 진열해 있는 흑갑의 금병들에게 닿았다. 각 금병은 갑옷 안에 얼굴을 숨긴 채 서늘한 눈빛으로 한제를 응시하고 있었다.
허나 한제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행동할 예정이었다. 저 아홉 개의 문이 평범한 문이라면 괜찮겠지만 그 안에 다른 위험 요소가 있다면 그로서도 고분고분할 이유가 없다.
이내 한제는 발을 내딛어 첫 번째 문으로 향했다. 빠르지 않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겨 첫 번째 문 안에 발을 들인 순간, 10만 명의 금병이 돌연 일제히 낮은 기합을 내질렀다.
“핫!”
그 낮은 기합에는 하늘을 쪼갤 듯 짙은 살육의 기운이 어려 있었는데 금병들의 몸에서 확산돼 하나로 응집하더니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을 이루어 한제에게로 돌진했다.
쾅!
10만 금병의 살기로 이루어진 살육의 기운은 그들의 갑옷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때 단단히 응집된 살육의 기운 때문에 한제에게는 눈앞에 있는 것이 아홉 개의 문이 아니라 한 명의 살선(殺仙)으로 느껴졌다.
한제는 미간을 한 번 더 찌푸렸다.
‘수준이 아니라 살기를 시험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참지 않겠다.’
그는 번득이던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번쩍 떴다. 동시에 체내의 천둥번개 진신이 살육 천둥번개의 위력을 발산했다.
이 힘은 한제로부터 1천 척 거리에만 미칠 뿐이었지만 그 안에 천둥번개의 위력이 확산된 순간 아홉 개의 문에서는 콰르릉 하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은 통로는 그 힘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순간 뒤로 1백 척이나 밀려났다.
허나 한제는 멈추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그가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를 중심으로 반경 1백 척 범위에서는 살육의 기운도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이에 검은 통로는 끊임없이 뒤로 밀려났다. 동시에 그 안의 금병들은 충격에 휩싸인 눈빛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마치 한제의 몸에서 피어오른 강력한 기운에 싸워보지도 않고 굴복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1천 척, 1만 척, 10만 척! 한제는 어느새 10만 척을 뛰어넘은 상태였고 그의 뒤로는 돌문 하나가 조용히 서 있었다. 또한 앞에 놓인 여덟 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검은 통로는 끊임없이 밀려나고 있었다.
선황이 하사한 보물
10만 척 뒤로 물러난 검은 통로 안의 금병들은 또다시 우렁찬 기합을 내질렀다. 이에 검은 통로는 대대적으로 확산되면서 한 마리 검은 호랑이로 변했다. 이 호랑이는 거칠게 포효하더니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러나라!”
한제는 천우의 혼 문양을 온몸으로 퍼뜨리며 어딘가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온몸을 뒤덮을 듯하던 혼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꽝!
다음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호랑이의 허상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여덟 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검은 통로 역시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고 10만 금병 역시 피를 토하며 튕겨나갔다. 허나 목숨을 잃은 자는 없었다.
한제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졸아들었다. 그는 금병들의 갑옷을 힐끗 살피더니 한 걸음 나서며 10만 금병과 남은 여덟 개의 문을 단숨에 뛰어넘어 선도전 앞, 놀란 표정으로 물러나 있던 청의의 노인 앞에 이르렀다.
“너도 물러나라!”
한제는 노인을 매섭게 노려보며 외쳤다.
청의의 노인은 광장의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더니 스스로도 당황했고 곧 얼굴이 파랗게 질린 그는 치밀어오르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꼈다.
다음 순간, 노인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는 한제가 선역 전 구역으로 모든 것이 송출되는 자리에서 감히 자신을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손가락질을 하며 호통을 치려 했다.
“이…”
하지만 노인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한제가 노인의 옷자락을 움켜쥐더니 휙 내던진 것이다.
“어억!”
노인은 거대한 손바닥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을 내지르며 수십만 척이나 나가떨어졌다.
“선황 폐하를 뵙습니다.”
그 사이 선도전 앞에 이른 한제는 포권을 하며 대전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이곳은 황궁이고 상대는 선황이자 대천존이니 공손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