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98
“운해에는 어쩐 일이지?”
한제가 물었다. 저 여인의 분신은 그에게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그의 심신에 영원히 지울 수 없을 만큼 깊은 낙인 역시 남긴 상태였다.
류미는 모은미의 분신이었고 류미의 삶은 모은미와 함께 이어져 오고 있었다.
때로 한제는 그녀가 류미인지 모은미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허나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연맹성역을 떠나기 전, 이미 그녀와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은원을 해소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탁삼이라는 고신을 아는가?”
모은미는 씁쓸함과 염려가 동시에 묻어나는 얼굴로 물었다.
“탁삼!”
한제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가 속박에서 벗어나 나천성역의 대군을 무너뜨렸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나천성역 수련자들은 다시는 연맹성역으로 나서지 못했지. 노부자라는 자도 탁삼에게는 덤빌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망쳤더군.”
모은미는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듣는 한제의 마음은 더없이 무거웠다. 금방이라도 폭발하려는 화산이 된 것처럼, 그는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허나 모은미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탁삼은 시음종이 점거하고 있던 성역도 찾아냈어. 시음종은 왕이 패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거의 와해됐지. 사성종 역시 참변을 면치 못했어. 그 강력한 청룡성황 역시 탁삼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생사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됐어.”
한제는 좀 전과 달리 모은미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수련자 연맹에 남아 있던 세력들도 모두 무너져 내려 뿔뿔이 흩어졌어.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오직 수련자 연맹 본부만이 탁삼의 시선을 끌지 않았고 덕분에 온전히 남게 됐지.”
한제의 두 눈은 바짝 졸아들어 있었고 심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탁삼이 소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우의 선계는 파괴되지 않았어. 청림이 저지했거든. 둘은 무슨 조약을 맺었는지 결국 탁삼은 그곳을 떠났지.”
모은미는 입술을 깨문 채 작게 말했다.
“네가 맞았어. 당시 주은혜가 내 곁에 남았더라면 이 재난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곤허경 또한 모든 수련자가 죽었고 집사가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준 덕에 나는 원신만 간신히 도망쳤어. 최근에 겨우 육신을 다시 응집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로 인해 수준이 대폭 떨어졌어.”
한제는 조금씩 침착함을 되찾았다. 모은미의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었으나 탁삼의 등장은 한참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곤허의 유물을 가진 내가 이곳으로 온 건, 수만 년 전 운해성역 신종의 대장로가 1대 성녀에게 빚을 진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지. 신종에서 수련하면서 수준을 회복할 생각이야.”
한데 그때, 모은미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다름 아닌 한제 때문이었다.
놀라운 변화
어느새 모은미와의 거리를 바짝 좁힌 한제는 오른손 두 손가락을 펼쳐 그녀의 미간을 두드렸다.
그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을 피하지 못한 모은미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그녀는 한제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모은미의 심신에 쾅 하고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미간에 한 덩이 기운이 피어올라 회전했다.
그 기운에서는 짙은 고신의 기운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제는 그 기운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한제는 한층 어두워진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은미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멍하니 서 있다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미안⋯⋯. 이렇게 될 줄은…”
모은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렸다.
그녀가 한제를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해준 것은 순전히 호의에서, 그가 위험을 깨닫고 조금이라도 대비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내 육신과 원신을 여러 번 살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괜찮아.”
고개를 숙여 모은미의 창백한 얼굴과 눈물을 그리고 당황한 얼굴을 바라보던 한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이 일은 너와는 무관해. 나는 누구보다도 탁삼에 대해 잘 알아. 탁삼의 실력이라면 네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깊은 낙인을 남겨놓는 것도 간단했을 거야. 네가 알아차리지 못한 게 당연해.”
모은미의 행동이 순전히 호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한제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웠다.
“난⋯⋯.”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모은미의 얼굴은 매우 창백했다.
“게다가 탁삼이 네게 남긴 고신의 낙인은 내게는 단약과도 같아.”
한제는 오른손으로 모은미의 미간을 가리켜 고신의 기운을 한데 응집시켰다. 이 기운은 모은미의 미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곧장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는 그 기운을 흡수해 여섯 번째 반점에 녹여냈다.
그 순간, 그의 심신에 탁삼의 허상이 나타났다. 탁삼의 허상은 거칠게 포효했지만 그 앞에는 고신의 몸을 가진 한제의 허상이 버티고 있었다.
이는 흡수의 과정이었다. 탁삼은 강했지만 모은미의 몸에 남긴 기운은 많지 않았기에 한제는 억지로나마 그 기운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었다.
“그자는 연맹성역을 떠나기 전 네 이름을 외쳤어. 운해성역에도 왔었지만 너를 찾지는 못한 것 같았고…”
모은미는 복잡한 눈빛으로 말했다.
한제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언제쯤 운해성역에 왔었는지 알고 있나?”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때 나는 육체를 응집시키느라 폐관수련을 하고 있었으니까. 확실한 건, 1백 년은 넘지 않았다는 거야.”
“1백 년!”
한제의 눈이 번득였다.
그는 지난 1백 년의 대부분을 기이한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그곳이 봉계의 진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봉계 안에서 탁삼은 내 기운을 찾지 못했다. 내가 그였다면 상대가 봉계를 떠난 것은 아닐지 의심했겠지. 그때 그곳은 봉계의 진과 관련이 있는 곳이니 탁삼이 그 진을 뚫으려 했다면 내가 느꼈을 텐데… 그렇다면⋯⋯?’
한제의 표정이 기이하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만약 탁삼이 아직 봉계 안에 있다면 칠채계에서 빠져나온 지도 몇 개월이 지난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리 없어. 그렇다면 탁삼은 어떻게든 봉계의 진을 뚫고 나갔다고 봐야겠군.’
★ ★ ★
한제가 정황을 통해 꽤나 정확한 추측을 해내고 있던 그때, 계외의 태고의 성신 안에서 광기 어린 포효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거대한 고신이 잔뜩 분노한 채 어느 태고족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 뒤로는 짙은 피비린내와 붉은 빛이 진동했다. 그가 소멸시킨 아홉 번째 태고족이었다.
태고의 성신에서도 한제를 찾지 못하고 있는 탁삼은 거의 폭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이 아홉 번째 태고족을 멸망시키려던 찰나, 그는 심신이 바르르 진동했다. 동시에 곤허의 성녀 체내에 남겨두었던 낙인을 통해 한제의 기운을 똑똑히 느꼈다.
“녀석은 계내에 있다! 한데 이미 계내를 몇 번이나 뒤졌건만 어째서 찾아내지 못했단 말인가! 으아아, 이한제!”
탁삼은 광기 어린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기간에 다시 봉계의 진을 뚫고 들어갈 힘이 없었다.
모은미가 한제를 찾아온 것은 연맹성역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한제도 모은미도 그 이상은 서로 할 이야기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은 듯했다.
떠나기 전, 모은미는 달빛 아래 정원 문밖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천매, 꽤 괜찮은 사람이야. 하지만 넌 아직 이모완을 잊지 못한 모양이군. 허나 이모완도 네가 수천 년을 홀로 외롭게 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야. 나 역시 그렇고. 난 이제 폐관수련을 하러 신종으로 갈 거야.
천년은 걸리겠지. 또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 류미이자 이평의 어미인 나는 곤허의 성녀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면 이평과 함께 떠돌아다니며 진정한 어미 노릇을 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모은미는 다시 걸었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도심은 점차 채워졌다.
천환무정도⋯⋯ 그리고 만환천마도가 변하고 있었다.
곤허의 성녀들 사이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신통력을 성공적으로 깨달은 이는 역사상 한 명뿐이었다.
모은미는 분신을 이용하는 지름길을 택했으나 결국 류미로 인해 실패하면서 도심을 가득 채우지 못했고 이로 인해 곤허경의 최강 신통력에도 균열이 일었다.
이 균열은 곧 류미였고 한제였으며, 이평이었다.
그녀의 도를 변화시키고 가득 채우게 만든 것은 바로 심경의 변화였다. 그녀는 더 이상 이 균열을 피하지 않고 대면하기로 했다.
무정(無情)과 유정(有情)은 한 글자에 불과했으나 결과의 차이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무감각한 마음으로 수련한 도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도라고 할 수 없었다.
수련자는 감정의 도움을 받아 도에 저항할 수 있게 되고 발버둥 치는 가운데 세상에서 의탁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갖게 된다.
모은미의 도심에 난 균열에는 한제의 모습이 남아 있었고 이는 그녀의 심경을 변화시키는 가운데 무정의 도 아래에 숨겨진 낙인이 됐다. 그리고 이 낙인의 힘으로 그녀의 도는 거의 가득 찬 상태에 접어든 것이다.
정원 안, 달빛에 잠긴 한제 주위에는 두 여인의 서로 다른 체향이 맴돌았다. 한제는 그 가운데 홀로 서서 오랫동안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 ★ ★
며칠이 지나 8급 성역 종파의 시합일도 이별의 시간도 점점 다가왔다.
모은미는 사흘 전 이비선과 함께 무극종을 떠났다. 이비선은 스승의 명을 받들어 모은미와 함께 신종으로 향했다. 고고한 곤허의 성녀는 떠나는 순간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곤허경은 이미 폐허가 되고 그녀 홀로 남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회복하여 곤허경을 다시 세우고 곤허의 성녀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이 그녀와 함께했다.
그동안 그 책임을 피해왔지만 이제는 피하지 않고 마주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