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97
198. 막내가 너무 강함 (4)
***
해룡 칼리세나르는 행복하지 않았다.
애초에 ‘행복한 드래곤’이라는 표현 자체가 언어도단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부와 권력을 모두 쥔 자들이 안 행복할 이유가 뭐냐고 혹자는 따지겠지만, 대다수 드래곤은 행복과 거리를 둔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처절하게 투쟁하느라 매일 매일이 전쟁터 같기 때문이다.
물론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순간엔 짜릿한 도취감과 쾌감이 찾아오긴 한다. 하지만 고룡인 그녀 생각에 성취감과 행복은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순간적인 전율이며 후자는 지속적인 안정감이니까.
그걸 알면서도 드래곤은 욕망의 노예 신세를 탈피하지 못한다.
애초에 그렇게 타고 난 것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짓밟고 끊임없이 갈망을 충족시켜야 자아 실현이 가능한 종족이 용이라고, 칼리세나르는 단정지었다.
여하튼, 위의 이유로 좀처럼 행복에 젖을 수 없는 그녀의 스트레스 지수는 요즘 들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 건방진 것들이 요즘 자꾸 내 영지를 탐낸단 말이지.’
이 행성은 진작부터 드래곤적(的)으로 포화 상태다. 하은성이 용체로 비행하자 몇 분만에 다른 용에게 걸린 것이 증거였다. 그가 활공하던 드넓은 (하지만 다른 지성체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원시림처럼, 용이 거하기 좋은 조건의 부지에는 예외 없이 그들이 둥지를 틀었다.
한편, 낭비에 가까운 넓은 영역을 사유지로 삼은 드래곤들이 인구 과포화를 불평하는 마당에 다른 종족의 사정은 뻔할 뻔자였다.
좋은 땅을 전부 용에게 빼앗긴 지성체들은 한정된 좁은 구역에 몰려 살았다. 가뜩이나 희소한 자원이 불공평하게 분배되었으니 경쟁이 치열했고 가격이 미칠 듯이 뛰었다. 다닥다닥 붙은 초고층 빌딩들이 늘어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참고로 간척은 답이 될 수 없었다. 칼리세나르 같은 해룡들이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으니.
헌데, 창 너머로 맞은편 건물 세입자 모공 크기까지 확인할 수 있던 그런 초밀집 초고층 건물들도 어느 순간부터 인가(認可)가 나지 않았다. 주변을 날던 용들로부터 불평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비행할 때 거슬린다는 이유였다.
결국 용외종족은 지하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더 올라갈 수 없으니 낮은 곳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덕분에 그들의 현대 주거 환경은 경제력에 따른 직관적이고도 수직적인 계층화를 보인다. 부유할수록 하늘 높이 상승하고, 가난할수록 땅 밑으로 파고든다.
이런 현실은 드래곤조차 예측 못한 결과를 낳았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용외종족··· 지구로 이민간 그녀의 여동생이 애용하는 표현에 따르면 그 ‘노예들’은 요즘 종족적 자살을 시도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세수(稅收)가 줄고, 노동 가능한 개체수가 급감해서 스트레스 받는 통에!’
적대적인 환경, 혹은 과포화된 서식지에서 새끼를 까지 않는 것은 설치류나 영장류나 마찬가지다.
생산 인구 감소 때문에 고룡들은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고, 이 문제를 다른 드래곤 것을 빼앗아 해결하려고 했다.
칼리세나르 역시 그런 위협을 눈 앞에 둔 고룡 중 하나였다. 자신의 영지에서 벌어진 사건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그런 그녀는 오늘 아침 화들짝 놀랐다.
‘대체 누구야? 날 뭘로 보고 이런 괘씸한 짓을!’
경쟁자들의 침입 시도를 색출하기 위해 매일 한 번씩 펼치는 초정밀 탐색 마법이 이상을 감지한 것이다.
‘내 집 앞마당에 이렇게 큰 결계를?! 어림없지. 누구 눈을 속이려고!’
고룡이라도 전력을 다해야 펼칠 수 있는 거대한 결계.
경쟁자 간이나 보자고 이런 노력을 기울일 고룡은 없다. 정체 모를 상대의 행위를 칼리세나르는 선전포고로 간주했다.
‘감히 나를 건드려? 그래. 싸우자!’
분기탱천한 그녀는 곧바로 레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대로 대양을 가로지르더니 영역의 경계선, 해안가와 가까운 바다에서 결계를 발견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았다.
“정체를 밝혀라!”
각종 주문으로 무장한 용체가 결계의 벽과 충돌한다.
콰지직!
허공을 차폐하던 힘이 무너진다. 다른 이들의 감각을 희롱하기 위해 펼친 결계가 스러졌다.
그리고 드러난, 선 너머의 풍경을 본 순간.
“······!”
칼리세나르는 굳어버렸다.
***
“뭐야, 이거!”
‘이런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고룡이 아니라···.
“엔델리온?!”
해수면 위에 축 늘어진 채 둥둥 뜬, 드래곤 기준으로도 기괴하게 큰 생물.
사방으로 뻗은 촉수도 촉수지만 사이즈 자체가 종족의 증표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왜, 엔델리온이!”
상태를 살핀다.
“죽었나? 그건 아니군.”
상대는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저 무거운 몸이 어떻게 바다에 뜨는지 알 수 없지만 저대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지도 않다.
듣기로 엔델리온은 한, 두 달쯤 숨을 안 쉬어도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했다. 그럴 마음을 먹기까지가 힘들어서 그렇지, 원한다면 별의 바다도 헤엄칠 수 있는 촉수들인 것이다.
정신을 잃은 촉수 괴물.
그리 중얼거리던 칼리세나르의 머리에 한 가지 정보가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설마?!”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번진다.
“틀림없군!”
내게 이런 행운이!
용의 신경계와 핏줄을 따라 쾌감이 차오른다. 벌써부터 지극한 도취감이 흘러 넘쳤다.
짜릿하다.
그래, 드래곤은 이런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원회에서 현상금을 내건 그 촉수다!”
슈탄 왕국에서 그들을 놓친 후 위원회는 전략을 바꿨다.
최대한 비밀스럽게 진행하던 기조에서 탈피, 전 우주에 수배령을 내린 것.
단, 델에 대해서는 조건이 붙었는데 발견하면 건드리지 말고 위원회에 신고하라는 것이었다. 제보만 해도 거액의 달란트가 보장되었다.
“틀림없어. 다른 촉수일 리 없지!”
지금 같은 시기, 고향 밖에서 의식 없이 발견되는 촉수가 달리 또 있을 리가.
“잠깐만, 이대로 신고하러 가기보다는 일단 좀 숨겨 놓아야겠군!”
이런 거대 생물은 눈에 너무 쉽게 띈다.
호시탐탐 영지를 노리던 경쟁자들은 언제라도 현상금을 목표로 한 경쟁자로 탈바꿈할 수 있을 터.
그럼, 어디에 숨길 것인가? 촉수가 위치한 곳은 망망대해 한 가운데다.
답은 쉽게 나왔고, 결정을 내린 이상 행동은 빨랐다. 해룡은 정신을 집중한다.
촤아아!
물에 잠긴 그녀의 옆구리에 늘어선 구멍에서 진동파가 퍼진다.
파동은 쉴 새 없이 수면을 두드렸다. 그녀의 유도에 따라 잔잔하던 바다 표면이 폭풍을 만난 것처럼 출렁이기 시작한다.
촤아아! 철썩!
휘몰아치는 바닷물은 서로 가닥을 엮으며 그물 형태로 촉수를 덮었다. 그대로 거대한 회청색 덩어리를 해수면 아래로 끌어당긴다.
그 모습을 보며 해룡은 미소지었다.
***
그 순간, 해룡의 시선이 닿지 못한 곳.
몇 킬로미터 떨어진 엔델리온의 동체 중심부에서. 한 명의 사제가 요동치는 동공으로 눈 앞의 광경을 보았다.
“시, 신이시여!”
그가 마주한 것은 바다 한 가운데 몸을 일으키는 해일이었다.
그것도, 매우 노골적인 목적을 지닌 해일이다.
“화신께 이 사실을 보고해야···!”
기도를 하자 상서로운 빛이 소환되어 그의 몸을 감쌌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화신이시여!”
그리 불렀지만, 이미 민준은 정신파가 닿지 않는 영역에 있는 모양이다.
사제는 절망감을 느꼈다. 꽤나 오랫동안 신의 증거를 옆에서 모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성력은 그대로이며 기도하는 마음 속 외침조차 화신에게 닿지 않는다.
여차하면 여기 남겨진 몸이 죽는 걸 각오하고라도, 신혈을 채취할 때처럼 유체이탈을 꾀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그때.
사제의 시선이 허공의 한 곳에 멈췄다.
그는 환희 속에서 외친다.
“화신이시여!”
***
갑작스러운 등장을, 해룡 역시 알아차렸다.
”·····?!”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남자.
외견은 평범한 인간종처럼 보이는 ‘노예’다.
하지만 칼리세나르는 그가 등장하자 마자 주변의 마나가 심상치 않은 형태로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정도의 힘을 보유한 자가 촉수 괴물 근처에 나타났다?
칼리세나르는 정체를 쉽게 짐작했다.
“그 탈옥범이로군!”
아무래도 오늘은 몇백 년치 행운이 겹치는 날인 모양이다. 칼리세나르는 짜릿한 기쁨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쉬이익!
민준이 날아든다.
그는 날카로운 직선을 그리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예상을 초월한 스피드를 인지하며, 칼리세나르는 기쁨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왜 저 죄인이 엔델리온과 같은 취급을 받는 거지?’
탈옥범을 잡아 넘기는 대신, 신고만 해도 거액이 보장되는 이유는?
이어서 그녀는 상대가 양손에 쥔 도구를 보았다. 또 한 번 의아해한다. 개중 하나는 이런 상황에서 기대할 법한 종류가 아니기에.
한 손에는 검은 단검을, 다른 손에는 은빛 후라이팬을 쥔 민준의 목적은 명료했다. 일단 저 해룡을 여기에서, 델의 근처에서 최대한 멀리 밀어내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바닷물에 반쯤 잠긴 델의 몸이 들어왔다. 표정이 일그러지고 진득한 분노로 불타올랐다.
민준의 신형이 해룡과 엔델리온의 촉수 사이, 그 틈을 채운 바닷물을 향해 쏟아졌다. 드래곤은 반사적으로 꼬리를 꿈틀거리며 겨냥했다. 다가오는 저 작은 생물을 그대로 쳐낼 작정으로.
하지만 민준이 더 빨랐다.
차폐물 하나 없는 바다 한가운데, 쏟아지는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은색의 팬. 그것의 넓은 바닥이 앞을 향하도록 평평하게 쥔 채, 민준은 해수면 위를 내려친다. 단호하게.
—!
그 순간 고룡은 고막이 터질 듯한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거기 집중할 여유는 없었다. 용의 청각조차 버거움을 느낀 굉음 뒤, 펼쳐진 광경이 그만큼 급박했기 때문이다.
후라이팬의 끝에서, 칼리세나르 정도의 고룡 따위 단숨에 집어 삼킬 듯한 거대한 해일이 휘몰아쳤다.
“이런!”
칼리세나르는 해룡이다. 바다 위에서는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상대.
분명 그래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크라라라라!
찰나, 그녀는 시야에서 수백만 달란트의 기대 소득을 놓쳤다.
하늘과 물보라, 다시 하늘, 물보라.
세상이 계속하여 빙글빙글 돌아간다.
해일이 칼리세나르를 통째로 휩쓸더니 무서운 기세로 밀어낸 것이다. 방향은 민준의 의도대로 델에게서 멀어지는 동시에 육지로 가까워지는 쪽이었다.
쿠르르르!
부서지는 바닷물 파편에 두들겨 맞고, 비늘이 물과 마찰하여 닳다가 꺾이고, 그 아래 살점이 갈리는 와중에도 용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후라이팬으로 해수면을 한 번 내려쳤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민준이 한때 인지한 것처럼, 델이 만들어 준 무기는 소유자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보호하는 반면 대적자는 가루도 안 남기고 분쇄하겠다는 철학이 집대성된 걸작이었다. 방금 이 해일을 만든 민준이나 등 뒤의 촉수 쪽 바닷물은 잔잔하게 일렁일 뿐.
반면 공격 대상이 된 칼리세나르 쪽에는 대양을 통째로 쪼갤 듯한 격렬한 물폭풍이 소환되었다.
어마어마한 힘을 실은 물결.
칼리세나르는 종족이 무색하게도 한참을 쓸려 나갔다. 바다 표범의 몸에 기린 목을 붙인 듯한 생김새의 해룡. 그녀는 물 수제비 폭뢰처럼 수차례 수면 위에 튕겨지며 꺾였다. 용이니 망정이지, 다른 생물이라면 단숨에 으스러졌을 것이다.
이윽고 해룡답게도, 그녀는 간신히 자세를 다시 잡았다. 평소처럼 통통한 몸은 반쯤 수면 아래 감추고 목은 위로 드러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후라이팬이 만든 자연재해는 힘을 잃지 않았고 그녀는 계속 뒤로 밀렸다.
“······?!”
그런 그녀의 시선이, 쫓아오는 죄인에게 닿는다.
탈옥범은 용에게 직선 궤도로 접근하는 대신 몇십 미터 거리를 둔 채 평행선을 그렸다. 저 정도 속도면 이미 바짝 붙어 공격 한 번 날리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11’자에 가까운 경로로, 멀찍이 떨어져서 질주한다.
왜?
그 답을 칼리세나르는 보았다. 팬을 쥐지 않은 민준의 다른 손에는 검은 색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 검날을 폭발하는 그림자가 덮는다.
오늘 민준은 여느 때처럼 괴물로 스스로를 휘감지 않았다. 대신 괴물의 정수를 검에 집중시킨다. 영체도 물체도 아닌 검은 물결이 칼을 따라 자라나더니 그대로 길게, 더 길게 뻗었다.
검은 칼날이 해룡의 윤곽 바로 아래까지 자라난 순간, 평행선을 그리며 날던 민준이 속도를 높였다. 급작스럽게, 폭발적으로!
촤악!
용은 자신도 처음 듣는 처참한 절규를 토했다.
칼리세나르의 왼쪽 옆구리가 비스듬하게 잘려 나간다.
촤차착!
검날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아랫배 밑을 파고들었고, 민준의 움직임에 따라 위쪽으로 평평하게 포를 뜨다 겨드랑이 아래에서 다시 몸밖으로 나왔다. 길고도 짧은 절삭이었다. 덕분에 도려낸 부위는 트롤 수백 명이 함께 덮고 잘 수 있을 용피(龍皮) 이불 비슷한 것이 되었다.
헌데, 탈피 작업이 목적이라기에는 아래에 딸려 붙은 살점이 너무 두툼했다. 비늘 및 가죽과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희뿌연 덩어리. 날것의 고기조각이 피로 새빨갛게 물든 해수면 위에 내팽개쳐졌다.
용은 발악한다. 그 모습을 보며 민준은 그림자를 거두었다. 길게 늘어뜨렸던 그것을 단검 길이로 되돌린 죄인은 날에 맺힌 핏방울에 혀 끝을 댔다.
얼마 전, 스스로에게 한 맹세를 필사적으로 곱씹게 되는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