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16
216
뉴스에서는 끊임없이 내전과 어려운 경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결코 먹고 마시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나라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수도 프리타운에서는 누가 어디서 비참하게 죽어 나가든 타인의 일일 뿐이었다.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라고 하여도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부나방을 현혹하듯 밝게 반짝였다.
혁권은 김덕현 전무와 나란히 해변 인근에 위치한 레스토랑 예약석에 앉아 두 번째로 시계를 확인했다.
처음은 갓 도착했을 때 약속 시간을 확인한 것이고, 이번엔 짧은 기다림이 지루해서였다.
벌써 10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두테 장관은 아직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설마 바람을 맞히진 않겠지만, 누가 우위에 있는지 과시하려는 것처럼 일부러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혁권은 테이블에 완벽하게 세팅된 접시와 나이프를 보다가 다시금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맹물로 목을 축였다.
“미스터 존슨?”
갑자기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 보니 수행원들을 잔뜩 거느린 덩치 큰 흑인이 어느새 테이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하하, 역시 내 직감이 맞았군!”
그는 양팔을 크게 벌리며 혁권에게 악수를 청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장관님.”
“그리 깍듯하게 인사할 필요 없소, 공적인 만남도 아니고 즐거운 식사를 위해 만난 자리 아니오. 그건 그렇고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내 위치가 위치다 보니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사무실을 뜨는 게 좀 지체됐소이다.”
그는 혁권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경쾌하게 지껄이며 날카로운 인상의 경호원이 빼 준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그사이 혁권은 두테 장관과 함께 온 사다 대령하고도 인사를 나눴다.
거만한 자세로 앉은 두테 장관의 양복 셔츠 사이로 언뜻 보이는 금장 롤렉스 시계를 발견한 혁권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선물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아아, 말도 마시오. 내가 개인적으로 시계 수집이 취미라 처음 받았을 때 매우 놀랐소. 어쩜 이렇게 취향에 쏙 드는 선물을 줄 수 있는지, 미스터 존슨의 센스에 아주 감명받았소이다.”
“그러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때 웨이터 대신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지배인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여긴 비프 웰링턴Beef Wellington이 맛있소.”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두테 장관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요즘엔 푸아그라 대신 닭 간을 쓰는 곳이 많은데 여긴 원래 레시피 그대로 음식을 만들어서 맛이 제대로 살아 있소.”
“그럼 저도 그걸로 하겠습니다.”
나머지 사람들한테도 주문을 받은 지배인이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자리를 비키자 두테 장관이 와인 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잔합시다.”
“예.”
쨍, 하고 가볍게 글라스를 부딪친 네 사람은 동시에 붉은 액체를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음, 좋군.”
와인 맛이 괜찮았는지 두테 장관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광산업을 한다고 들었소?”
“광산업은 이번에 손을 댄 것이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호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사업을 크게 하는 모양이오.”
눈을 살짝 빛내며 두테 장관이 대단하다는 듯 말하자 그는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아닙니다. 이것저것 관심을 두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때마침 음식이 하나둘 나오자 가벼운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식사를 했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깨끗이 비운 접시를 한쪽으로 밀어 놓은 두테 장관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그를 봤다.
“그냥 밥이나 먹자고 이런 비싼 선물을 보내지는 않았을 테고, 이제 용건을 말해 보시오.”
그러자 입안에 있던 음식을 삼킨 혁권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저희 회사가 시에라리온에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권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들었소. 코노 지역이라고 하던데…….”
“맞습니다. 그런데 기초 조사를 끝내고 많은 돈을 투자해서 본격적으로 광산을 개발하려던 찰나에 뜻밖의 변수가 발생하는 바람에 계획이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습니다.”
“반군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그놈들로 인해 생긴 피해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오. 하지만 곧 반군을 격퇴하고 코노 지역을 탈환할 수 있을 테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보시오.”
수도인 프리타운도 국경에 배치된 병력까지 투입해 겨우 지켜 냈으면서 동부 지역을 대부분 장악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는 반군을 물리치겠다니, 그는 내심 코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혁권은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은 채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러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산 개발을 위해 각종 장비와 인력을 다 준비해 놓은 상태에서 매일 적지 않은 유지비가 빠져나가는 것이 저희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두테 장관은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자신이 손해 보는 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기에 혁권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하나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게 뭐요?”
“저희가 광산 개발권을 획득한 지역에 용병들을 투입해서 무단으로 점령하고 있는 반군을 쫓아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순간 두테 장관은 물론이고 동석해 있던 사다 대령까지 몸을 그대로 굳힌 채 눈썹을 치켜 올렸다.
“지금 뭐라고 했소!”
대번에 얼굴 표정이 변한 두테 장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봤지만 혁권은 전혀 위축되는 것이 없었다.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코노 지역 전체는 어렵겠지만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시두 일대를 되찾아 드릴 테니 용병 부대를 투입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새로운 익세큐티브 아웃컴즈Executive Outcomes가 되려는 거요?”
Executive Outcomes, 줄여서 EO는 남아프리카 출신 군인과 경찰 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용병 회사였다.
가히 민간 군사 기업(PMC)의 원조 격이나 마찬가지로 앙골라와 모잠비크, 나미비아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당시 지금 못지않게 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에라리온에서 전 세계적인 악명을 얻게 됐다.
프리타운이 함락 직전까지 가며 무력화된 정부군을 대신해서 전쟁에 끼어든 EO는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반군을 몰아내고 시에라리온 정부를 위기에서 구해 줬다.
그 대가로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을 받아 오랫동안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EO 덕분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한 문제점 역시 많았기에 두테 장관이 경계심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러자 혁권은 한쪽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반군 전체와 싸울 능력도 없고 그럴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오?”
“방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반군으로 인해 광산 개발을 못하게 되면서 피해가 막심하다고 말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에라리온 정부를 돕고 더불어서 사업을 정상적으로 추진하려는 것 말고 손톱만큼도 다른 의도가 없습니다.”
“그 말을 지금 날보고 믿으라는 거요.”
앞에 놓인 수건을 들어 입가를 닦으면서 혁권이 말을 이었다.
“광산이 개발돼 다이아몬드 채굴이 이루어진다면 합의한 비율에 따라서 시에라리온 정부에 일정 부분의 수익금과 세금을 납부하게 되어 있으니 득이 됐으면 됐지 손해가 아닐 것입니다.”
뒤로 몸을 기댄 두테 장관이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라 안으로 무장한 용병들을 함부로 들일 수는 없소. 곧 반군을 몰아내고 코노 지역을 탈환할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시오.”
예상했던 대답에 혁권은 차분히 상대를 설득했다.
“말씀대로 했으면 좋겠지만 사정이 그리 녹록지 않으니 이렇게 어려운 부탁을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그래도 두테 장관이 별 감흥 없는 태도로 심드렁한 표정을 보이자 혁권이 준비한 패를 내보였다.
“이번 일을 도와주신다면 섭섭지 않게 사례를 하겠습니다.”
“흐음.”
그제야 그가 조금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사례라고 했소?”
“200만 달러를 현금으로 드리겠습니다.”
한화로 20억이 넘는 큰 금액이었다.
김덕현 전무가 너무 과하다고 만류했었지만 상대를 확실히 끌어들이기 위해서 통 크게 배팅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를 들은 두테 장관의 얼굴에 탐욕이 가득 차올랐다.
사다 대령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려운 부탁이라는 걸 알지만 사정을 봐 주십시오.”
아무런 말없이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짓던 두테 장관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대통령 각하께 말씀을 드려 보겠소.”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혁권은 반색을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확실히 된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업소.”
“장관님께서 도와주신다면 거의 다 정해진 거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밉지 않게 웃으며 하는 말에 두테 장관도 구태여 부정하진 않았다.
“가능하면 빨리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소이다. 내일 대통령 각하를 뵐 때 말을 꺼내 보도록 하겠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미리 짠 시나리오대로 원활하게 흘러가는 흐름에 혁권은 속으로 한 짐 던 듯 한결 가벼운 기분을 느꼈다.
“그럼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만 믿으시오.”
와인을 두 병이나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한 두테 장관은 혁권과 악수를 나누고는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경호 차량의 호위를 받으면서 두테 장관 일행이 레스토랑 앞을 떠나자 혁권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하킴이 얼른 지포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줬다.
“후우.”
한 모금 하얀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 들였다가 내뱉자 김덕현 전무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테 장관이 코로마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왜 어려울 것 같나?”
“솔직히 아무리 반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자국에 무장한 용병들이 들어오는 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렇겠지.”
어깨를 으쓱인 혁권은 두테 장관 일행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네도 봤듯이 정상적인 업무 처리도 뇌물을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부패한 것이 시에라리온의 현실이야. 거기다 반군의 위협에 언제 정권이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라면 국가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을 더 챙기지 않겠어.”
“그렇군요.”
이야기를 들은 김덕현 전무는 수긍을 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해도 시에라리온의 상황은 이제까지 경험한 국가들 가운데 최악이었다.
“우리가 용병을 동원해서 반군의 자금줄이 되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탈환한다면 시에라리온 정부에 도움이 되면 됐지, 손해 날 것이 없지 않겠나. 거기다가 군침이 돌 수밖에 없는 미끼까지 던져 줬으니 아마 틀림없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거야.”
“그랬으면 좋겠군요.”
은완코가 SUV를 몰고 와 앞에 세우자 혁권은 반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는 구둣발로 비벼서 끄며 말했다.
“신경을 썼더니 피곤하군. 이만 호텔로 가서 쉬자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