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60
주작국 동부. 검은 안개로 뒤덮인 곳에서는 일조와 운작, 삼조, 그리고 두 명의 십엽(十葉) 술주사가 가부좌를 틀고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 미간에서는 식물이 하나씩 요사스럽게 번득였고 중앙에는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두개골이 하나 놓여 있었다. 강대하고 불가사의한 기운이 잔뜩 응집되어 있는 두개골이었다.
“허조(虛祖)는 우리 부문성의 원고 신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십일엽을 돌파해 우리 선유족 역사상 세 번째로 십이엽(十二葉) 술주사가 됐지. 그의 두개골에 새겨진 문양에는 신력(神力)이 있어. 다 함께 제를 올리면 한 사람을 주작묘 안에 들여보낼 수 있을 걸세!”
운작은 숭상하는 표정으로 두개골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가지?”
일조의 물음에 삼조가 평소의 간드러지는 웃음이 아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일조께서 가시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일조의 육신은 선유족 가장 아래층에 있으니 주작묘에서 어떤 영향을 받을지 확신할 수 없어요. 그러니⋯⋯.”
한데 삼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맹렬히 고개를 들어 주작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천천히 기이한 표정이 드러났다.
“제가 깨우쳤던 경지가 몸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요!”
운작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당시 깨우쳤던 그 음사(淫邪)의 경지를 말하는 건가?”
삼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경지죠. 그 경지가 육신을 차지한다면 저에게서 벗어나 그 자체로 온전해질 텐데 제가 어찌 그렇게 둘 수 있겠어요? 제가 분리해냈던 그 경지가 사라지지 않고 어느 수련자의 손에 들어갔더군요. 그 수련자가 지금 주작묘 안에 있는 모양이에요. 지금 그 경지를 멸할 수는 없지만 약간의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요. 육신을 차지하려 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그 작은 변화만으로도 그 경지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될 거예요.”
말을 마친 삼조는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순간 그녀의 이마에 있던 식물이 기이하게 요동치더니 수많은 문양이 쏟아져 나와 허공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 ★ ★
한제는 제단에 진입하자마자 그 제단으로부터 전송의 힘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내부로 들어가려 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류미의 얼굴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에서 분홍색 안개가 방출됐고 매희가 비명을 지르며 순간 튕겨져 나갔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내 근원과 같은 힘이 어디선가 내 작업을 방해하고 있어. 어떻게⋯⋯.”
류미의 체내로 들어가 그녀의 경지를 파괴하려던 그때, 매희는 갑자기 혼백 깊은 곳으로부터 통증을 느꼈다. 이 통증으로 인해 그녀는 순간적으로 어떤 신통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때 류미의 경지에 밀려 밖으로 튕겨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 류미가 두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이한제! 나의 마지막 환술을 상대하기 전까지 너는 절대 도망치지 못한다.”
류미의 외침이 끝나자 분홍색 안개가 그녀의 칠공을 통해 다시 흡수됐다.
“꺄악!”
매희는 절망스런 눈으로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곧 이를 악물었다.
“빼앗을 수 없다면 합체라도 하겠어!”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 모르겠지만 매희의 혼백이 기이한 빛을 번득이면서 펑 하고 붕괴했고 강대한 음사의 경지도 함께 붕괴하여 류미의 체내로 흡수됐다.
한제의 시선이 류미에게 닿은 순간, 매희가 붕괴했다.
바로 그때, 하늘을 뒤덮을 듯한 기세의 분홍색 안개가 류미 전신의 모공을 통해 뿜어져 나왔고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옷도 순식간에 재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이제 한제의 눈앞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의 육체만이 남아 있었다.
한제가 제단 안으로 전송되기도 전에 그 분홍색 안개가 확산되어 왔고 이에 한제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오른손을 휘둘러 선력을 일으켜 분홍색 안개를 밀쳐내려 했다. 허나 분홍색 안개는 마치 허무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광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확산됐다.
“이런!”
안개의 확산 속도는 너무나 빨라 한제는 결국 따라잡혔다. 그 안개는 한제를 감싸더니 그의 모공을 통해 그 체내로 흡수됐다. 다행이라면 체내로 흡수된 양이 많지 않았기에 선력을 한 번 돌림으로써 억누를 수 있었다.
그 틈에 재빨리 몸을 뒤로 물린 한제의 안색은 무척 어두웠다.
“저 분홍색 안개는 법술이 아니라 경지로군. 그러니 신통력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밖에…”
한제는 산골짜기 안에서 고리 형태로 피어오르고 있는 분홍색 안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개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티 한 점 없이 깨끗했던 류미의 피부는 지금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두 눈은 때로는 무정한 빛을 때로는 욕망의 빛을 번득였다. 그녀의 표정에는 고통스러운 갈등의 기색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한데 류미의 눈에서 무정한 빛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그 자리를 욕정의 빛이 차지했다. 그녀는 매혹적인 미소를 띤 채 오른손으로 허공을 두드렸고 그러자 그녀를 감싸고 있던 분홍색 안개가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확산됐다. 또한 확산되는 속도만큼이나 엄청난 힘이 깃들어 있었다.
“헛!”
예상보다 훨씬 빠른 확산 속도에 한제는 헛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안개는 반경 수만 리를 뒤덮어 몽환적인 광경을 이루었다.
한제와 류미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본래대로라면 호흡을 참고 경지를 이용해 확산되는 분홍색 안개로부터 벗어나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체내로 흡수된 약간의 분홍색 안개를 억누르고 있긴 했지만 최소한 2각 정도는 좌선을 해야 몸 밖으로 완전히 배출할 수 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체내의 분홍색 안개가 확산되는 걸 막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한제는 분홍색 안개에 완전히 뒤덮였고 그러자 체내에 있던 분홍색 안개가 그의 제압을 뚫고 체내에서 확산됐다. 안과 밖에서 요동치는 분홍색 안개의 협공에 한제는 처음으로 이성을 잃고 말았다.
천환무정도는 류미의 체내에서 영변기 중기에 이르러 있었다.
천환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구백구십구환이었고 한 번의 환술을 부릴 때마다 만들어진 류미의 환신(幻身)은 한 번의 삶을 살았다. 당시 천도종에 있었던 류미 역시 그런 환술로 만들어진 존재, 즉 환신에 불과했다.
류미의 환신은 총 999차례 만들어졌고 마지막 한 번만 더 만들면 천환무정도를 영변기 후기의 절정에 이르게 할 수 있었다. 충분한 양의 선옥만 있다면 문정기를 향해 한 발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생사의 시련을 거쳐 만들어진 환신이 한 번만 더 죽으면 문정기에 이를 수 있는 셈이었다.
매희의 출현은 류미에게 험난한 시험이었다. 만약 삼조가 우연히 돕지 않았다면 류미는 매희에게 몸을 빼앗겨 육욕만을 탐하는 시체 인형이 됐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보기에 한제는 비열한 자였다.
삼조의 방해에 매희는 붕괴됐고 융합을 택했다. 덕분에 그녀는 류미의 1천 번째 환신이 될 수 있었다.
지금 그녀의 경지는 영변기 초기 수준에 불과한 한제의 생사윤회의 경지를 훨씬 능가했다. 그러니 한제가 류미에게 대항하기란 불가능했다.
분홍색 안개는 수만 리까지 퍼져나갔다가 산골짜기 쪽으로 천천히 몰려들었다. 이 과정은 꼬박 하루가 이어졌다. 산골짜기 안의 분홍색 안개는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안개 속에서는 여인의 신음소리가 간간히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소리 역시 선녀의 콧노래 소리처럼 아름답고 듣기 좋았다.
모완의 명혼
얼마나 지났을까, 분홍색 안개가 점점 희박해지면서 그 안의 광경이 드러났다. 한 여인이 제단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고 그녀의 두 눈이 점점 맑아졌다.
제단 위에서는 전송 후의 여파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막 전송되어 주작묘 내부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잠시 후, 분홍색 안개가 모두 흩어졌고 산골짜기는 다시 제 색을 찾았다.
여인은 자리에 앉아 예쁜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저물대 하나가 먼 곳에서 날아왔다. 그녀가 저물대를 손에 쥔 순간, 하얀빛이 번쩍하더니 여인의 나신이 하얀 옷으로 덮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고개를 숙여 제단 위에 뿌려진 붉은 점들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천환무정도의 마지막 환술이 될 줄이야. 경지도 천환정욕도(千幻情欲道)로 바뀌었고… 이 류미의 천환무정도가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스승님은 내게 그자의 도심에 인영을 남기라 했지만 안타깝게 됐군. 허나 스승님도 나의 마지막 환술에 그의 기운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겠지.”
류미는 예쁜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복잡한 심경이 어려 있었다. 마음이 먹먹하고 아득했다. 모든 상황이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
★ ★ ★
주작묘 내부의 어느 황량한 땅에 한제의 모습이 번쩍하고 나타났다. 그는 복잡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홍색 안개를 흡수한 상태에서 그는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았다.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순간, 그의 마음에는 거친 파도가 몰아쳤다.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류미의 일은 일단 물려두자. 많은 생각을 해봐야 소용없어.”
다시 한숨을 내쉰 한제는 미간을 문질러 석주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모완의 원영이 천천히,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언젠가 깨어날 원영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석주 공간에서 나가더니 어딘가로 내달렸다.
주작묘 내부도 사도환의 말과 차이가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주작묘 내부는 넓지 않으며 정중앙에 영산(靈山)이 하나 있다고 했다. 1대 주작이 주작인의 도통(道統)을 남겨둔 곳이자 그의 시체가 있는 곳이었다. 또한 주작이라는 봉호를 받은 자는 이곳에서 수련함으로써 주작인을 승계할 수 있었다.
한제는 신식을 펼쳐 사방을 훑었으나 너무 넓어 완전히 뒤덮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신식을 통해 강대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 또한 한제의 신식을 느낀 듯 곧장 달려들었다. 도발하는 느낌이었다.
그 기운 속에서 응집된 명혼들로 이루어진 영물이 느껴져 한제는 내심 깜짝 놀랐다. 주작묘 내부의 영물은 그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힘 역시 강한 모양이었다.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방향을 파악한 뒤 먼 곳으로 질주했다. 첫 번째 목표는 주작묘 내부의 정중앙에 있는 영산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수성의 결정이 무너지면 사도환이 생각하고 있는 방법에 의지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사도환조차 그 방법이 까다롭고 골치아프다고 했으니 어지간하면 피해야 했다.
수성의 결정은 수련 연맹에서 6성 수련국에게 준 최강의 권력답게 막강해, 오직 문정기에 이른 수련자들만이 그것에 접근하지 않고도 명혼을 뽑아낼 수 있었다.
다만 주작의 봉호를 받은 자는 명혼을 되찾을 수 없었다. 한 번 뽑고 나면 주작인을 사용할 자격을 잃기에 주작이라는 봉호를 잃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문정기 수련자라고 해도 명혼을 뽑아내는 데 성공할 확률은 반에 불과했다. 운작 역시 아직 명혼을 뽑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선유족 또한 주작성 소속이었으나, 지난 수만 년간 태어난 선유족인들 중 명혼을 되찾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사도환이 수성의 결정을 봉인한 것과 큰 관련이 있었다. 그 봉인으로 인해 주작은 더 이상 수성의 결정으로 주작성을 통제하지 못하게 됐지만 동시에 문정기 수련자가 명혼을 되찾을 가능성도 떨어뜨렸다.
7, 8성 수련 주성(主星)에서는 문정기에 이르면 명혼을 되찾을 기회가 주어진다. 또한 6성 수련성에 맞먹을 정도로 강력한 몇몇 종파도 수성의 결정의 제한을 피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온 수련 연맹 안에 전란과 분쟁은 없었을 터였다.
★ ★ ★
넓고 넓은 우주에 어느 거대한 별이 하나 있었다.
그 별 위에서는 검광을 비롯해 수많은 빛들이 하늘을 갈랐다.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련자를 태운 채 이동하는 비검의 빛들이었다. 또한 이곳은 주작성의 수십 배에 달할 만큼 굉장히 컸고 일반인이건 수련자건 그 수 또한 주작성보다 훨씬 많았다.
이 거대한 수련성의 사방에는 다섯 개의 작은 별이 있었는데 이 주성의 사방을 맴도는 별들에도 수많은 수련자가 있었다.
그 바깥쪽에는 더욱 작은 별들이 사방에 흩어져서 있었는데 그것들에는 각각 거대한 보호진이 배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