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42
243. 사람의 자격 (8)
***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민준이 오랜 잠에서 깨고 느낀 예감이었다.
전까지 몇 번이나 겪은 부분 각성과는 달랐다. 깬 것도 잠든 것도 아닌 상태에서 지난한 고통에 시달린 과거와 달리, 확실하고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이제 다시 잠들 수 없어.’
민준은 몸속 마력이 거의 고갈된 걸 발견했다.
용혈을 보관하는 가장 효율적인 용기는 육신이기에, 잠들기 전 충분히 섭취했음에도 그랬다.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동족들은 깰 준비가 안 되었으며 민준은 아사 직전 상태까지 몰려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다!’
이대로는 계속 진행이 불가하니 일단 동족을 깨워야 한다. 시간은 시간대로 소모했는데 진척이 느린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수정해야 할 터.
하지만 당시 민준에게는 그들을 깨울 힘은 커녕, 홀로 떨어져 격리된 셸터에서 빠져나갈 힘조차 없었다.
‘날 깨운 건 외부의 충격인 것 같다.’
민준은 고뇌에 빠진다.
밖은 어떤 상황인가? 우리가 계획보다 오래 부재한 사이 어떤 종족이 지배하고 있는가?
그는 긴 시간 자신을 감춘 벽을 노려보았다. 넓은 우주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공포와 딜레마가 번갈아 정신을 억누른다.
그의 취약한 몸 상태가 갈등의 원인이었다. 무력하기에 타인이 필요하지만, 무력하기에 타인을 피해야 한다.
‘저 벽 너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은 어디에 치우쳐 있을까?
이 쉘터를 감춘 결계를 없애면. 다가올 자는 도움의 손길과 날카로운 비수 중 무엇을 내밀 것인가?
‘달리 방법이 없다.’
결국 그는 결계를 없애고 남은 모든 에너지를 생명 유지에 쏟아 부었다.
누군가 자신을 찾아낸다면, 상대는 엔델리온일 가능성이 크리라 예측하면서.
‘우주의 파편화가 완료되었겠지만, 그들이라면 벽을 넘을 기술을 개발했을 수도 있어. 아직까지 멸종하지 않았다면.’
그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시간이 지나고, 그가 숨은 쉘터로 다가온 우주선의 탑승자는···.
=맙소사! 당신은··· 괜찮습니까? 지금, 내가 말하는 의미가 전달되고 있습니까?=
그를 구조하러 온 종족은 환형 생물에서 진화한 지성체였다.
온몸을 덮은 갈색 털과, 소용돌이를 그리듯 말린 머리.
민준의 기억과 약간 다르지만 선조를 착각할 수가 없는 외양이었다.
‘말도 안 돼, 카바이트?!’
그 해수들이 우주선을 건조할 만큼 발전했는가?!
민준은 어쩌면 자신이 파악한 시간 간극이, 그를 곤경에 빠뜨린 계산 오류가 걱정한 것보다도 더 심각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자, 함께 가시지요.=
카바이트는 민준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일부러 용혈을 구해달라는 직접적인 요청 대신 온갖 생명체들의 피를 구해달라는 어려운 부탁을 했지만 카바이트는 순순히 응했다. 그 외에도 민준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했다.
환형 생물의 호의 덕에 민준은 용혈을 마실 수 있었다. 마른 흙을 적시는 축복의 비처럼 힘이 세포를 채웠다. 예전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약했지만 겨우 숨통이 트였다.
까마득한 시간을 넘어 처음으로 목을 축이는 감동 속에, 민준은 생각했다.
‘예전에 저들의 선조가 내 눈에 띄면 불태우기에 바빴건만.’
목장주 시절 그는 카바이트를 발견하는 즉시 산 채로 소각하곤 했다. 그들은 용치기에게 해로운 짐승이었기 때문이다. 아예 씨를 말릴까도 고민했지만 지나친 조치 같아서 멈췄다.
살처분 대상이였던 생물들의 후손이 이렇게 진화해서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니.
세상의 섭리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호의가 꼭 호의로 돌아오지 않고, 적의가 꼭 적의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마른 목을 축이며, 민준은 복잡한 심정으로 자문했다.
‘내가 그때 카바이트를 멸종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불길에 휩싸여 꿈틀거리던 짐승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
민준은 불길에 먹혀 꿈틀거리는 카바이트들을 담담히 내려보았다.
화르르륵!
경비병들은 제각기 네다섯 조각으로 동강난 상태다. 절단된 몸뚱아리는 힘을 잃고 늘어지는 대신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살점과 체액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화염을 뚫고 처절한 비명이 울린다.
끼이이이익!
민준은 불꽃이 저들을 완전히 연소시키고 흔적을 지우게 주문을 설계한 뒤 등을 돌렸다.
그리고 자문한다.
‘내가 그때 카바이트를 멸종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엔델리온이나 토드가 그를 발견했겠지. 그래도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드래곤에게 발견되었을 수도.’
고대 종족과 드래곤을 비교해 본다. 그들의 사고방식과 본성을.
과연, 무언가 달라졌을까?
민준은 속으로 부정한다.
‘놈들도 결국 비슷한 짓을 꾸몄겠지.’
민준은 자신이 실패한 이유를 안다.
‘난 짐승들의 본성을 무시하고 과소평가한 거다.’
민준이 카바이트에게 한 약속은 무의미했다. 태초의 종족이 모두 깨어나면, 그들이 구축한 집단 지성으로 카바이트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약조를 짐승들은 무시한 것이다.
카바이트가 처음 마주한 태초의 종족이 민준이라는 무방비하고도 약한 존재였기에, 그들은 나머지를 깨우는 대신 배신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다.
‘그때 내가 골랐어야 하는 선택지는··· 까마득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홀로 용을 사냥하면서 힘을 회복하고 용릉을 직접 수복하는 것이었다.’
카바이트의 배신이 남긴 유일한 선물은, 그 시나리오 대비 필요한 시간을 대폭 줄이고 드래곤 대신 다른 짐승을 희생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민준에게는 그럴 명분이 있었다.
***
용릉의 최상부.
마정석 생산라인으로 이어지는 통로 앞 개방된 공간에 카바이트 호위병들이 모여 있었다. 상당수는 본래 여기 배치된 이들이 아니라 오늘 방문한 고위급 인사를 경호하기 위해 본부에서 온 자들이었다.
‘대위원께서 오늘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시는군.’
경호를 맡은 카바이트들은 하층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까마득히 모른 채였다.
그런 그들 눈에 느닷없는 광경이 비춰졌다.
“어··· 어?!”
입구 쪽 카바이트 한 명이 갑자기 몸을 허공에 띄웠다.
주문을 외우는 기미는 없었으니 염동력 종류의 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
아니 잠깐··· 저 녀석에게 저런 능력이 있었던가? 그런데 갑자기 왜?
“거기, 지금 뭐 해?”
결계에는 반응이 없었으며 능력자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접근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카바이트가 스스로 공중부양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곧,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아니야! 이건 내가 하는게 아니··· 우으으읍!”
그를 향해 경악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평소에는 긴 뱀과 비슷한 형태였던 카바이트의 몸이, 파티용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우··· 우으으으읍!”
카바이트의 표피는 포유류 따위의 살가죽보다 뛰어난 신축성을 자랑했다. 늘어나는 성질만 따지면 창자와 비슷할 정도였다.
병사의 몸이 급속도로 팽창한다. 한계를 모르고, 계속하여.
“우으으으··· 살려······.”
곧 음성마저 뭉개졌다. 극도로 늘어난 표피 점막은 투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 너머로 꿈틀거리는 장기의 움직임이 그대로 보였다. 상대적으로 연약한 안구는 진작에 찢어져서 팽팽한 피부 위에 눈물처럼 흘렀다. 강제로 늘린 그의 몸은 이미 실내 공간의 절반 이상을 잡아먹었다. 이 현상이 고작 몇 초 사이에 벌어졌다.
그리고.
펑!
폭죽이 터지듯 허공에서 카바이트가 폭발했다. 동시에 묵직한 충격파가 실내를 강타했다.
그리고 카바이트들은 동료의 폭사가 연쇄 공격의 반석임을 알게 되었다.
수천 개 파편으로 쪼개진 살점과 장기가 폭우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그 모든 조각이 강력한 힘을 담고 있었다. 클레이모어 탄환처럼 주변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긴다.
모든 방향으로 쏟아진 공격 앞에 보호구마저 속수무책이었다. 아티팩트가 만든 무형 장막을 뚫고 동료의 조각들이 총탄처럼 관통했다.
순식간에 모여 있던 병사들 중 절반이 허물어졌다.
“치··· 침입자! 침입자다아아!”
카바이트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적의 모습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숨어 들어왔는가? 이 앞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다 어떻게······.
‘잠깐!’
곧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아직도 기지에 경보음이 울리지 않는다. 본부는 아직도 침입자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존재는!’
크르르르!
그들의 상념이 끊겼다.
방금 전 온몸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던 카바이트들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분명 즉사했던 자들이 다시 움직인다.
“키이이!”
생존자들은 보지 못했다. 방금 전 사망한 동료들의 혼이, 태반은 망령으로 전락한 그 정신체들이 힘에 구속되는 장면을.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망령들은 다시 몸속으로 빨려들어가 묶였다. 그리고 그들을 지배하는 목소리에 따라 움직였다.
“언데드!”
고대 종족의 존엄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 앞에 병사들은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죽은 카바이트가 부림 받는 모습은 과거 전쟁에서도 못 본 참상이었다.
“캬아아아아!”
턱뼈가 없는 카바이트의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다. 시체들은 살아있는 동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원형의 입 둘레를 따라 늘어선 이빨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콰지직!
뱀이 뱀을 머리부터 삼키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시체의 아가리에서는 자신의 체액과 씹고 있는 동료의 체액이 섞여 부글거리며 흘러내렸다.
‘안쪽에 상황을 알려야 해! 어서 대위원님을 대피시켜야!’
생산 라인 쪽 게이트에 있던 경비병은 그리 판단했다. 그리고 먹통이 된 통신기에 의존하는 대신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아비규환으로 부터 등을 돌리고 게이트로 달려간다.
공기를 찢는 굉음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쐐애액!
“크아아악!”
날아든 것은 예리한 얼음 송곳이었다.
그것은 도주하던 자의 목덜미를 뚫고 그 몸을 게이트 옆의 벽에 박아 넣었다.
카바이트는 얼음으로 못박힌 채 육신을 대롱거리며 뱀장어처럼 발악했다. 길다란 몸이 탄성 있게 요동치며 벽을 두드릴 때마다 체액이 채찍 자국처럼 남았다.
그 공격은 아시프-1의 것이었다. 카바이트 중 기민한 자들은 날아온 방향을 보고 적의 위치를 가늠했다. 총구에서 광자포탄이 쏟아진다.
아시프-1은 혀를 차며 하늘로 몸을 날렸다. 그의 은신도 그때 깨졌다.
‘기왕 노출된 이상.’
그의 몸속에서 생명력이 들끓으며 마력으로 변환되었다.
입술을 달싹거리자.
콰르릉!
허공에 뜬 아시프-1의 몸에서 섬광 다발이 혈관처럼 가지를 치며 뻗어나왔다. 전격은 언데드를 피해 도망치던 카바이트들을 직격했다.
“캬아아악!”
지지지직!
전류에 직격당한 카바이트의 호흡기에서 보라색 체액이 끓어오르더니 잠시 후에는 검고 걸죽한 타르 같은 것이 넘쳐 흘렀다.
쿵!
번개를 맞은 그들이 차례로 땅에 쓰러진 순간. 아시프-1은 벽에 꽂아놓은 놈 쪽을 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미 손을 쓴 모양이다. 카바이트의 꼬리부터 걸죽한 점액질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격렬하게 요동치던 놈은 가슴께까지 분해되자 힘이 쫙 빠져서 흐느적 거리더니, 벽에 꽂힌 목덜미 부근만 남았을 때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으아아··· 으아아악!”
“살려 줘! 안 돼. 먹지 마··· 저리 가! 아아악!”
지상에는 산 채로 죽은 동료에게 먹히는 자들의 절규가 가득했다. 민준이 만든 언데드가 충실하게 날뛰고 있었다. 이쪽 상황은 거의 정리된 것 같다.
아시프-1은 그들을 가로질러 생산 라인으로 연결되는 게이트 앞에 섰다.
그는 정신파로 민준에게 허락을 구했고 답은 바로 돌아왔다.
쾅!
그들을 가로막던 결계가 폭발하며 산산조각 났다.
***
“대위원님 왜 그러십니까?”
용릉의 관리인은 대화 도중에 갑자기 굳어버린 대위원을 보며 의아해했다.
“······아무것도 아닐세.”
최고위직의 카바이트는 태연하게 화제를 돌린다. 하지만 마음 속에 기이한 느낌이 꾸물거렸다.
‘방금, 뭐였지?’
이 늙은 카바이트는 본래 감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방금 전의 그것, 도저히 외면하기 힘든 진득한 예감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치달린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