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47
시음종의 노인은 머리가 쭈뼛해지는 것을 느끼며 들고 있던 여인의 시체를 아래쪽으로 집어던졌다. 노인은 여인의 시체 하나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버릴 마음은 없었다.
주일은 여인의 시체를 끌어안고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아, 누구도 다시는 내게서 널 가져갈 수 없다. 누구도⋯⋯.”
그 무렵, 땅과 하늘의 붕괴는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곳곳에 공간의 균열도 점점 늘어만 갔다.
그때, 지금껏 홍접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한제가 눈을 번득이며 외쳤다.
“지금이다!”
한제는 번개처럼 날아올라 홍접에게 돌진했다. 치호는 그 광경을 보고 경악했으나, 막을 수도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도망치는 것이 가장 급했다.
한제와 홍접 사이의 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3백 척 정도로 줄었다.
홍접의 얼굴은 크게 변했다. 가장 강력한 법보가 사라진 데다가 체내에도 숨겨진 부상이 있어서 경지가 화신기 후기에서 뚝 떨어진 상태였다.
그녀는 두려움에 외쳤다.
“천우, 네가 날 죽인다면 주작국에서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하! 홍접,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 하늘의 딸답지 않은 언사로구나.”
한제는 웃으며 저물대에서 금번을 꺼내 흔들었고 그러자 금제들이 쏟아져 나와 흉악한 용으로 변했다.
“응축!”
한제의 호령에 따라 그 금제들은 한데 뭉치더니 검은색의 긴 창이 됐다. 한제는 그것을 손에 쥐고 홍접에게로 성큼성큼 향했다.
“홍접, 나와 붙어보지 않겠는가!”
한제는 마치 절대자처럼 손에 쥔 창을 앞을 향해 내던졌다.
쉭!
한제는 한 번에 3백 척을 뛰어넘었고 금제로 이루어진 창은 홍접의 머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놈이 정말 미쳤구나! 지금이 아니면 이 무너져 내리는 선계의 조각에서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홍접은 잔뜩 구겨진 얼굴로 얼른 저물대에서 하얀색 비검을 꺼내더니 허겁지겁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피할 수도 순간이동을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무런 방어 태세를 갖추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사방팔방 공간의 균열이 가득했다. 그 안으로 들어간다면 성라반(星羅盤)이 있지 않은 이상 원신을 태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펑!
하얀색 비검이 갈라져 조각으로 무너져 내리며 수많은 공간의 균열 안으로 사라졌다. 한제의 긴 창도 대폭 줄어들었지만 그 기세만큼은 더욱 맹렬해졌다.
“내 목숨이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너를 죽이고 도망쳐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한제는 크게 웃으며 말했지만 몸은 약간 떨려오고 있었다. 홍접의 절정(絶情)의 경지가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경지의 힘은 지금의 한제로서는 막을 수 없었다. 허나 잠시 버틸 수는 있었다. 그 안에 홍접을 죽이기만 한다면 경지도 자연히 무너지게 되어 있다.
홍접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한제를 죽이려 든 그녀를 살려둔다면 앞으로도 적지 않은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이를 악문 홍접은 긴 창이 번개처럼 달려드는 순간 오른손을 들어 손목의 백옥 팔찌로 그 끝을 막았다.
팅!
한제의 긴 창은 다시 무너져 내려 수많은 금제로 흩어졌다. 다시 응축시킬 수도 없었다. 강렬한 경지의 힘이 한제를 옭아매고 정신을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제의 마음은 매우 견고했다. 그의 자질은 부족할지 모르나 마음의 굳건함은 주작성 전체를 통틀어도 그보다 높은 자가 드물 정도였다. 심지어 어릴 적, 어떤 법술도 익히지 못했던 당시에도 대산파의 등산 시험에서 그 강렬한 의지로 인정을 받지 않았던가? 여기에 4백 년 이상 각종 수련을 거쳐 온 지금 그의 심지는 마치 무쇠처럼 강력하고 견고했다.
한제는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들어 아홉 개의 나무 조각상을 꺼냈다.
“세월!”
아홉 개의 조각상이 진동하더니 수많은 피의 경맥이 흐르는, 같은 모습의 사람으로 변했다. 한 줄기 세월의 경지가 하늘에서 강림했다.
그때 백옥 팔찌로 막아내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홍접은 한참 뒤로 밀려나서는 바들바들 떨며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이 무렵, 선계의 조각이 무너져 내렸고 곳곳이 허무에게 삼켜졌다.
“난 주작성의 핵심 제자다. 날 죽인다면 천우 네놈도 결코 편안히 눈을 감지는 못할 것이야!”
홍접은 두려움에 질려 뒤로 물러났고 그와 동시에 세월의 경지가 아홉 개의 나무 조각상에서부터 확산됐다. 홍접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세월의 경지!”
한제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뻗어 나무 조각을 하듯 앞으로 휙 그었다.
세월의 경지 아래, 홍접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별다른 영향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숨통을 죄는 사슬로 작용했다.
홍접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오른손을 들며 기이한 저주를 중얼거렸다.
순간, 그녀의 백옥 팔찌에서 눈부신 빛이 튀어나오면서 세월의 경지가 무너져 내렸다. 한제는 손가락으로부터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마치 한 동굴에서 선검을 만졌을 때 느꼈던 것 같은 통증이었다.
“천우, 나의 경지를 한 단계 하락시켜 이 일원개태(一元開泰) 팔찌를 활성화하도록 만든 네놈을 기억하겠다. 주작성에서 다시 보자!”
홍접의 목소리에서는 짙은 원한이 느껴졌다.
일원개태 팔찌가 발하는 하얀 빛들은 한데 교차되어 홍접의 뒤편에 거대한 검은 구멍을 이루었다. 그녀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뒤로 물러나 검은 구멍 쪽으로 날아갔다. 그 안쪽에는 제단 같은 곳이 언뜻 보였는데 그곳은 주작성이었다.
일원개태 팔찌는 주작국이 당시 선계에서 얻은 것으로 그 신통함은 놀라웠다. 그 자체로 신통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계 어느 곳에서든 그 팔찌의 주인을 안전하게 복귀시키는 기능도 있었다. 홍접이 두려울 것 없는 태도를 고수한 이유도 그 덕이 컸다. 다만 그 팔찌를 활성화시키는 대가가 너무 컸다. 홍접의 수준은 화신기 중기로 떨어져 버렸다.
한제는 자신의 몸으로 들어온 절정의 경지를 여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홍접이 달아나는 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었다. 일단 도망친다면 한을 품은 홍접은 언젠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터였다.
“홍접, 이게 뭔지 봐라!”
한제가 소리쳤다.
번쩍 들어 올린 그의 오른손에는 깃털이 두 개 밖에 남지 않은 부채 하나가 들려 있었다.
부채를 향한 홍접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발걸음도 멈춘 상태였다.
“사저의 부채!”
한제는 아주 잠시라도 홍접의 발을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멈칫하는 홍접을 보며 한제는 절정의 경지를 애써 참아내면서 손에 든 부채를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원신이 정수리로부터 솟아올랐다.
그의 원신은 정수리 밖으로 나오자마자 앞으로 튕겨나가더니 부채를 잡고 깃털 하나를 떼었다. 떨어져 나간 부채의 깃털은 곧장 타오르면서 한제와 똑같은 검은색 그림자로 변했다. 다만 이 검은 그림자의 얼굴 부위는 이목구비가 없이 그저 어둠으로 덮여 있을 뿐이었다.
그때, 한제의 원신이 소리쳤다.
“폭발!”
쾅!
검은 그림자가 미친 듯이 폭발하며 발휘한 강력한 기운이 모두 홍접을 향해 달려들었다.
홍접은 안색이 변해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이미 검은 구멍 안쪽으로 들어선 상태였다. 바로 그 순간, 한제의 원신이 그녀에게 돌진했다.
“도망칠 수 없다!”
한제는 오른손을 뻗어 매섭게 움켜쥐었다.
홍접은 반항하려 했으나, 그때 검은 그림자가 폭발하며 일으킨 충격이 들이닥쳤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한 움큼의 선혈을 토해냈다. 이때, 한제의 손은 이미 그녀의 앞에 당도해 있었다.
한제 역시 필사적이었다. 원신이 육신을 떠날 경우 위해를 입을 수 있음은 한제도 알고 있었다. 허나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의 손은 한 줄기 살기(煞氣)를 풍겼다.
홍접은 오른손을 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한 덩어리의 하얀색 빛이 체내에서 발산됐다. 그 빛은 원신에게 상당한 위협이 됐다. 한제는 홍접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원신이 빠르게 약해짐을 느꼈다.
휙!
한제가 손을 움켜쥐자 붉은 빛이 번쩍이면서 홍접의 오른팔이 피로 물들며 뜯겨 나갔다. 한쪽 팔을 잃은 홍접은 창백해진 얼굴로 두 눈을 감고 검은 구멍 깊은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깊은 구멍은 빠르게 맞물려갔다.
한제는 속으로 한탄했다. 원신은 이제 깃털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부채를 쥐고 빠르게 그의 육신으로 돌아왔다. 검은 구멍이 완전히 맞물렸을 때에는 그의 체내로 복귀한 상태였다.
가르침을 바라는 자는 아침에 나고 저녁에 죽는다
“화신기 후기 수련자를 죽이기란 과연 어렵군.”
한제는 홍접의 팔과 부채를 챙긴 뒤 입구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그는 사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을 썼다. 심지어 홍접은 영혼으로 연결된 법보인 장미를 잃고 몸도 가장 약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허나 이 팔이 있으니 다양한 방법으로 상대에게 저주를 걸 수 있지. 그럼 홍접의 경지는 영원히 화신기에 머물러 있으리라!”
게다가 그녀의 경지가 떨어졌으니 자신이 화신기 중기에 이르기만 한다면 그녀를 얼마든지 당해낼 자신이 있었다.
한제는 긴장이 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둘의 결투는 사실 단 몇 초에 불과했으나, 한제는 기력이 쇠하는 것을 느꼈다.
“이런 미친놈 같으니라고!”
그때 여인의 시체를 내던진 시음종의 노인이 욕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전방의 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갑자기 우르릉 소리와 함께 입구가 붕괴했다. 노인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붕괴하는 입구를 바라보았다. 치호 역시 노인과 같이 낭패한 표정이었다.
한제는 상공의 입구가 붕괴되는 것을 보자마자 몸을 돌려 지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곳은 여러 개의 조각이 중첩된 곳이었다. 올라갈 수 없다면 아래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주일과 노인이 결투를 할 때 신식으로 주위를 몰래 훑어본 끝에 한 군데를 찾아낸 상태였다.
그는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아래 지면으로 돌아와 아직 붕괴되지 않은 깊은 구덩이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음종의 노인 역시 몸을 돌려 신식으로 사방을 훑더니 한제가 들어간 구덩이로 향했다. 치호는 저물대를 더듬어 그 안의 성라반(星羅盤)을 만져보았다. 너무나 심하게 망가져 사용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 완전히 회복된 상태도 아니었다. 이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얼른 노인의 뒤를 쫓았다. 일단 목숨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정아, 보아라. 널 빼앗으려던 자가 도망치려 한다. 내가 말했지? 누구든 널 빼앗는 자는 죽이고 말 거라고… 내 생명을 불태워 저자를 죽이고 너와 함께 이 공간에서 소멸하겠다. 한데⋯⋯ 이상하게도 네게서 생소한 느낌이 드는구나. 뭔가가⋯⋯ 정아.”
여인의 시체를 끌어안은 주일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여인의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미간을 구겼다. 그러더니 여인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시음종 노인을 뒤쫓았다.
한제는 구덩이에 진입한 뒤 빠르게 아래로 향했다. 점점 세 번째 조각이 붕괴하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시간이 흐르다보면 다른 모든 조각에도 여파가 미치겠지만 일단 지금 당장 이곳은 안전할 것이다.
“이곳을 빠져나갈 유일한 방법은 치호의 성라반이다!”
한제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중얼거렸다.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가던 한제는 갑자기 전방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번득이며 곧장 빠져나가지 않고 돌벽에 붙어 섰다.
몇 초 후, 시음종 노인의 인영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는 한제의 곁을 스쳐가던 순간 우뚝 멈추더니 가볍게 코웃음을 친 뒤 곧장 구덩이를 빠져나갔다.
뒤이어 치호가 내려왔다. 그 역시 한제를 보더니 우뚝 멈추었다. 한제는 곧장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치호,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하네. 우선 시음종의 저 노인을 조심하세.”
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거의 동시에 구덩이 밖으로 나간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