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29
130.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 (2) >
***
상속자를 제외한 드래곤들은 호기심 가득한 말투로 서로에게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저 수형자는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야?”
“한국의 젠킨슨이 데리고 왔다는군. 용족 회의에 초청받은 증인이니 아무도 안 쫓아낸 거지.”
“하지만 이대로는 회의를 진행할 수 없잖아? 이런 민감한 자리에 계속 머물게 허락할 필요가 있나? 용도 아니고, 심지어 위원회 수형자인데.”
“하지만 유언에 언급된 이상 쫓아내는 것도 좀···.”
한편 상속자들의 기세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들 머릿속에는 비슷한 생각이 스치고 있었다.
‘뉴욕 곳곳에 위치한 사설 금고들은 아버지의 레어 별관이나 마찬가지야. 분산된 보물 창고라고. 예외 없이 전부 최고의 결계로 보호되었는데, 거기 숨겨 놓은 게 평범할 리 없다. 그런 걸 수형자에게 넘긴다고?’
‘용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공표된 유언을 무시할 수는 없지. 일단 저놈이 상속하는 걸 기다리는 게 좋겠군. 그다음에 어떤 우발적 사고가 생기든, 거기부터는 유언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니까.’
‘놈이 하필 수형자라는 게 짜증 나는군. 그냥 쉽게 죽여 버릴 수도 없잖아? 위원회와의 분쟁을 피하려면 은밀하게 처리해야 할 텐데···.’
각자의 생각에 빠진 사이 드래곤 로드의 유언은 이어진다.
-다음은 드래곤 로드 승계에 대한 내용이다. 지구의 드래곤을 대표하는 자로서 나는 여태 기쁜 마음으로 소임에 임하였다. 드래곤 로드는 차원 내 동족의 의견을 조율하고 취합하는 중요한 자리다. 따라서 내 죽음이 확인된 직후 후임을 신속하게 선출할 것을 권고한다.
-다만 그 자리를 좀처럼 자처하여 맡으려 드는 동족이 없는 건 애석한 일이다. 지원자가 없다면 지목하는 것이 빠를 터.
-나는 차기 드래곤 로드 후보로 화룡속 레드 드래곤 젠킨슨(서울시 종로구 평창5길 12, 대한민국)을 추천한다. 그는 내가 임기 중 보였던 미진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인재로 판단되며, 경험, 태도, 성품, 지적 능력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훌륭한 드래곤이다. 부디 유권자들의 깊은 숙고를 바란다.
젠킨슨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이 커졌고, 벌린 입 사이에서 헉!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드가 유언장에 후임에 대한 유지를 남기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하물며, 자신을 다음 로드로 추천한다고?!
다른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젠킨슨? 왜 하필 저 양반을?”
“둘이 스타일이 좀 비슷하긴 했지. ···안 좋은 쪽으로 말이야.”
“엘프나 인간 따위를 친구라고 부르는 괴벽 말이지? 그 논리면 바퀴벌레도 드래곤의 친구가 될 수 있겠군.”
“로드는 워낙 나이가 많았으니 수긍했지만, 젠킨슨이라. 좀 미덥잖은데.”
“그럼 어떡해. 네가 할 거야?”
“···아니, 그건 좀.”
“어차피 다 하기 싫어하는 자리잖아. 로드가 저렇게 유서에 남겨 놓았으니 다행이지. 젠킨슨이 사명감에 불타올라 냉큼 달려들기를 기대할 만하군.”
유언은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
-마지막으로 내 시신의 처분에 대한 유지를 전한다.
상속자들이 숨을 죽였다.
이제부터가 하이라이트다.
저 고룡이 가진 천문학적 재산 중에서도 가장 큰 가치를 지니는 것은 시신이기 때문이다.
-내 몸은 ‘기본적으로는’ 드래고닉 코드에 따라 처리하기를 바란다.
“휴우.”
“그래, 당연하지.”
상속자들 사이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드래고닉 코드를 준수하라는 건 자식들이 동등하게 나눠 가지라는 소리다.
고인은 예측이 어려운 기이한 성품을 지녔지만, 제일 중요한 부분에서는 상식을 따르려는 모양이었다.
-참고로 내가 지구에 오기 전 태어난 자녀들은 상호 합의하에 상속권을 포기했음을 밝혀 둔다. 따라서 지구표준시 서기 1945년 12월 24일 0시 이후 태어난 드래곤 중 나의 생물학적 자식임을 증명 가능한 모두가 시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생물학적 자식을 판정하는 기준 역시 드래고닉 코드를 따른다.
그때 민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본 드래곤은 없었다.
모두가 유언에 잔뜩 집중한 상태였으니까.
-단.
그리고 이어진 폭탄 같은 선언.
-드래곤 하트만은 예외로 한다.
“······!”
상속자들은 오늘 몇 번이나 뒤통수를 두들겨 맞는 배신감을 느꼈다.
뭐? 드래곤 하트?
그걸 왜 예외로 해?!
저 고룡의 유산 중 가장 귀중한 것이 그것인데···!
-다시 한번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나의 드래곤 하트는 특수한 사정 때문에 조각 낼 수 없고, 그리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다.
상속자들은 거친 욕설을 퍼붓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제멋대로 굴기에는 주변에 고룡이 너무도 많았다. 그들은 대신에 마음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른 고룡들 드래곤 하트도 잘만 쪼개고 나눠 가졌는데··· 왜 당신 것만 안 된다는 겁니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돌려주지 않은 채, 마법 전언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드래곤 하트를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은 실효가 없으며, 용족 성정에도 안 맞는 일이다. 따라서 나는 드래곤 하트를 단 한 명의 상속자가 온전하고도 완전한 형태로 소유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열일곱의 상속자 중 누가 그것을 차지할 것인가?
드래곤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다음 말을 기다린다.
-내가 준비한 여러 유언 중 ‘이것’이 활성화되는 조건은 내가 자연스럽지 않게 사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난 나의 죽음에 대한 철저한 진상 조사와 복수를 원한다. 그 과정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상속자에게 나의 드래곤 하트를 증여하기로 한다.
자식 중 하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렸다.
“아버지! 당신은 대체!”
닿지 못할 절규였다.
한편 다른 드래곤들은 상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례가 없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유언이었다. 구경꾼들 역시 로드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여기까지는 물 건너 남의 집 불구경하는 마음가짐에 가까웠다. 어차피 내 일이 아니니 흥미로울 뿐.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심리적 거리는 한순간에 좁혀 들게 된다.
-규명과 복수를 위한 기한은 오늘로부터 99일 뒤로 정한다.
-내 시신의 분할과 양도는 드래곤 하트 소유주가 결정되는 99일 후에 시작하며 그 전까지 비늘 한 장도 손상해서는 안 된다. 내 유언을 무시하려는 상속자가 존재할 경우를 대비하여, 나는 별도의 ‘시신 관리인’을 두어 그때까지 내 몸을 봉인하도록 안배하였다.
-99일 내 상속자 중 누구도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의미 있는 기여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경우···.
-드래곤 하트의 소유권은 차기 드래곤 로드에게 이전된다.
“······!”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드래곤들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이는 순간이었다.
지구 최고령 드래곤의 심장.
본래는 피를 이은 자식들에게만 증여되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그것을, 혈연관계가 없는 드래곤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잠깐, 이건 말도 안 돼!”
상속자들이 발악하듯 소리 질렀다.
그리고 증인으로 나선 고룡들에게 호소한다.
“규명과 복수를 99일 안에 마치라니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버지는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고룡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해칠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차마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가 생략한 단어를 모두가 떠올렸다.
아마도, 위원회가 연루되어 있으리라.
“그리고 가장 많이 기여한 자에게 드래곤 하트를 준다고요? 그걸 누가 객관적으로 계량하고 판정을 내릴 겁니까? 전제부터 말이 안 되고 공정하지도 않아요. 생각해 보십시오.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장 위원회 본부로 쳐들어가서 테러라도 저질러야 합니까? 아니면 지구 대표소에 새로 왔다는 그 촉수 괴물이라도 죽여 없애야 합니까?!”
그때였다.
“잠깐!”
고룡 한 명이 그의 말을 제지한다.
——-!
이변을 알아차리는 것은 늙은 드래곤일수록 빨랐다. 다들 안색을 굳히며 수평선 너머를 올려다본다.
‘아니, 이 노인네들이?!’
그러자 상속자는 짜증이 북받쳐 오르는 걸 느꼈다.
‘아무리 고룡이라도 남의 발언을 중간에 막 잘라먹어도 되는 건가?! 다음에 하려던 말이 본론인데!’
치기 어린 분노 속에서 상속자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
그 순간 젊은 용은 다음에 하려던 말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네 형제 중 막내가 시무룩한 얼굴로 정신파를 흘렸다.
하지만 다른 세 형제는 대꾸하는 대신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들은 젠킨슨의 부하들이 준비한 홍콩 모처 안가에 있었다. 서울의 숙소처럼 그 안에는 소년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고, 처음에는 형제들도 별 불만이 없었다. 이곳에 왜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지금까지 모든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갔으니까.
그런데 어제 새벽에 이변이 발생했다. 그 시각, 막내를 제외한 나머지 셋이 갑자기 잠에서 깼다. 흉포하게 도시를 잠식하던 기운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윽고 지진이 홍콩을 뒤흔들었을 때 비로소 넷째까지 깨어났다.
그 뒤로 젠킨슨의 고용인들은 형제들에게 꼼짝 말고 있으라는 말만 남기고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그런 당부는 안 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어차피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소년들은 나갈 수 없었으니까.
=에이, 씨. 셋 다 왜 아무 대꾸가 없어?=
막내는 투덜거린다.
하지만 세 형들은 각자의 이유로 정신이 팔려서 대답할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잠시 후, 문 가까이에서 집중하던 첫째가 눈을 뜬다.
=엄마 목소리가 안 들려. 아무래도 그때 잠깐 결계가 흔들렸던 건가 봐.=
그들의 모친이 이곳에 함께 이송된 사실을 그들은 새벽까지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다.
희미한 정신파를 감지한 것은 첫째였다. 새벽의 지진 직후 그는 익숙한 느낌을 감지하고 외쳤다. 엄마, 엄마다! 방금 엄마였어!
덕분에 형제들은 그녀가 가까이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첫째의 대답에 실망한 막내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둘째와 셋째가 눈감고 집중하고 있었다. 각자가 가진 이능력으로 바깥 상황을 살피는 중.
그걸 본 넷째는 입술을 내밀었다. 성질이 난 것이다.
‘난 대체 언제 저런 능력이 생길까?’
먼저 눈을 뜬 것은 셋째였다.
=후우.=
한숨을 쉬며 이마의 땀을 닦는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용이 없어. 주변에 결계가 너무 많아. 엄마 있는 곳을 막은 그거랑 비슷한 것 같아.=
셋째는 정령을 보내 주변을 살피려고 했다. 하지만 모친이 있다고 추정된 곳도, 지진이 일어난 근방도 강력한 무언가가 정령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결국 그들이 알고 싶었던 두 가지 모두로부터 격리당한 것이다.
이제 희망을 걸 곳은 둘째뿐이었다. 형제들 시선이 모였다.
잠시 후.
=···헉!=
둘째가 눈을 부릅떴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형제들이 다급하게 묻는다.
=어때! 뭔가 보여?=
=엄마 주변까지 짐승을 보냈어? 본 거야?=
=아니면, 밖에 또 무슨 일이 생겼어?=
둘째는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답한다.
=아니, 엄마 가까이는 쥐새끼 한 마리 보낼 수 없어. 벽으로 완전히 막아 놨단 말이야.=
=그럼? 뭘 본 거야?=
둘째는 드루이드 특성을 각성했다.
셋째의 정령 감응력과 마찬가지로 용에게 발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능력이었다. 드래곤에게 다른 짐승은 고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마음은 싹트기 힘들기 마련.
그 희박한 확률을 뚫은 둘째는 밖의 동물들이 전해 준 상황을 전했다.
=지금 밖에···.=
홍콩시의 동물 중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자유로운 부류, 즉 하수구 설치류나 산속 박쥐, 해안가 갈매기 등은 이미 빌딩이 붕괴할 때 멀리 달아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심 곳곳에 남은 동물들이 있었다. 대부분 시민들이 기르는 애완동물이다. 둘째는 그들과 교감한 것이다.
가뜩이나 끔찍했던 새벽을 보내고 두려움에 떨던 동물들은 지금 다시 광란 상태에 빠졌다.
도심 곳곳에서 개와 고양이, 애완조 따위가 공포에 질려 소리 지른다. 그들의 민감한 감각이 무언가를 포착했다.
그 뜻을 해석한 둘째가 떨리는 입술로 옮겼다.
=뭔가··· 아주 크고 위험한 뭔가가··· 여기로 오고 있어!=
그 순간 창밖을 어둠이 덮었다.
***
한낮의 홍콩에 갑작스러운 어스름이 깔렸다.
거대한 물체가 멀리서 수평선을 지우면서 다가왔다. 그것은 도심 상공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멀리 등장하는 방법을 택했다. 텔레포트가 그걸 토해 낸 지점은 도심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해수면 위였다.
그 뒤로 우직하고도 매우 빠른 이동이 이어진다. 비행체는 바다를 가로지르고 홍콩섬을 관통하여 구룡반도로 다가왔다. 놀라운 속도였다. 거리감에 혼동을 느낄 정도로.
비행은 지상의 누구도 놓칠 수 없는 거대한 궤적을 남겼다.
“꺄아아악!”
“저, 저게 뭐야!”
“신고, 신고해!”
일식 그림자와 비슷한 얼룩이 홍콩의 마천루를 차례로 덮었다가 잠시 후 햇빛 아래로 토해 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일반 시민들만큼이나 큰 충격을 받은 존재들이 있었다.
드래곤.
팟!
파파팟!
반사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그 존재를 눈에 담자마자 하늘로 솟구쳐오른 것은 대부분 고룡들이었다. 그들의 뇌리에는 저 비행체가 흉터에 가까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소금 친 생미꾸라지처럼 드래곤들이 연달아 뛰어오른다. 전쟁을 겪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폴리모프를 풀고 본체로 돌아갔다. 하늘을 날개 달린 파충류들이 덮는다.
그리고 그들보다도 높은 고도에서 천천히 다가온 비행체가 드디어 붕괴된 ICC 빌딩의 터··· 골드 드래곤 시신이 놓인 그곳의 하늘 위에 멈췄다.
그것은 반경 6km짜리 촉수 덩어리였다.
“······!”
멀리서, 홍콩 시민들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미 대규모의 지진과 홍콩 최고층 빌딩 붕괴라는 사건을 연이어 겪은 그들이었다.
지독한 비현실감 속에 새벽의 풍경이 재연되었다. 셀 수 없는 수의 드래곤이 하늘을 덮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아찔해지는 광경.
심지어 이번에는 한 가지가 더해졌다.
그 파충류 떼 위에서 꿈틀거리는 청동색 촉수 괴물.
동체 가운데 달린 심연 같은 구체가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짐작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아.
“···신이시여!”
하늘을 눈에 담은 시민들은 서늘함이 목 뒤를 스치는 걸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이 홍콩 멸망의 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창백한 예감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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