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22
한제는 여전히 그림 족자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그저 아주 오래 전, 황용이라는 사람이 제 선조와 부족원들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는 것뿐이지요. 소문에 의하면 그 당시에도 이 진은 이미 있었다고 합니다.”
“황용? 그럼 이 사람이⋯⋯?”
한제의 눈은 여전히 그 그림을 향해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바로 황용님이시지요. 제가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조상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입니다. 황용 진인에 대해서도 그렇지요.”
구양화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황용이라⋯⋯ 이름이 황용이란 말이지?”
한제는 기이한 눈빛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한참 뒤에야 한숨을 내쉬고는 오른손으로 미간을 살짝 문질렀다.
“황용이라⋯⋯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한제는 곁에 구양화가 있는 것도 잊은 듯 계속해서 혼잣말을 했다. 또한 두 눈은 여전히 그림 속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림 속 남자는 늠름했고 선력이 맴도는 듯했으며, 신선이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문득 한제의 눈빛에 그에게서는 보기 드문 아련한 빛이 담겼다. 이 그림을 본 순간, 한제는 원신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제의 표정을 살피던 구양화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 혹시 황용님을 알고 계십니까?”
한제는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말없이 족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그림 속에서 기억을 더듬었고 그의 심신은 마치 이 동해 요령의 땅과 우주를 관통하여 주작성에 닿은 듯했다.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어떤 선인에게도 발탁되지 않고 온 가족들의 비웃음을 샀던 소년에게로 돌아간 듯했다.
그 소년이 몇 번의 좌절 끝에 운명적으로 발을 들인 곳은 대산파였고 그 대산파 안에는 황용 진인이라는 이가 있었다. 바로 대산파의 장문인이었다.
‘대산파의 황용은 축기기에 불과했어. 외모와 이름은 그와 똑같을지언정, 저 족자 속 사내와 그는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니야! 허나 외모만이 아니라 이름까지 같다니, 분명 이상한 일이군. 과연 동해 요령의 바다, 요사스러운 곳이야.’
한제의 시선은 그림의 다른 한쪽을 채운 검은 안개로 향했다.
“그 검은 안개는 매달 보름달이 뜨는 요령의 밤을 의미하지요. 요령의 밤에는 진 안에 있어야만 안전합니다.”
구양화의 공손한 목소리에 한제는 의아한 듯 물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 곧 요령의 밤이라… 단순한 우연인가?”
“이곳은 요령의 땅입니다. 그 요령이 사냥에 나서는 때가 바로 보름달이 뜨는 밤이지요.”
구양화는 창문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 밤, 어르신도 사냥에 나선 요령들을 보시게 될 겁니다.”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고요성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건 무슨 뜻이었지?”
한제의 질문에 구양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령의 땅은 매우 넓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총 아홉 개의 군이 있는데 지금 이곳은 천요군(天妖郡)입니다. 그리고 제가 태어난 이래 가장 멀리 가본 곳이 천요군의 도시 중 하나가 고요성이지요. 이 황량한 곳을 벗어나 고요성으로 들어가고 싶으나, 겨우 1성 급 요력(妖力)으로는 그곳에 정착할 수가 없더군요. 이에 부락으로 돌아와 장로가 되어 부족원들을 교화하는 중입니다.”
한제는 요력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몰랐으나 수련자들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과 비슷한 개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요군 안에는 요제(妖帝) 곤허 아래로 팔대요수(八大妖帥)가 있습니다. 또한 요병(妖兵)은 수만에 이르고 도시는 수백 개에 달합니다. 한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팔대요수 중 하나가 어르신처럼 5천 년에 한 번 허무로부터 진입한 외부자라고 합니다. 이 외부자들은 모두 다른 군에 들어가 전공을 통해 지위를 맡게 됩니다.”
한제는 묵묵히 구양화의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다.
“한데 외부자들은 이곳에 들어오면 왠지 모르지만 서로를 살육합니다. 마치 상대를 죽이면 큰 이득이라도 얻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어르신은 외부자 중 한 분이시니 분명 이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실 테지요.”
구양화의 말에 한제는 뭔가 알 것 같았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툭 내뱉었다.
“아직 내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군. 내가 원하는 것이라니, 그게 대체 뭐지?”
구양화는 답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한제는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검은 옷의 남자
한참 뒤, 구양화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어르신, 솔직히 말해 이곳에 어르신이 원하시는 물건이 있다 한들 드릴 수는 없습니다. 만약 강제로 가져가신다면 우리 부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죽게 될 겁니다.”
한제는 덤덤한 눈빛으로 구양화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고 곧 구양화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하지만 만약 어르신께서 아까 주셨던 것과 같은 단약을 더 주실 수 있다면 어르신께 필요한 그것을 드린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한제는 망설임 없이 저물대에서 여러 개의 옥병을 꺼내 들었다. 그가 꺼내 놓은 옥병은 수십 개에 달했다. 그 옥병들은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돈 뒤 다시 한제의 저물대 안으로 날아들었다.
저물대로 들어갈 때까지 옥병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구양화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외부자들의 단약은 이 요령의 땅에서는 매우 중요한 보물이지요. 이곳에는 그런 단약을 만들어낼 재료가 없으니까요. 어르신, 따라오십시오. 제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드리갰습니다!”
구양화는 공손하게 포권을 한 뒤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 ★ ★
산골짜기 안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지만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놓은 덕분에 어느 정도는 환했다. 부족원들은 그 모닥불 곁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여인들은 아이를 안고 앉아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평화와 안녕이 가득한 부락이었다.
허나 구양화와 한제가 곁을 지나가는 순간, 모닥불 주위에 모여 있던 부족원들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따스한 분위기는 한제가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고 여인들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 두려운 눈빛으로 한제를 힐끔 거렸다.
하지만 모든 부족원들이 경계심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다. 몇 명은 오히려 감격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기도 했다.
모닥불 곁을 지난 구양화는 산골짜기 깊은 곳으로 향했다. 한제는 일정한 속도로 그 뒤를 따랐는데 모닥불 곁을 지나가자 근처에 있던 부족원들이 일어나 길을 비켜주기도 했다.
그중 한 여인이 길을 내주려 일어나다가 그만 안고 있던 아이가 쓰러졌다. 여인이 깜짝 놀라 아이를 안아 일으키려 하는 순간, 어느덧 한제가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한데 아이가 혼자 일어나더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씩씩하게 한제를 바라보았는데 어린 시절의 대우를 보는 듯해 미소가 절로 나왔다. 한제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지나갔다.
한제가 떠나고 난 뒤 아이의 어미는 얼른 달려 나와 아이를 끌어안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지자 아이를 혼내기 시작했다.
한제가 떠난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모닥불 주위는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됐다.
구양화는 한제를 이끌고 산골짜기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이 산골짜기는 조롱박 형태로 조롱박 머리 부분이 곧 입구였다.
이때 구양화는 조롱박의 바닥 부분에 이르러 있었다. 그곳은 나무가 적고 땅에는 갖가지 이름 모를 풀들이 돋아 있어서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여기를 보십시오!”
구양화는 걸음을 멈추고 오른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신식으로 그쪽을 살피던 한제의 눈빛이 변하더니 산골짜기 가장 깊은 곳의 절벽을 바라보았다.
그 절벽은 짙은 푸른색으로 주위의 절벽들과 완전히 대비됐다. 하지만 한제가 놀란 이유는 색상 때문이 아니라 그 중앙에 박힌 마름모 모양의 하얀 수정 같은 물질 때문이었다.
그 수정에서는 선력의 파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던 한제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득였다.
“이⋯⋯ 이건 선력이 아니잖아!”
한제는 앞으로 몇 걸음 나와 오른손 검지로 앞을 두드렸다. 그러자 손가락 끝을 통해 원신이 뻗어 나와 하얀 수정으로부터 발산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한제는 굳은 얼굴로 손을 거둔 뒤 생각에 잠겼다.
옆에서 구양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대로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것은 외부자들이 반드시 손에 넣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선력의 결정이라고 부르지만 저희는 요령옥(妖靈玉)이라고 부릅니다. 부상을 치료하는 작용을 하지요. 이것을 드리면 부족원들이 차차 죽어갈 것이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허나 치료 효과가 그리 빼어나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르신의 단약이 훨씬 뛰어날 정도지요.”
한제는 말없이 다시 오른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절벽에서부터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져 온 산골짜기 안에 진동했다. 뿐만 아니라 사방의 절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제가 펼쳤던 오른손을 꽉 움켜쥔 순간,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수정이 절벽에서 튀어나와 그의 손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수정을 손에 쥔 순간, 한제는 그 수정으로부터 흘러나온 냉랭한 기운이 그의 오른손을 따라 체내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은 경맥을 따라 흐르지 않고 뼈에 붙어 돌아다니더니 결국 체내를 한 바퀴 돈 뒤 단전에서 천천히 응집됐고 쌀알만 한 결정체가 됐다.
결정체 주위에서는 하얀 기운이 회전하며 피어올랐다. 그 하얀 기운은 선력 같아 보였지만 전혀 달랐다. 온화하기만 한 선력과 달리 이 기운은 온화한 가운데 기이한 느낌을 풍겼다.
이 요력을 흡수한 뒤 한제의 전신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제의 두 눈에서 어렴풋한 불덩어리가 깜빡거렸고 동시에 그가 입은 옷이 펄럭이면서 강력하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옅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구양화는 흠칫 놀라 헛숨을 삼키며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쳤다.
“외부자가 처음으로 요력(妖力)을 흡수하면 체내에서 요기(妖氣)로 인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더니, 그게 진짜였구나!”
한제의 몸으로 들어간 요력의 결정에서 발산된 이 요력은 몸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고 감정을 고양시켰다.
한제의 눈에 나타났던 어스름한 불덩어리는 금세 사라졌고 몸에서 뿜어 나오던 요기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요기라는 것은 정말로 기이하군. 흡수되자마자 또 다른 맥이 생겨났어. 선력과 융합시킨다면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야. 다만 지금의 요력은 너무 적어 시도해볼 수가 없구나.’
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저물대에서 여러 개의 옥병을 꺼내 구양화의 발치에 두었다. 구양화는 감격한 표정으로 얼른 그 옥병들을 품 안에 챙겨 넣었다.
“물러가라. 나는 여기서 좌선을 하다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떠날 것이다.”
한제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눈을 감았다.
구양화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절을 하고는 곧장 물러나자 주위는 적막에 잠겼다. 모닥불 쪽에서만 간간히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뿐이었다.
한제는 단전에 집중한 채 요력의 결정을 자세히 살폈다.
‘양이 많다면 융합시킬 수 없을지언정 새로운 힘을 발휘할 수는 있을 터! 이 요력의 결정은 분명 큰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구양화가 말했던 것처럼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의 피바람은 불어오지 않았을 테니까. 요령의 땅에 들어온 수련자들 사이에서 살육이 발생하는 것은 상대의 체내에 있는 요력의 결정을 빼앗기 위해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