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97
“선배님, 이곳이 귀원종의 처소입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한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허리를 살짝 숙인 채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긴 빛을 그리며 멀어져갔다.
홀로 남은 한제의 신식에 저 멀리 모은미와 정원 안의 이천매가 보였다.
한편, 한제를 본 이천매는 더없이 아름답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돌아오셨군요.”
“⋯⋯돌아왔다.”
이천매로부터 수십 척 정도 떨어진 곳에 내려선 한제가 조용히 답했다.
사방은 고요했다. 가벼운 바람만 살랑 불어 정원의 풀과 꽃을 흔들었다. 한제와 이천매는 교교한 달빛 아래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봉래 대륙에서 헤어졌을 당시와 같은 침묵이었다. 1백 년이 흘렀지만 상황은 당시와 다르지 않았다.
한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입을 다물었다.
이천매의 팔찌를 우연히 찾은 덕에 칠채계에서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 은혜에 보답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천매에 대한 감정이라고는 도우로서의 존중뿐이었다. 팔찌로 인해 운명이 바뀌면서 그 감정이 약간은 복잡해진 상태였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이미 마음이 죽은 그에게 여인은 이모완뿐이었다. 그러니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없었다. 어쩌면 이천매가 아직 그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수마해에서 수년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이도 아니었고 운천종에서 수백 년간 기다린 사이도 아니었으며, 죽음으로 인해 헤어진 사이도 아니었다.
2천 년이라는 수련자로서의 삶을 함께한 사이도 아니었다. 더욱이 강림한 천도의 사자에게 대적하도록 한 사람도 아니었다.
‘세상이 너를 가져가려 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너를 찾아올 것이다!’
한 여인에게 이런 약속을 했기에 한제는 이천매를 앞에 두고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잠시 함께 앉을 수 있나요?”
이천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 조용히 물었다. 쏟아져 내리는 달빛이 그녀를 더욱 아름답게 비추었다.
한제는 말없이 그녀 곁에 앉아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은 취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코끝에는 이천매의 향기가 맴돌았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고개를 숙인 이천매는 고운 손으로 풀잎을 만지작거리며 돌돌 말았다.
“잘 지냈지.”
한제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림, 보셨어요?”
이천매는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채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장에서 지내던 1백 년 동안 제 외로움을 달래주었지요.”
이천매는 한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한제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는 며칠 후면 다시 떠나야 해요.”
여전히 한제에게 고정된 이천매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풀을 돌돌 말고 있는 손가락도 같이 떨려왔다.
“배웅⋯⋯ 해주지.”
한제는 한참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천매는 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벙어리라도 된 줄 알았어요.”
그러고는 돌연 슬픈 얼굴로 슬며시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도 배웅해준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결국 배웅은 못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이번에는 꼭 해주지.”
한제는 자신을 향한 이천매의 눈길을 피해 앞을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이천매의 표정은 한층 씁쓸해졌다. 한제가 곁에 있는데도 오히려 더 멀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절대로 좁힐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와 하늘을 나는 새처럼.
“어렸을 때부터 저는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어요. 운해성역 전체를 뒤져봐도 저처럼 파란 머리를 가진 사람은 없으니까요. 지금도 어렸을 때 저를 놀리던 또래들이 기억나요.”
풀을 쥔 손가락이 바르르 떨려와 이천매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녀는 한제에게 지난 백 년 동안 그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점점 또렷해졌음을 알리지 않았다. 그가 준 금색 붓을 잃어버렸을 때 목숨을 걸고 찾아왔다는 것도 알리지 않았다.
또한 이렇게 그를 만나러 오기 위해 얼마나 큰 압박을 견뎌내야 했는지도 알리지 않았다. 이로 인해 요종에 들어갈 기회도 그곳의 가르침을 얻을 기회도 모두 잃게 되었다는 것도 알리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단지 한제를 만나기 위함이었음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으니 한제로서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을 더듬는 듯 이천매의 눈빛이 쓸쓸하게 변해갔다.
“수련은 아주 고됐어요. 스승님은 저를 위해 수많은 단약을 제련해주셨지요. 그러니까 제 수준은 스승님이, 그리고 파천종이 준 거고… 그러니 제가 전장에 나가는 건 운명이라 해야겠죠.”
이천매는 손에 말아 쥔 풀을 뽑아낸 채 가만히 쥐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파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떠나면 돌아올 때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언젠가 제가 죽으면 당신의 인생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간 이천매라는 여인도 있었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그 순간, 한제는 마음이 찌르는 듯 아파왔다. 그런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잠시 시간을 두고 이천매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이천매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녀는 마음속에 꼭꼭 담아두려는 듯, 혹은 완전히 그를 잊으려는 듯 한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한제는 더욱 마음이 아파왔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천역주의 문 뒤에서 본 전생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본 것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가 된 자신이었다.
그 새는 어느 강 위를 지나가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 속의 물고기를 보고 그 근처에서 내려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물고기 역시 그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한숨을 내쉰 이천매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점차 멀어져갔다.
“고맙다.”
이천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가요?”
이천매는 우뚝 멈춰 서서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의 표정은 덤덤했다.
한제는 오른손을 들어 팔찌를 살짝 흔들었다.
“이 팔찌가 내 목숨을 한 번 구해주었거든.”
그 순간, 이천매가 유지하고 있던 평정심이 무너졌다. 처음에는 멍한 얼굴로 팔찌를 바라보다가 점차 미소를 드러냈다. 미소는 갈수록 환해졌다.
“분명 던져버렸는데⋯⋯.”
이천매는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우연히 찾아냈지.”
한제는 힘없이 대답했다. 사실 자신도 놀랐을 만큼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그렇군요. 우연히 찾아냈군요.”
이천매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는 이천매가 뭔가를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으나, 해명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팔찌를 돌려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이제 돌려주려고…”
“도우가 찾은 거잖아요. 돌려주면 나는 또 던져버릴 거예요.”
이천매는 더욱 화사하게 웃으며 아랫입술을 꾹 물더니 몸을 돌렸다.
“약속하셨어요. 이번에는 꼭 배웅해주겠다고…”
이천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팔찌를 쥔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정원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또 다른 여인이 서 있었다. 절세미인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그녀는 더없이 복잡한 얼굴로 묵묵히 한제를 마주 보았다.
주작성 대산파에서 류미라는 여인과 어린 한제가 마주했을 당시와 같은 눈맞춤이었다.
한제와 모은미는 서로 넘지 못할 넓고 깊은 고랑을 사이에 두기라도 한 것처럼 정원의 열린 문을 가운데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번 침묵은 이천매와 마주했을 때와는 달랐으나, 정확히 무엇이 다른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한제의 인생을 통틀어 이모완을 제외한다면 그의 곁에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것은 류미, 혹은 지금 눈앞에 있는 모은미였다.
주작성에서도 나천성역에서도 그리고 이곳 운해성역에서도 그녀와의 연이 이어졌다.
침묵 속에서 고개를 숙인 모은미는 가볍게 한 걸음 내딛어 깊은 고랑과도 같은 문을 넘어 정원으로 들어왔다. 이제 둘의 거리는 수십 척에 불과했다.
“여기서도 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모은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한제의 얼굴은 덤덤했다. 그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세상일은 본디 예측할 수 없는 법이지.”
한제가 덤덤하게 답했다.
처연한 달빛 아래, 모은미의 아름다움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 아름다움에는 곤허의 성녀로서 타고난 고귀한 기질도 어려 있었다.
한제가 평생 마주한 여인 중 모은미보다 아름다운 이는 없었다. 그녀는 마치 잠시 세상에 내려온 선녀와도 같았다.
“예측하기 어렵다라⋯⋯.”
모은미의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