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99
한제의 덤덤한 목소리에는 원초적인 싸늘함이 담겨 있었고 이에 여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으며, 이원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님, 이 일은 저희의 잘못입니다. 저희는 이 뇌의 선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금제가 있는 곳을 압니다. 그곳에는 분명 선보가 있을 겁니다. 그곳을 알려드릴 테니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이원이 한제를 향해 공손하게 말하고 있는 이 순간, 곁의 여인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 끝
한제는 미묘한 표정으로 이원을 힐끗 바라보았다. 칼날처럼 서늘한 그의 눈빛에 이원은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원의 얼굴에는 거짓말을 하는 기미가 전혀 없었다.
“제가 어찌 그곳을 알고 있는지, 또 어찌 그곳의 금제를 해제하러 가지 않는지 의심스러우시겠지요.”
한제는 이원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옆의 여인보다 훨씬 똑똑하고 현명했다. 절대 그저 그런 인물이 아닌 듯했다. 두 사람의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이원은 여인의 가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대가로 명혼을 넘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화를 들으면서 한제는 저 이원이라는 자가 뭔가를 노리고 있는 듯하고 모든 대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원은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일찍이 오래된 그림 하나를 손에 넣은 적이 있습니다. 뇌의 선계가 붕괴하기 전, 어느 금제가 걸려 있는 곳이 그려진 그림이었지요. 저는 한참이나 그 그림을 연구한 끝에 그 곳이 아직 남아 있기만 하다면 찾아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습니다. 또한 그 금제를 해제할 수 있다는 확신도 7할 이상 입니다. 이번에 이곳에 온 것도 그곳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한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제 추측대로라면 그 공간 안에는 원기(源器)가 있을 겁니다. 게다가 아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겠지요. 그곳을 찾아 금제를 푸는 데 성공한다면 선배님이 그 안에 있는 것의 절반을 가지십시오!”
곁에 있던 여인은 그 말에 깜짝 놀란 듯 입을 쩍 벌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제는 잠시 말없이 이원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지만⋯⋯.”
입을 연 한제는 돌연 오른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여인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그녀의 혼백으로 보이는 허상이 육체로부터 3촌 정도 떨어져 나온 듯한 모습을 보였다.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에 여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만약을 대비해 혼백 하나를 거두겠다!”
여인의 미간에서 혼백의 빛이 하나 생겨나 응집되었고 한제는 그것을 움켜쥐어 저물대에 챙겨 넣었다.
이원은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나, 내심 경계심을 드높였다. 눈앞의 상대는 자신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뛰어난 자였다. 한데 자신이 아닌 저 갈가 여인의 혼백을 거둔 것은 어쩌면⋯⋯
‘아까 우리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원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제가 불쑥 말을 걸었다.
“그리고 좀 전에 너희들의 모습을 감추었던 금제의 제작 방법에도 관심이 가는군.”
이원은 망설임 없이 저물대에서 옥패를 하나 꺼내 금제 제작 방법을 기록하더니 공손한 자세로 한제에게 건넸다.
“선배님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마땅히 드려야지요.”
옥패를 받아 들고 신식으로 내용을 살핀 한제의 미간이 순간 구겨졌다.
이원은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한제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기이한 수준이구나. 금제에 대해 저리 잘 알고 있다면 분명 이전에도 금제의 허점을 간파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잘 알고 있다고 한들 내 금제 술법까지 간파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자신이 알고 있는 금제의 내력을 떠올린 이원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옥패 안에 기록된 금제에 대해 한제는 분명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금제에 대한 이해가 깊은 그는 어느 금제든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그 신통함을 바로 파악하곤 했는데 지금은 혼란스러웠다. 이 금제는 그가 여태껏 배워왔던 금제와는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심지어 그 안에 있는 것은 선금술(仙禁術)도 아니었다.
이 금제를 상세히 살피기 시작하자 머릿속에 열여덟 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떠올랐는데 그 조각상들은 서로 교차되면서 한제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한제는 얼른 신식을 거두었다. 그는 그 안의 내용을 제대로 살피지는 못했으나 이 금제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허나 한제는 그에 대한 생각을 접고 옥패를 저물대에 넣은 뒤 덤덤하게 말했다.
“앞장서도록!”
이원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갈 씨 여인을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여인은 소매를 홱 뿌리치며 콧방귀를 뀌더니 홀로 검광이 되어 먼 곳으로 나아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이원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한제를 향해 포권을 한 뒤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한제는 느긋하게 그 뒤를 따르면서 번득이는 눈으로 이원을 살폈다.
“저자의 말에 거짓과 진실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지. 오히려 나는 저자가 날 처음 본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저자의 꾀는 깊고도 깊은 것이겠지.”
워낙 의심이 많은 한제는 이원이 비록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일지언정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만약 저자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나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이 하나라도 섞여 있다면 둘 다 살려둘 수는 없지.”
한제는 짙은 살기가 번득이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한편, 갈 씨 여인은 무척 불쾌한 상태였다. 속에서 화가 꾸역꾸역 차올랐지만 감히 한제에게 그 화를 풀 수는 없었기에 이원에 대해서만 짜증을 내는 중이었다.
“이원의 금제에 문제가 없었다면 저자와 얽힐 일도 없었겠지. 내 선령은 이제 막 원신으로 소통할 수 있을 만큼 자라난 상태였는데 이렇게 빼앗겨 버리다니… 한데 저자는 왜 이원이 아니라 내 영혼을 거둔 거지?”
여인은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원에 대한 짜증만 늘어갔다.
한데 그때 이원이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제가 기억하기로 그곳은 뇌광 구역을 지나서 찾아야 합니다.”
여인은 차게 코웃음을 치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심신을 통해 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저는 지금 금제로 신식을 포위해둔 상태입니다. 그러니 저자가 이 대화를 파악할 리는 없어요. 저자는 전부터 저와 아가씨의 대화를 듣고 제 명혼이 아가씨 가문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럼 아가씨의 영혼만 가지고 있으면 우리 둘 모두를 장악한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아가씨, 걱정마세요. 제게 아가씨의 영혼을 되찾을 방법이 있습니다.”
이원의 목소리는 굉장히 신중하고 진지했다. 여인은 냉소하기는 했지만 내심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녀는 이원을 무시하는 듯하면서도 항상 그의 말을 믿고 따르는 편이었다.
며칠 뒤, 세 사람은 멀리 떨어진 대륙 가장자리를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뇌광이 사슬처럼 연결된 채 칠흑처럼 검은 허공으로 뻗어있었다.
“선배님, 이 뇌광층에는 엄청난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수준이 높은 수련자들도 뇌광층을 지날 때에는 조심하는 편이니 선배님도 조심하십시오!”
대륙 끄트머리에서 멈춘 이원은 한제를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그 자리에 서자 뇌의 선계의 위엄과 장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곳에 서야만 뇌의 선계가 당시 얼마나 심각하게 붕괴되고 파괴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대륙의 가장자리는 마치 누군가가 손으로 쪼개놓은 듯 불규칙적인 톱니 모양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 측면에는 진흙 단층이 있었는데 아래로 쭉 뻗어있어 그 끝이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였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는 허공뿐이었다. 마치 허공 위에 이 대륙이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곳에서는 콰르릉 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천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강해졌다가 약해지기를 반복하는 천둥소리는 이곳에 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가장자리 측면에서는 뇌광이 번득이고 있었다. 이 뇌광은 마치 이 대륙 깊숙이 못 박힌 듯했고 그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뇌광 가닥이 서로 교차 되면서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제는 이 사슬의 반대쪽 끝이 분명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 뇌의 선계는 뇌광의 사슬로 이어져 고정되어 있는 듯했다. 마치 실 같은 그것으로 오래 전 붕괴된 뇌의 선계의 조각 대부분이 연결되어 있었다.
만약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면 이 광경은 더욱 명확하게 눈에 들어올 터였다. 모든 조각들이 서로의 틈 속에서 수많은 뇌광으로 연결된 덕분에 붕괴된 뇌의 선계 속에서도 잔존하고 있는 그 모습을…
이 광경을 통해, 거대한 한 쌍의 손이 이곳을 뚝 부러뜨린 것 같다는 한제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의 선계에서 그 거대한 손자국을 본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었다. 이 두 선계에서 본 광경들에 한제는 수만 년 전 선계에 대체 얼마나 엄청난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고신이 행한 일일 거라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렇게 보기에는 이상한 점도 많았다.
한제는 이내 이런 고민들을 애써 무시한 뒤 이원과 갈 씨 여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어떻게 이 뇌광층을 건널 생각이지?”
줄곧 한제를 면밀하게 관찰하던 이원은 한제가 가장자리의 균열과 뇌광의 사슬을 본 후 순간적으로 생각에 잠긴 것을 알아차리고는 곧장 자신의 추측을 확신했다. 상대는 뇌의 선계에 처음 온 사람일 것이다.
한제의 질문을 들은 이원이 공손하게 답했다.
“뇌광층을 건너는 데 중요한 것은 아가씨의 도움입니다.”
그러자 여인은 코웃음을 치며 저물대에서 새카만 무쇠 검을 꺼냈다. 평범해 보이는 검이었으나 그 검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한제는 이원의 눈이 흥분으로 물드는 것을 눈치챘다. 허나 그 흥분의 빛은 곧 사라져버렸고 이원은 덤덤하게 한제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무쇠 검을 바라보다가 혀끝을 깨물어 한 움큼의 피를 뱉어내더니 그것을 휘둘러 문양을 하나 그려냈다. 그러자 그녀의 미간에서 같은 문양이 빛을 발했고 서로 몇 번 호응하듯 반짝이던 문양은 무쇠 검 위에 찍혔다.
순간 검은 바르르 진동하더니 그 위에서 원형의 광막 하나가 발산되었다. 이원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가장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 검 위에 섰다. 그가 선 곳은 검의 끝부분이었는데 한제를 등진 채 주위를 살피는 그의 표정은 회상에 잠긴 듯했다.
그때, 이원의 두 발을 응시하던 한제는 뭔가를 알아차렸다.
갈 씨 여인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앞으로 한 걸음 내딛어 그 검의 자루 위에 올랐다.
한제의 시선은 이원의 두 발에 닿아 있었다. 그가 그 무쇠 검에 오른 순간, 한제는 상대가 마치 그 검과 하나로 녹아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시선을 거둔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한데 허공에 떠오른 그때, 귓가에서 울리는 요란한 천둥소리가 순식간에 몇 배로 커졌다.
검 위에 선 갈 씨 여인은 냉소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법보는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물건이야. 아무런 신통력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천둥번개에 대항하는 데에는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하지!’
이내 그녀는 생각을 통해 검을 통제했고 그 통제 아래 무쇠 검은 뇌광으로 이루어진 사슬을 따라 앞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사슬처럼 엮인 뇌광은 이 무쇠 검에 대해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 듯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여인의 시선은 검 끝에 선 이원의 등에 닿았다. 상대가 선 위치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로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었다.
검은 빠르지는 않았지만 안정적으로 뇌광층을 뚫고 나아갔다.
눈앞의 공간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뇌의 선계에 온 수련자들이라면 이 허공 속에서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그저 사슬처럼 엮여 있는 뇌광을 따라간다면 정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뇌광의 사슬
광막 안 깊은 곳까지 들어왔을 때, 갈 씨 여인은 신식을 발산시킬 수 없어 한제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채 따라오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광막을 뚫고 들어온 천둥번개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얀 옷을 입은 한제는 뇌광 사슬이 마치 뒷마당이라도 되는 듯 그 위로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뇌광이 발을 타고 온몸으로 흐르는 데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원신을 내보내 그 뇌광을 흡수하고 있는 듯했다. 그가 지나온 뒤쪽으로는 더욱 강력한 전광이 일어났는데 마치 밤하늘의 밝은 등불처럼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한편, 이원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마음에 파란이 일어 심지어는 검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친구, 정말⋯⋯ 정말 오랜만이군.’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던 이원은 갈 씨 여인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에 고개를 돌린 그는 전광 사슬을 따라 걷고 있는 한제를 보고는 두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맙소사! 저게 말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