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484
484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에서야 잠시 눈을 붙였던 혁권이 샤워를 하고 나오자 하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성균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혁권은 목욕 가운만 걸친 채 한쪽에 있는 미니 바로 가서 온더록스 잔에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따르면서 말했다.
“뭐라고 그래?”
“티파니 관광호텔을 포함해서 노석대가 가지고 있는 강남 업소 지분을 모두 넘겼다고 합니다.”
“잘됐군.”
온더록스 잔을 손에 든 혁권은 흡족한 얼굴로 가죽 소파에 깊숙이 앉았다.
이미 영업장을 장악한 상태에서 지분까지 합법적으로 인수한다면 사거리파 구역을 완벽하게 집어삼키게 되는 거였다.
“그리고 도정인이 아주 흥미로운 걸 내놨다고 합니다.”
“뭔지 궁금해지는군.”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리면서 관심을 보이자 하킴이 옆자리에 와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관계를 가져온 정재계 인사들이 소속사 연예인과 낯 뜨거운 행동을 벌이는 걸 몰래 찍은 영상이 있다고 합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런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 확인하게 되자 혁권은 눈에서 이채를 띠었다.
“풀어주면 영상을 전부 다 넘기겠다고 했답니다.”
“흐음.”
한쪽 팔을 들어 방금 매끈하게 면도를 한 턱을 매만지면서 혁권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당장 쓸 일은 없지만 그동안 도정인이 여자를 제공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김성균처럼 한국 사회에서 힘깨나 쓴다는 이들이었기에, 이런 약점을 하나 손에 쥐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물론 영상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이 될 수 있었으나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해 낼 자신이 있었다.
결정을 내린 혁권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렇게 하라고 해.”
“노석대는 어떻게 할까요?”
“아직 출국 금지 명단에 이름이 안 올라갔지?”
“그렇습니다.”
“어차피 팔다리가 다 잘려 나가고 지명수배까지 떨어진 상태라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야. 약속대로 필리핀으로 보내 줘.”
“알겠습니다.”
느릿한 동작으로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는 혁권이 물었다.
“방갑수는 일을 잘하고 있나?”
“일단 사거리파가 가지고 있던 구역은 다 장악했습니다만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인원수는 그럭저럭 갖췄으나 다른 조직들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져 새로 확보한 영업장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건 방갑수가 알아서 해결해야 될 문제지. 그런 것까지 내가 입에 떠 먹여 줄 수는 없지 않겠어.”
“맞는 말씀입니다.”
“참. 소현이는 별일 없지?”
“네. 오후에 화보 인터뷰 촬영을 끝내고 부산에서 하룻밤을 더 머문 뒤에 내일 서울로 올라오실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대충 상황이 다 정리됐으니 돌아와도 큰 문제는 없겠지?”
“그럴 겁니다.”
그동안 계속 신경에 거슬리던 것들이 깔끔하게 치워졌다는 사실에 혁권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인천공항 국정원 분실.
똑똑똑.
“들어와.”
방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는 한쪽에 놓인 책상 앞에서 컴퓨터로 뭔가를 보고 있는 상관한테 가서 입을 열었다.
“실장님, 말씀 하셨던 노석대가 공항에 나타났습니다.”
분실 책임자인 신남균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어디 있어?”
“3번 출국장에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혼자야?”
신남균이 묻자 국정원 요원이 바로 대답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일행이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 있습니다.”
“목적지는?”
“필리핀 마닐라입니다.”
“도피처는 제대로 골랐군.”
범죄자 인도 조약이 체결되어 있었지만 국토가 수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작정하고 숨으면 찾기 어려운 데다 현지 사법 기관의 부패도 심해서 필리핀으로 달아나면 다시 체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경찰 특공대를 투입하면 바로 체포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잠시 고심하던 신남균은 책상 앞에 서 있는 요원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그냥 보내 줘.”
범죄자가 해외로 도피하는 걸 모르는 척 눈감으라는 거였지만, 요원은 반발이나 의구심을 내보이지 않고 지시대로 따랐다.
“알겠습니다.”
“놈이 떠나면 바로 출국 금지 명단에 이름을 올리도록 해.”
“예.”
짧게 대답한 요원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자 혼자 남은 신남균은 스마트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심 과장, 나야.”
-전화를 주신 걸 보니 노석대가 나타난 모양이군요.
“맞아.”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문 신남균은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하얀 연기를 내뱉었다.
“조금 있으면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날 거야.”
-부탁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야. 위에서 시킨 대로 했을 뿐이야.”
-목적지는 어딥니까?
“마닐라라고 하더군.”
-그 동네가 죄를 짓고 숨어 있기에는 좋지요.
“그렇지.”
심인성이 자신과 똑같은 말을 하자 신남균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같은 충청도 출신인 데다 심인성이 신입시절 함께 팀을 이뤄 작전을 나간 적이 몇 번 있었기에 두 사람은 지금도 가끔씩 연락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다른 일이 생기면 연락하도록 하지.”
-그럼 마지막까지 뒤처리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신남균은 마우스를 조작해서 출국장에 설치된 CCTV 화면을 컴퓨터 모니터에 띄웠다.
거기서 노석대를 찾아 확대하고는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런 놈은 감방에 처박아 넣고 한 10년을 푹 썩혀야 되는데. 운 좋은 줄 알아.”
일이 거의 정리됐지만 그래도 어떤 돌발 변수가 생길지 몰랐기에 혁권은 집에 머물면서 상황을 주시했다.
“후, 하.”
혁권은 규칙적인 숨을 내쉬면서 러닝머신 위를 뛰었다.
집 안에 마련해 놓은 헬스 공간에는 러닝머신 말고도 아령이나 벤치프레스 같은 체력 단련 기구들이 많았는데, 어지간한 헬스장 못지않은 설비였다.
입구 쪽 벽에는 항상 그렇듯이 하킴이 양손을 앞으로 나란히 쥔 채 석상 같은 자세로 서 있고, 러닝머신에 달려 있는 TV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뉴스들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혁권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러닝머신의 속도를 올려 빠르게 달렸다.
전력 질주와 천천히 뛰는 것을 반복하는 인터벌이었다.
그냥 뛰는 것보다 배로 운동 효과가 높지만, 그만큼 힘들기도 해서 하고 나면 땀이 홍건하게 고였다.
위잉-.
가파르게 기울여 놨던 경사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러닝머신이 멈추자 혁권은 옆에 걸어 놨던 수건을 쥐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가빠진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노타이 차림에 정장을 입은 백성균이 안으로 들어와서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보스, 다녀왔습니다.”
“어떻게 됐어?”
수건을 한쪽에 걸어 두면서 묻자 백성균이 손에 든 가방에서 서류 파일을 하나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변호사를 통해 노석대가 가지고 있던 영업장 지분에 대한 명의 이전을 모두 끝마쳤습니다.”
파일을 펼쳐서 살펴보자 관광호텔과 룸살롱 등 열 곳이 넘는 알짜배기 업소의 명의가 노석대에서 혁권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깔끔하게 처리했겠지.”
“물론입니다. 나중에 세금만 납부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수고했어.”
원래는 지분 명의를 방갑수 이름으로 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면 너무 모든 걸 날로 먹는 것 같은 데다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걸어 둘 게 하나쯤 필요할 것 같아서 마음을 바꿨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서류철을 덮어 한쪽에 놔뒀다.
“그리고 이건 도정인이 말한 영상이 저장된 겁니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휴대용 SSD 외장하드를 받아 든 혁권은 눈을 반짝이면서 백성균을 봤다.
“내용은 확인해 봤나?”
“파일 한 개만 열어서 진짜인지 살펴보고 나머지는 보지 않았습니다.”
“도정인은?”
“집 앞에 던져 두고 왔습니다. 뼈를 몇 개 부러뜨려 놔서 아마 한동안은 병원 신세를 져야 될 겁니다.”
“마약 거래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것보다 병원에 있는 게 백번 낫겠지.”
“맞는 말씀입니다.”
제아무리 수완이 좋은 도정인이라고 해도 이번에는 그냥 빠져나오기가 어려울 터였다.
소속된 연예인들까지 마약을 했다는 루머들이 떠돌고 있는 상황이라 현재 도도엔터테인먼트는 제대로 업무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가서 쉬도록 해.”
“예.”
백성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혁권은 서류철과 외장하드를 챙겨서 거실로 나갔다.
땀에 젖은 몸을 시원하게 씻어 낸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혁권은 냉장고에서 차갑게 해 둔 캔맥주를 하나 꺼냈다.
치익.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켜자 갈증이 한 번에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반쯤 남은 캔 맥주를 한 손에 들고 책상 쪽으로 걸어간 혁권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는 책상에 놓인 노트북을 열어서 전원을 켜고는 아까 백성균이 가져왔던 외장하드를 연결시켰다.
“어디 한번 볼까.”
마우스를 움직여서 외장하드로 들어가자 사람 이름이 적힌 폴더 수십 개가 주르륵 나타났다.
혁권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는데 하나같이 전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 법한 정재계 유명 인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얼핏 헤아려 봐도 폴더에 적힌 이름이 30명은 훌쩍 넘었다.
“으음. 이거 내가 괜히 판도라의 상자를 연 건 아닌지 모르겠군.”
살짝 머뭇거리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손을 댄 거였기에 혁권은 여러 폴더들 가운데 김성균의 이름이 적힌 걸 클릭했다.
그러자 날짜별로 정리된 동영상 파일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도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제일 최근 파일을 하나 골라서 클릭하자 몇 초간 시커먼 화면이 계속되다가 이내 벽에 걸린 장식품에 숨긴 몰래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 나왔다.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화질이 아주 좋았는데, 소리를 조금 키우자 음성까지 깨끗이 들렸다.
편한 복장을 한 김성균 사장이 소파에 앉아 있고 대여섯 명의 늘씬한 여성들이 줄을 지어 들어가 초이스를 하고 질펀하게 술자리를 가지는 장면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고동욱 실장이 여성들한테 돈 봉투를 나눠 주는 모습도 있어 성매매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됐다.
다른 파일에는 김성균 사장이 국회의원 두 명하고 똑같이 여자를 옆에 끼고 술을 마시면서 대마초까지 피우며 환락 파티를 즐기는 것도 있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다른 파일과 폴더들을 살펴본 혁권은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폭탄이었다.
만약 이게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대한민국 전체가 발칵 뒤집히고도 남을 정도로 파괴력이 있는 영상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백 개나 들어 있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혁권은 맥주를 마시려다가 김이 다 빠진 걸 확인하고는 다시 캔을 내려놨다.
그러고는 한참을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노트북을 닫으면서 결정을 내렸다.
“이건 아무래도 땅속에 깊이 파묻어 둬야겠군.”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큰 화火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혁권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을 떼어 내자 매립되어 있는 금고가 나타났다.
비밀번호를 눌러 금고를 열고는 외장하드를 노트북에서 분리해 그대로 안에 집어넣고 다시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