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55
55. 21세기 로빈 후드 (9) >
***
=창천··· 창천··· 제발!=
지독한 공포 속에서 하은성은 망령을 응시했다.
‘내가 찾는 유령은 어디 가고 이런 무시무시한 영체가···.’
분명, 누군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행한 짓이다.
처음 봤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주변에 보였다. 무당이 아닌 사람도 망령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도와주는 마법진과 그 밖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진이 결계 너머에 구축되어 있었다.
감금을 도운 자는 영체감응력을 지니고 있겠지만 부수적인 마법진까지 설치한 것을 보니 이곳의 주인은 그런 능력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 굳이 이런 노력까지 기울여가며 망령을 관찰해야 하는가? 대화도 불가능한, 광기에 물든 영체에게 무슨 볼 일이 있어서?
그리고, 대체 왜 가뒀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살려··· 줘!=
화르륵!
‘앗, 뜨거!’
망령이 뿜어내는 영적인 열기가, 같은 영체인 유령의 정신에 고통을 주었다.
‘여기 오래 있으면 위험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찰나.
우웅!
하은성은 망연자실하게 내면을 관조했다.
‘아씨, 이건 또 뭐야!’
익숙한 빛이었다.
창천은행 본점 금고 안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광채.
그가 손을 댄 순간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진 거대한 결정. 그것이 뿜어내던 영롱한 빛이 하은성의 영체로부터 은은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역시 그냥 증발한 게 아니었어!’
하은성은 그때 자신이 본 것과 느낀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확신했다.
‘달란트’라는 요상한 이름의 화폐는 영계로 튕겨 나간 것이 아니다. 이 안에 흡수되어 있었던 거다. 지금까지 티가 나지 않아서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그 이유로 짐작되는 것을 곧 시야에 포착했다. 망령을 가둔 결계 안에 설치된 각종 마법진 중 하나가 섬광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은성 안에서 일렁이는 빛과 공명하듯이.
‘여기에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아직 모든 공간을 탐사하지는 못했지만 하은성은 결국 포기하고 레어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레드 스타 조직원 중 그가 유일하게 접선할 수 있는 그녀가 기다리는 장소로 날아갔다.
레어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여자의 표정에는 별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걸 듣고도 안 놀래? 용 둥지에 용 귀신이 있었다니까!’
여자는 차분하게 귀를 기울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결국 레어를 전부 탐사하지는 못했단 말이죠?”
=······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왠지 주눅이 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흐음··· 그래요.”
여자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럼 탐색한 부분까지라도 내부 구조를 묘사해 주시겠어요?”
하은성은 받아 적으면 그대로 지도를 그려도 될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했다. 여자는 유령처럼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지 못한 터라 빠르게 타이핑하여 문서화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쉬세요. 사흘 뒤에 다시 이곳에서 보죠.
=아··· 저기.=
하은성은 자기 안에서 번쩍이던 광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말해 봤자 더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머뭇거리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왜 그러시죠?”
=사흘 뒤에 또 그 레어로 가야 하나요?=
“네. 저희도 지금까지 파악된 정보를 가지고 논의가 필요해서요. 다음 침입은 그 후에 속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저기, 그거 안 하면 안 될까요?”
지금까지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여자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그걸 본 하은성은 생각했다. 왠지, 표정관리를 실패했다기보다는 자신이 눈치챌 수 있도록 일부러 그런 것 같다고.
“왜 그러시죠?”
=아무래도 너무 위험한 것 같아서···.=
은행 금고와 레어까지 뒤지고 다닌 마당에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좀 아니다 싶었지만, 하은성은 그곳에서 본 망령 때문에 매우 위축된 상태였다.
“이번에 직접 경험해 보셨잖아요. 드래곤의 레어라고 해도 그 능력 앞에는 속수무책이라는 걸.”
=그래도, 용이잖아요. 전 들어가기 전까지는 거기 용 망령이 붙잡혀 있을 거라고 상상 못했어요. 아직 못 가본 곳까지 들쑤시다 보면 더 끔찍하고 생각도 못한 게 나올지도···.=
“하은성 씨.”
여자는 온화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동생들을 생각하셔야죠.”
=······.=
하은성도 알고 있다.
동생을 원조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내민 서류만 봐도, 그들은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있었다. 두 여동생이 이사한 집을 알아봐 준 것도 레드 스타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동생들의 행적을 손바닥 보듯 추적할 수 있다.
여자가 못박듯 말했다.
“참, 막내 동생 분께서 아주 큰 결심을 하셨던데요. 원하시면 저희가 괜찮은 의사를 소개해 드리려고 해요.”
=······!=
“그 분야 최고의 권위자 분들을 잘 알거든요. 저희가요.”
막내는 생활고가 해결되자 어떤 수술을 하고 싶다며 둘째에게 조르는 중이었다. 동생들이 잘 지내는지 확인하기 위해 둘이 모르게 집에 들르곤 하는 하은성은 여자의 이야기를 알아들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그는 막내의 성격을 안다. 저런 화제를 수치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에 가족이 아닌 사람 앞에서는 절대 입에 올리지 않는다.
레드 스타가 저걸 안다는 것은 둘 사이에만 오간 대화를 들었다는 뜻이다.
여자는 유령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사흘 뒤에 여기서 다시 뵙지요.”
***
동철은 고블린 기준으로 꽤나 고소득자다.
몸이 불편한 레이크필드의 수발을 드는 일은 물론 서점의 잡일까지 해결하므로 근무시간이 긴 편이었고, 그의 고용주인 엘프는 만근수당 및 연장근무수당을 칼 같이 챙겨주었으며 애초에 기본급 자체가 높았다.
최저임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고블린의 급여는 같은 일을 하는 타 종족보다 낮게 지불하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런 관행을 엘프는 부조리하다고 보았고 그저 다른 종족과 평등하게 지급했을 뿐인데 단숨에 종족 기준 상위 1%의 고소득자가 되는 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다.
“어··· 동철! 동철이다···!”
두 손에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오는 동철을 텐트촌 빈민들이 반겼다. 그들 모두 오크 커뮤니티 외곽에서 노숙하는 고블린들이다.
예상치 못한 일로 민준과 인연이 닿아 취업을 알선받기 전까지 동철도 이 동네에 살았다. 처음에는 그나마 지붕이라도 있는 쪽방촌에 모여 살았는데 몇 년 전부터는 그곳에서조차 살 수 없게 되어 거리로 나왔다.
동철은 서점에서 일을 시작하여 이사를 나간 뒤에도 종종 도시락을 몇십인분씩 사서 여길 방문한다.
자신의 월급으로 이들을 삼시세끼 먹여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런 도움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는 등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먹고 맛있다고 생각한 것을 친구들도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와! 맛있겠다···!”
다들 얼굴에 화색이 돌며 도시락에 얼굴을 처박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한 번은 레이크필드의 조언을 듣고 휴대용 버너로 조리가 가능하면서도 장기 보관이 가능한 간편식을 몇 박스 사다 준 적이 있는데 그 결과를 확인하고 바로 방법을 바꿨다. 굶주림이 일상화된 그들은 열흘 치 식량을 받으면 그걸 10일 동안 나눠 먹는 대신 배가 터질 때까지 폭식하여 2, 3일이면 다 먹어 치웠던 것이다.
그 뒤로 동철은 딱 그날 먹을 도시락과 이틀 정도 먹을 보존식을 사 들고 온다. 그만큼 자주 방문해야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텐트가 있던 자리가 비어 있다. 동철은 정신없이 식사하는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그새 수가 많이 줄었다.
그는 한 명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물었다.
“저기··· 저 사람들··· 다 어디갔어? 경수랑··· 윤희는?”
“아··· 그게.···”
고블린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느릿하게 말한다.
“걔네들··· 드래곤한테….”
동철은 기겁을 했다.
“······잡아 먹혔어?!”
머릿속에 에델리네스가 떠올랐다. 사장님에게 못된 짓을 하려다 실패하고 주인님에게 혼쭐났다는 못된 드래곤.
악몽과 같은 기억이었다.
설마 또 어떤 용이 이런 곳까지 와서 친구를 잡아먹었단 말인가?!
“······아니, 드래곤한테······ 갔어.”
동철은 생각했다. 그게 그거 아닌가?
하지만 띄엄띄엄 이어지는 친구의 말을 듣고는 상황을 파악했다.
얼마 전부터 오크 커뮤니티 곳곳에 무료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친구의 표현을 빌어 ‘훌륭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훌륭한 드래곤’이 고용한 이들이었는데 병자들을 무료로 입원시키고 치료도 해주겠다 제안했다고.
사람들은 처음엔 의심했지만 그 약속을 실제로 지킨다는 소문이 쫙 퍼지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 오크, 고블린 구분 없이 모든 이들을 환영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병세가 깊지 않은 빈민들도 치료원 내에 머물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 삼시세끼가 꼬박꼬박 제공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동철은 알 수 없었지만 사실 그 치료원은 창천이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민준에게 보여준 프로젝트 계획서는 빈 부지에 대규모로 새로 짓는 의료원에 대한 내용이었고, 그전부터 이미 기존 병원 건물을 매입하여 빈민 구제를 시작한 지 오래였던 것이다.
“그럼··· 너희들은··· 왜··· 안 갔어?”
“드래곤··· 이잖아. 나중에··· 잡아먹으면··· 어떡해.”
용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굶주림도 이겨내게 만들었다.
그 본능에 충실한 고블린은 길거리에 남았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병세의 위중과 상관없이 밥과 잠자리를 찾아 의료원으로 향했다는 이야기.
친구는 중얼거렸다.
“난··· 무서워. 진짜로··· 훌륭한··· 드래곤이··· 있을까?”
그의 말을 들은 동철은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에델리네스를 떠올렸다.
하찮은 쓰레기를 내려 보는 듯했던 차가운 눈빛.
한 명의 사람이라기 보다는 길가에 묻은 오물을 바라보는 것 같던 표정.
동철은 믿을 수 없었다.
‘착한··· 드래곤이라고?’
***
하은성은 동생들의 집으로 갔다.
자신이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레드 스타잖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의 사도.
그런 이들이 왜 자신을 협박하겠는가?
집에 도착한 하은성은 물질 저항을 받지 않는 영체의 특징을 십분 살려 곳곳을 살폈다. 그 결과,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와 마법진으로 보이는 작은 표식을 몇 개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걸 확인한 하은성은 아연실색했다.
‘감시하고 있어!’
정신이 아찔했다.
‘어떡하지?!’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두 여동생의 대화가 들렸다. 이곳에 죽은 오빠가 와 있다고는 상상도 못한 채 말싸움을 한다.
“언니! 제발, 내 소원이야!”
“시끄러워.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 다시는 꺼내지 마! 너 진짜 미쳤니? 지금까지 그런 말 한 번도 안 하다가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그땐 돈이 없으니까 말 안했지! 나도 양심은 있으니까. 당장 먹고 살 돈이 없는데 수술을 어떻게 하겠어? 그런데, 이젠 돈이 있잖아!”
“이 돈이 우리 돈이야?”
“우리 돈이지! 우리 쓰라고 준 돈이니까, 우리 돈이지!”
“어디 재단에서 주는 건지 알지도 못하잖아. 지금은 들어와도 언제 끊길지 몰라. 잘 저축해 둬야지!”
“언니, 나 이대로는 진짜 못 살겠어. 제발 수술시켜 줘!”
언니에게 조르는 중인 막내 동생의 친부는 오크였다.
하프 오크 여고생의 삶이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것은 하은성도 알았지만 저 정도로 진심일 줄은 몰랐다.
미의 기준이 엘프와 인간에게 맞춰진 세상에서 그들처럼 날씬해지고 싶다고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거식증 오크 소녀가 늘어난다는 뉴스는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다만, 하프 오크의 경우는 더 심했다. 둘 중 어떤 종족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그들은 최대한 인간에 가까워지려는 꿈을 꾸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일부는 어마어마한 빚을 내서 전신을 갈아 엎는 수술을 받았고 몸이 산 채로 갈리는 고통을 이겨냈다.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 뼈를 깎아야 하니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 그만해! 수술받다가 죽으면 어떡해? 이제 간신히 먹고 살 만하게 됐는데···!”
“아니야, 나 어차피 이대로는 취직도 못하고 결혼도 못 해.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거야? 먹는 걱정 사라졌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 되냐고! 언니는 그렇겠지. 순혈이니까. 그런데 나는 아니야!”
둘의 싸움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동생들 곁에 둥실 떠서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결국 결심을 내렸다.
‘······계속 협력하는 수밖에 없잖아?’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도 결국 예감에 불과하다. 드래곤의 레어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들락거려도 아무 일 없이 잘 마무리될 수도 있다.
다만,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위험은 과연 여자가 자신에게 어디까지, 무엇까지 요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하은성은 이제 레드 스타가 그가 생각했던 정의의 사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었다.
사실이라면, 상상만해도 섬뜩했다.
=······젠장!=
유령은 벽을 뚫고 집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통과해서 외부로 나올 때까지 여전히 생각에 깊이 빠진 상태였다. 따라서 하은성은 누군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갈 뻔했다.
“어이, 거기.”
=?!=
하은성은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했다.
‘뭐야, 아니잖아?’
유령은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무당인지 아닌지.
방금 목소리를 낸 남자는 영체감응력자가 아니었다. 산 사람을 불렀는데 괜히 자신이 반응한 모양이다. 그런데.
‘······음? 아무도 없는데?’
주변에는 통행인이 전무했다. 전화 통화 중이었나?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갈 길을 가려던 순간···
다시 생각이 미쳤다.
‘잠깐만, 여기 15층인데?’
남자는 15층 높이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마법사.
“어딜 봐. 그래, 너 말이야.”
결국 하은성은 자신이 무당이 아닌 사람에게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내가 보여요?=
“그래, 보인다. 목에 칼 꽂힌 펭귄.”
자신을 이민국 요원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유령들 사이에서 수소문을 해서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하은성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유령 친구들이 그의 영체가 어떤 모습인지는 알아도 동생들이 새로 이사간 집까지 알 리는 없다.
뭔가 잘못되었다.
‘도망가야 해!’
쉬이익!
하은성은 영력을 모두 끌어 모았다. 그대로 빠른 속도로 날아가려고 시도했다. 다급한 도피.
하지만···.
=키키키킥!=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마··· 망령들이 왜?!’
도시를 방황하던 망령들 중 일부가 갑자기 하은성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저, 저리 가!=
용의 망령이 불러 일으킨 영적 불꽃 때문에 뜨거움을 느꼈던 것처럼, 지금 몰려드는 망령들 역시 그의 영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저 미친 귀신들이 왜 갑자기 자신을 타겟으로 몰려 드냐는 거다.
사령술의 개념을 알지 못하는 평범한 지구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한편 이 망령들을 임시로 권속으로 만들고 부리는 남자, 예민준은 고스트의 목에 꽂힌 칼 손잡이를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물론 지구에서 본 것은 아닐 터다.
=아, 안 돼!=
=키키킥! 키키키킥!=
유령 한 명과 망령 다수 사이에 벌어진 추격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죄인을 끌고 오는 포졸처럼 망령들이 우르르 달라붙은 채 하은성을 데리고 왔다.
=대체 누구세요? 저한테 왜 이러시는데요?!=
하은성은 잔뜩 겁먹은 채 물었다.
무당이 아니면서 귀신을 보고 망령을 수족처럼 부리는 이능력자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고, 그렇기에 더욱 큰 공포로 다가왔다.
고덕환이 장담했던 것처럼 자신이 완벽한 ‘먼치킨 유령’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좌절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유령 선배의 말은 반만 맞았다. 그는 퇴마 계열 마법에 면역이기는 하나 세상에는 다른 방식으로 귀신을 제압하는 방법이 존재했던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대신 귀신을 부리는 방법이!
민준은 덤덤하게 말했다.
“알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주면 돼.”
=······.=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일이 먼저였다.
레드 스타 간부들의 증언을 득한 뒤 민준은 창천의 레어로 향했지만 그녀는 그의 출입을 불허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신 그녀의 부하 중 영체감응력자가 있어서 레어를 수색했고 그 결과 내부에는 ‘어떤 유령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창천이 굳이 유령을 숨겨주는 것이 아닌 이상 이미 밖으로 도주한 것이 분명했으므로 민준은 방법을 바꿨다. 그 귀신이 살아 있을 당시 신분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아직 생존 중인 동생들 집을 찾았다가 결국 용의자를 발견한 것이다.
민준은 레드 스타 간부들에게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을 꺼냈다.
“달란트 어딨어?”
=······.!=
그렇게 묻는 민준의 말에는 하은성이 죽고 난 후로 느껴 본 적 없는 권위와 격이 느껴졌다.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죽었다고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귀신이라고 100% 안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는 으름장.
하은성은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에 의해 억압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망령들처럼 정신이 완전히 지배당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에 실린 무게에 압도당한 유령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실토해냈다.
그의 말을 들은 민준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겁에 질린 하은성은 앞뒤 다 잘라먹고 대뜸 은행에 침투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가 금고에 들어간 순간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철수하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실토한 직후, 민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윽박질렀다.
“지금 나보고 그걸 믿으라는 거냐?”
=다 사실이에요! 거짓말 한 거 없어요!=
“달란트를 흡수했다고? 네 영체 속으로?!”
그렇게 추궁하는 민준의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하은성은 기절하고 싶었지만 영체인지라 정신을 잃을 수도 없었다.
=지··· 진짠데!=
하은성은 울고 싶었다.
“그리고.”
민준의 여전히 날이 선 어조로 질문을 바꿨다. 누구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냐는 내용이었다.
그제서야 하은성은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았던 레드 스타의 이름을 꺼냈다. 그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심문인 역시 알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유령과 그들 사이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들은 순간 민준의 표정이 또 한번 바뀌었다.
“나, 참. 오늘 별 괴상망측한 이야기를 계속 듣네.”
=?=
“뭐? 드래곤한테 붙잡혀 간 귀신을 찾으려고 침입한 거라고? 유령 하나 구하려고 은행과 레어에 불법침입을 했어?”
하은성은 억울했다. 진술에는 한 점의 거짓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의(大義)가 없었다면 애초에 응하지 않았을 거래였다.
“더군다나, 그 귀신은 몇 달 동안 김광우 회장을 미행하다가 실종되었고?”
=그렇다고 했어요!=
그는 여자가 한 말을 그대로 옮겼다. 유령의 기억력을 감안하면 왜곡되었을 리도 없다.
하지만 민준은 여전히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야. 혹시, 너 같이 특이한 귀신이 또 있냐?”
=······?!=
유령은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민준이 문장을 구체화했다. 그는 하은성을 붙잡고 난 뒤 이미 한 가지 실험을 마친 뒤였다.
“넌 유령인데 퇴마 계열 주문이 안 통하잖아. 비슷하게, 무당 눈에 안 보이는 유령도 있냐는 거야.”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인가 싶었지만 목에 칼을 들이민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순순히 답했다.
=아니요? 아직 그런 유령은 못 봤는데요···.=
민준이 짜증이 섞인 투로 말했다.
“그럼 결국 너도 이용당한 거군.”
=?!=
동생들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싶었지만 이어진 민준의 말은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유령은 없었다는 거다. 드래곤에게 감금당한 레드 스타의 조력자 말이야.”
=그게 무슨!=
“그럼 묻지. 대체 얼마나 뛰어난 유령이어야, 귀신을 볼 수 있는 남자를 몇 달 동안 안 들키고 추적할 수가 있냐?”
유령은 말을 잇지 못했고 그 표정을 본 민준은 하은성 역시 레드 스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확신할 이유가 있었다.
김광우 회장과 관련된,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를 민준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창천과 같이 사업을 준비하다가 엉뚱한 핑계를 대고 잠적해 버린 그 오크는···.
“김광우 회장은 영체감응력자다.”
=?!=
즉, 그는 영체를 보고 들을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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