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93
한제는 깊은 한숨을 들이마시며 미간을 두드렸다. 13만 개의 살육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13만 개의 생의 낙인이 한제의 몸을 빽빽하게 감싼 채 보호막을 형성했다.
순간, 한제는 눈빛을 굳히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솟아올라 오른손을 아래로 뻗어 움켜쥐었다. 그러자 황천이 곧장 뽑혀 나와 끊임없이 응집되면서 한 줄기 노란색 빛으로 변해갔다. 한제의 모든 법보와 도까지 깃든 빛이었다.
빛을 쥔 한제는 빠르게 돌진했다. 이때 짙은 안개 속에 있던 사내는 부서진 갑옷을 입은 채 번번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고 두 눈에서 이글거리던 마염도 어두워진 상태였다.
고요의 형상이 훌쩍 달려들어 끊임없이 신통술을 발휘했고 사내는 또다시 선혈을 한 움큼 토해내며 뒤로 물러났다.
“죽어라!”
고요가 낮게 외쳤다. 그의 허상은 피로 이루어진 몸속으로 수축되어 한 줄기 요력의 빛이 되더니 사내의 온몸을 뒤덮었다.
이 요력의 빛 아래, 사내의 미간에 스며들었던 마혼이 다시 나타나더니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파문을 일으키는 고함소리에 사내의 몸을 뒤덮었던 요력의 빛이 살짝 떨렸다.
마혼은 악에 받친 눈으로 고요를 노려보며 다시 사내의 미간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사내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도망칠 작정인 듯했다.
한제가 기다렸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훌쩍 솟아오른 한제는 노란 빛을 쥔 채 마치 유성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짙은 안개를 뚫고 들어가 도망치려 하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다가오는 한제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며 마치 파리를 쫓듯 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미친 듯한 바람이 일어났고 한제의 몸을 두른 13만 개의 생의 낙인이 하나하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1만 개, 2만 개, 5만 개, 8만 개⋯⋯.
허나 한제는 멈추지 않았고 13만 개의 생의 낙인이 모두 무너지던 그 순간, 사내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에 쥔 노란 빛을 내던졌다.
“흥! 별게 다 귀찮게 구는군!”
사내는 차게 코웃음을 치더니 달려드는 노란 빛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한데 그의 주먹과 노란 빛이 충돌하려던 순간, 사내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노란 빛에 어린 엄청난 기운은 사내에게도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평소였다면 모를까, 지금 그는 이전에 내상을 입었던 상태에서 고요의 공격으로 인해 제법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또한 마탑을 잃은 그의 신식은 그저 갑옷 안에 응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모든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노란 빛이 폭발하자 사내의 몸이 우뚝 멈추었다. 그 순간, 계속해서 그를 쫓아오고 있던 고요의 빛이 적중했다. 사내는 비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
사내에게서는 대량의 마기가 발산되었고 이 마기는 세상 모든 생명을 제련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고요의 신통력인 요력의 빛에 제련되어 금세 사라져 버렸다.
“배이라! 네가 나를 죽인다면 주인님께서는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혼이 사내의 미간에서 튀어나오며 날카롭게 소리치더니 한 줄기 그림자가 되어 갑옷 안에 녹아들었다. 순간, 갑옷이 사내로부터 떨어져 나가더니 짙은 마기에 감싸인 채 요력의 빛으로부터 달아나려 했다. 육신이야 새로 찾으면 그만이었기에 버릴 수 있었으나 갑옷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갑옷을 잃은 사내는 요력의 빛에 휩싸인 채 온몸이 썩어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두 눈에 빛을 잃고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마기에 뒤덮인 갑옷은 거의 대부분의 마기를 소모한 끝에야 마침내 요력의 빛으로부터 벗어났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가 너를 벌하겠다, 배이라!”
마혼은 이를 갈며 이곳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신통력을 발휘하려 했다. 하지만 뜻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한제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튀어나가려는 갑옷을 잡아챘기 때문이다.
오늘 도망가게 둔다면 나중에 더 큰 위협이 되어 돌아올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한제가 산마를 도망가게 둘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한제는 고요가 도와줄 것임을 굳게 믿었다.
갑옷을 맨손으로 잡는 순간부터 상대가 마혼의 형태로 자신의 몸에 들어오려고 할 것임을 예상한 한제는 원신에 남아 있던 승선과의 효력을 발휘했다. 순간 한제의 두 눈이 새빨개지면서 궁극의 광기 어린 상태에 이르렀다.
“도망갈 수 없다.”
한제는 날카롭게 외치며 갑옷을 끌어당겼다.
“이 망할 놈! 절대로 네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갑옷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혼은 악독한 표정으로 외치더니 한제의 오른손을 통해 체내로 들어가 그의 원신을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갑옷이 검은 실이 되어 한제의 몸을 감쌌다.
한제의 원신 안에서는 승선과의 효력으로 인한 전신의 잠재력이 폭발했고 이 힘은 대부분의 마기를 잃은 마혼과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흩어진 요력의 빛에서 다시 피로 이루어진 모습을 드러낸 고요는 만족스러운 듯 한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은 책략이다. 원신을 자극하여 마혼에 대항하다니. 게다가 내가 도울 것임을 계산했겠지. 좋다, 내 너를 도와주마!”
고요는 말을 마친 뒤 한 손으로는 한제를 다른 손으로는 온몸이 썩은 채 땅으로 떨어진 사내를 말아 쥐고 한 줄기 요력의 빛이 되어 천요성 바깥의 용담으로 돌진했다.
7성 수련성 천운성 밖의 드넓은 우주에서 보라색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약 30척 길이의 커다란 검을 타고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빛깔의 옷을 입은 세 여인이 그녀를 바짝 추격하는 중이었다.
“나쁜 년, 천수궁(天水宮)을 배반하고 소주(少主)님의 성물을 훔치다니! 정말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냐? 이미 천운성의 세력 범위에 들어왔다 해도 우리 오행성(五行星) 역시 7성 수련성! 넌 절대 도망칠 수 없다.”
추격하고 있던 세 여인 중 한 명이 냉소하며 외쳤다.
이를 악문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의 얼굴은 창백했다.
“네 몸에는 지금 소주님의 독기도 퍼져 있는 상태다. 그 상태로 얼마나 더 도망칠 수 있나 보자!”
보라색 옷의 여인은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몸에는 이미 독이 퍼진 상태였다. 원래는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지만 배반한 자매들이 적이 되어 돌아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지금 그녀의 상태는 풍전등화와 같았다. 체내의 독기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던 그녀는 한 움큼 선혈을 토해낸 후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졌고 동시에 그녀를 받치고 있는 거대한 검도 살짝 휘청거렸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훌쩍 날려 가까이 있던 피처럼 붉은 별로 향했다.
그녀를 뒤쫓던 세 여인은 차게 웃으며 속도를 높였다.
보라색 옷의 여인은 피처럼 붉은 별, 혈성(血星)을 두르고 있는 강한 바람을 뚫고 들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피처럼 붉은 누각이 보였다.
그때, 누각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피처럼 붉은 머리와 눈썹, 같은 색의 옷… 그에게서 선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나, 질식할 만큼 강한 위엄이 풍겨 나왔다.
사내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세 여인을 냉랭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그 눈빛만큼이나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썩 꺼지지 못할까!”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세 여인은 흠칫했으나, 그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행성 천수궁에서 배반자를 잡기 위해 온 것이니 선배님께서는 간섭하지 마시지요!”
허나 사내는 냉랭한 눈을 번득이더니 소매를 휘둘러 광풍을 일으켰다. 그 광풍에 세 여인들은 그대로 휘말려 혈성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거기 너,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자심입니다. 6성 수련성 주작성의 수련자입니다.”
한 번의 손짓으로 세 사람을 단번에 별 밖으로 내쫓다니, 이 얼마나 강한 힘인가?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은 긴장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 ★ ★
주작성의 초나라, 운천종.
운천종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초나라가 주작 주무태에 의해 4성 수련국으로 승급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초나라는 4성 수련국이긴 했지만 그 세력은 5성 수련국 사람들조차 함부로 굴 수 없을 만큼 컸다. 지난 수백 년간 풍파를 겪은 주작성 수련자들 중 이한제라는 수련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운천종은 초나라가 4성 수련국으로 승급된 뒤 입구를 헐어버리고 모든 힘을 끌어모아 상급 영석으로 거대한 조각상을 그 자리에 만들어 세웠다.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의 조각상으로 잘생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탈속적인 느낌이 풍겼고 두 눈에는 고심하는 듯한 빛이 어려 있었으며, 오른손은 결인을 그리고 있었다.
이 조각상은 현재 운천종의 입구이자 운천종의 수많은 제자들이 숭배하는 대상이었으며 4성 수련국 조나라의 모든 수련자가 공경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동시에 주작성의 신화이자 전설이었다.
지금 운천종 아래에서는 한 노인과 아이가 계단을 따라 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할아버지, 저게 할아버지가 말한 그 조각상이에요?”
노인은 추억에 잠긴 듯한 눈길로 조각상을 바라보다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고 있느냐? 운천종의 종주 철암께서 어찌 화신기에 이르렀는지, 초나라 모든 종파의 수련자가 어찌 운천종을 이렇게 존중하는지, 5성 수련국의 걸출한 인물들이 어찌 이곳에 와서는 그렇게 공손하게 구는지 말이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저 조각상의 주인공 때문이란다.”
소년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웃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데요?”
노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가 수련한 시간은 짧았지만 단 몇 백 년 만에 전에 없던 폭풍을 일으켰단다. 소문에 따르면 그분은 수련을 시작한 지 2백 년 후에 수마해로 가서 그곳을 어지럽혔고 운천종의 미인을 구해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 또한 조나라에서는 한 가문을 말살시켜 온 나라를 시체로 뒤덮었단다.”
노인은 조각상의 인물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아이는 그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분께서 차기 주작이 되었어야 하지만 그분은 주작의 칭호를 거절하고 지금의 주작 주무태에게 대신 그 칭호를 넘기셨단다.”
그 말에 아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주작이 되기를 거부했다고요?”
“그렇단다. 그러니 주작 주무태가 큰일을 다룰 때마다 운천종에 찾아와 묵묵히 저 조각상을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 주작성에서는 본래 주작성을 성지로 여겼으나 그분이 떠난 뒤로는 운천종이 주작성의 성지가 되었지!”
소년은 입을 쩍 벌렸다. 소문이야 들어본 적이 있다지만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말했다.
“할아버지. 저도 그분처럼 되고 싶어요. 그분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지금은 어디에 계세요?”
“그분의 이름은 이한제란다. 나 역시 그분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 하지만 그런 분이라면 어디에 있든 범상치 않은 모습일 게다.”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 할아비도 일찍이 그분과 잠시 교류했던 적이 있지. 그분께서는 지금까지 날 기억할 리 없겠지만⋯⋯.”
소년이 막 입을 열어 무슨 말인가 하려던 그때, 돌연 산 아래에서 호랑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작
위엄 가득한 호랑이의 포효는 우렁차게 숲을 울렸다.
잠시 후, 검은 줄무늬의 거대한 호랑이가 산 아래에서 훌쩍 뛰어올라 산꼭대기를 향해 달렸다. 그 호랑이의 등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는데 갓 스물쯤 됐을 법한 그녀는 비록 절세미인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우 아름다웠다.
그런 아름다운 여인이 하얀 옷을 나풀거리며 달려가는 모습은 마치 선녀 같았다.
“소백, 빨리!”
여인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여인을 태운 호랑이는 다시 포효하며 운천종을 향해 내달렸다.
꼭대기의 조각상 옆에 이른 호랑이는 우뚝 멈추더니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여 조각상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