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15
215
크게 우회를 해야 됐지만 다행히 일행은 모두 숙소인 호텔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끔찍한 광경을 직접 목격해서인지 다들 입을 다문 채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중에서 이런 어수선한 상황을 처음 겪어 보는 홍선호가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은 기색이었다.
“뭐 하고 있어?”
한 방을 쓰는 김덕현 전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던 홍선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냥 쉬고 있었습니다.”
“한 캔 마시겠나?”
양손에 캔 맥주를 들고 온 김덕현 전무가 그중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맞은편 침대에 앉은 김덕현 전무는 뚜껑을 딴 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홍선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
“네. 뭐…….”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고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김덕현 전무는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아까 사장님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나?”
고개를 들어 김덕현 전무와 눈을 맞춘 홍선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비겁한 행동이었다, 이건가?”
차마 제 입으로 꺼낼 수가 없었던 단어를 김덕현 전무가 대신 내뱉자 홍선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김덕현 전무가 씁쓸하게 웃으며 캔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럼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됐을까?”
“그야…….”
“우리가 나섰다고 정부군 군인들이 사격을 멈췄을까? 아마 아닐 거야. 오히려 흥분해 있는 군인들한테 험한 꼴을 당하기 십상이었을 걸세.”
차를 돌리기 직전 운전석으로 다가왔던 군인의 험악했던 얼굴을 떠올린 홍선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당시에 얼마나 겁이 나고 두려웠는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었다.
“일행 모두의 안전을 책임진 사장님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거야. 물론 나 역시 옳은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네.”
김덕현 전무는 홍선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자네가 여태까지 어떻게 회사 생활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이런 상황을 자주 겪게 될 테니 각오를 단단히 다져 두는 게 좋을 걸세.”
지금까지의 평화로운 일상하고는 멀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홍선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김덕현 전무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 시간 때 보세.”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홍선호는 손에 쥐고 있던 캔 맥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차가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는데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손가락에 약간 힘을 주자 캔의 겉 표면이 우직 소리를 내며 찌그러졌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홍선호는 심호흡을 하듯 깊게 숨을 들이쉬곤 내쉬면서 캔 맥주를 땄다.
한 입에 다 마셔 버릴 작정인 것처럼 단숨에 맥주를 들이켠 홍선호는 하아, 하고 어깨를 늘어뜨림과 동시에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았다.
얼마 뒤 1층 식당으로 내려간 홍선호는 먼저 와서 일행과 식사를 하고 있는 혁권한테 다가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혁권이 손에 든 포크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뭔가?”
“낮에 아무것도 모르고 함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본 혁권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물 잔을 집어 들었다.
“알았으니까. 식사부터 해.”
“예.”
홍선호가 빈자리로 가서 앉자 옆에 있던 김덕현 전무가 수건으로 입가를 닦고는 말을 붙였다.
“예정대로 두테 국방부 장관을 만나 보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왜 묻나?”
“오면서 겪은 사건도 있고 아무래도 지금 일을 벌이기에는 시에라리온 정세가 너무 안 좋은 것 같아서 드리는 말입니다. 일단 계약 승계를 끝마쳤으니 차라리 조금 더 기다렸다가 분위기가 괜찮아지면 다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혁권은 포크로 잘라 놓은 스테이크 조각을 찍어 입 안에 넣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확실히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 건 사실이야. 그런데 연기를 한다면 언제까지 미뤄야 될 것 같나?”
“글쎄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김덕현 전무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수십 년간 계속된 분쟁이야. 오랜 시간 서로 다투면서 원망과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을 테니 쉽사리 마무리되기는 어려울 거야.”
“그렇긴 하지만 섣불리 손을 댔다가 자칫 문제가 생긴다면 뒷수습이 더 힘들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수긍하는 듯하던 혁권은 이내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혼란스러운 지금이 우리한테는 기회일지도 몰라.”
“그게 무슨……?”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김덕현 전무를 마주 보며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정국이 안정되고 반군의 위협이 없다면 과연 시에라리온 정부가 엄청난 이권이 걸린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권을 우리 같은 작은 회사에 그냥 넘겨주려고 할까. 그것도 개발 수익 대부분을 가져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불리한 계약을 말이야.”
“…….”
계약을 맺어 뒀다고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게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 되는지 오랜 해외 자원 개발 경험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김덕현 전무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이럴 때 기껏 밥상을 차려 놓고 딴 놈한테 빼앗기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 놔야 돼.”
“위험 부담이 클 겁니다.”
“대신 성공했을 때 돌아오는 것도 크지.”
어차피 위험을 감수한다는 건 그런 것이라며 혁권이 말했다.
김덕현 전무는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고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군인답지 않게 뚱뚱한 체격에 입술이 두꺼운 두테 국방부 장관은 탁자에 펼쳐 놓은 지도를 보며 연신 짜증을 내고 있었다.
“2군단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거야!”
그러자 대령 계급장을 단 참모가 눈치를 보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마시아카로 진격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 언젠데 아직까지 워털루에 처박혀 있는 거야!”
“그게 지난 전투에서 소모된 병력과 물자를 보충하고 재편성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꽝!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테 장관이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곤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전투가 끝난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잖아. 그런데도 더 기다리라는 거야!”
단지 이야기를 전달한 죄로 날벼락을 맞은 참모는 어깨를 움츠린 채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화를 참지 못한 두테 장관은 이를 부드득 갈며 언성을 높였다.
“이건 명백한 명령 불복종이야! 당장 지휘권을 회수하고 움부야 그놈을 여기로 잡아 와.”
헌병감을 맡고 있는 사다 대령이 얼굴을 굳힌 채 얼른 흥분한 두테 장관을 만류했다.
“화가 나시겠지만 신중해야 됩니다.”
“뭐야!”
“만에 하나 움부야 소장이 총구를 거꾸로 돌려서 프리타운으로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2군단을 막아 내기가 어려울 겁니다.”
“으음.”
눈을 부릅뜨며 화를 내던 두테 장관은 사다 대령의 이야기에 얼굴을 구긴 채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원래 두테 장관이 직접 지휘하는 중앙군은 2만 명의 병력과 각종 중화기를 갖추며 상당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군의 공격에 수도인 프리타운을 사수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크게 입는 바람에 지금은 편제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반면에 움부야 소장의 2군단은 앓는 소리를 하고 있어도 전력 손실이 거의 없는데다가 무엇보다 휘하에 구식이지만 M113 장갑차 30대로 구성된 기갑 대대까지 휘하에 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만약 움부야 소장이 엉뚱한 마음을 먹는다면 병력이 부족한 두테 장관으로서는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계속해서 반군과 싸울 것을 재촉하는 이유도 2군단을 프리타운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보내 쿠데타 기도를 막으려는 거였다.
“지금으로서는 케네마에 있는 3군단이 북상해서 견제할 때까지 움부야 소장을 잘 달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제길. 정말 짜증 나는군.”
인상을 쓰던 두테 장관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직접 워털루로 가서 대통령 각하의 지시라고 서둘러 공격을 재개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참모는 행여라도 또 불똥이 튈까 봐 얼른 경례를 올리고는 장관실을 나갔다.
그걸 보며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짧게 혀를 찬 두테 장관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사다 대령이 재빨리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면서 말했다.
“3군단만 도착하면 움부야 소장쯤은 곧장 잡아 감방에 처넣어 버리면 되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분한 마음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담배를 끼운 두테 장관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사다 대령은 두테 장관의 화를 식히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다른 것으로 돌렸다.
“장관님, 혹시 솔 루시두스사라고 아십니까?”
“처음 듣는 곳인데. 그게 왜?”
“그 회사 오너가 현재 프리타운에 와 있는데 절 통해서 장관님께 이걸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말을 하며 사다 대령이 품속에서 고급스럽고 사각 케이스 하나를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이게 뭐야?”
“장관님께 드리는 건데 제가 어떻게 열어 보겠습니까?”
“흠.”
아부 섞인 이야기에 두테 장관은 기분이 좋은지 한쪽 입꼬리를 실룩이면서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케이스를 열자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롤렉스 시계가 들어 있었다.
고급스러운 금도금과 12시 방향에 박혀 있는 왕관 문양은 시계의 품격과 특별함을 더했다.
“호오.”
두테 장관이 낮게 탄성을 내뱉자 사다 대령이 얼른 기분을 맞춰 줬다.
“정말 멋지군요. 한번 차 보십시오.”
“그럴까.”
못 이기는 척 원래 가지고 있던 시계를 풀고 새 걸 찬 두테 장관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거도 좋지만 이건 더 잘 어울리시는군요.”
“그래?”
“예. 아주 꼭 맞춤을 한 것 같습니다. 역시 이런 시계는 장관님처럼 품격이 있으신 분이 차고 계셔야 더 빛이 나는군요.”
“하하하. 거, 사람 하고는.”
사다 대령의 아부가 싫지 않은지 두테 장관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그 솔 루시두스라는 회사는 뭐 하는 데야?”
그러자 사다 대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코노 지역에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권을 가진 회사입니다.”
“광업 회사였구먼.”
작게 머리를 끄덕이던 두테 장관은 문득 드는 생각에 시선을 들며 말했다.
“그런데 코노 지역이라면 반군 점령지 아니야?”
“맞습니다.”
잠깐 뜸을 들인 사다 대령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광산 개발 문제로 장관님께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다고 한번 시간을 내주셨으면 하더군요.”
“거긴 반군 지역이라 딱히 내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을 텐데…….”
“이런 선물까지 보내 왔는데 그냥 식사나 한다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만나 보시지요.”
심드렁해하던 두테 장관은 사다 대령의 설득에 잠시 생각을 해 보곤 딱히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판단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길게 끌 거 없이 마침 별다른 일정이 없으니까 오늘 저녁으로 약속을 잡도록 해.”
“예. 그러겠습니다.”
따로 뒷돈을 챙긴 사다 대령은 마음에 드는지 연신 한쪽 손으로 시계를 쓰다듬고 있는 두테 장관을 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