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45
645
작게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면서 미향은 투명한 플라스틱 너머의 조그만 방을 초조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삭막한 느낌의 회색 페인트를 칠한 벽과 천장에서 싸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구치소 면회실에 들어올 때부터 좀 춥다고 생각했는데, 건물 자체가 사람의 온기를 베풀어 주기보다는 억누르고 벌을 주기 위한 시설이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다 하루 종일 구치소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남편을 떠올린 미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옆에서 딸이 몸을 뒤척이느라 바닥을 긁는 의자의 쇳소리에 미향이 고개를 든 순간, 맞은편 문이 열리면서 제복을 입은 직원과 함께 초라한 몰골의 임동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여보!”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순간 반가운 기색을 떠올린 임동원은 그 옆에 나란히 선 딸을 발견하곤 당황한 듯 하다가 이내 인상을 험상궂게 찡그렸다.
“대낮인데 넌 여기 왜 있어!”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는 말은 못 할망정 소리부터 버럭 지르자 미향이 허둥지둥거리며 남편과 딸을 번갈아 보았다.
“여, 여보, 일단 앉아요. 얘기부터 해요, 네?”
못마땅하게 끙 소리를 낸 임동원이 마지못한 태도로 철제 파이프 의자에 앉았다.
고작해야 플라스틱 강화 유리로 막혀 있을 뿐, 서로 얼굴을 보고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동시에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너무나도 먼 거리이기도 했다.
“학교는 조퇴했어요.”
아직 교복을 입고 있는 채인 딸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뭐 한다고 여기까지 와?”
“그럼 아빠 면회 간다는데 나만 쏙 빠져요? 어떻게 그래?”
오히려 억울하다는 투로 그리 말하자 임동원은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결국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창 사춘기 나이에 아빠가 큰 사고를 쳐서 분명 학교에서도 힘든 일이 많을 텐데, 원망하기는커녕 여전히 아빠라고 불러 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표정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여전히 딸 앞에서는 얼굴이 부드럽게 풀리려는 것을 겨우 눌러 참고 그는 일부러 매몰차게 말을 쏟아 내었다.
“좋은 대학 가려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붙어 있어야지. 다른 애들은 학원이다 뭐다 바쁜데 혼자 놀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어차피 졸업하면 바로 취직할 건데 대학은 무슨…….”
게다가 공부를 하고 싶어도 집중이 될 분위기가 아니라 하고 싶었으나 그런 말은 속으로 삼켜 버렸다.
“취직이라니! 요즘 세상에 대학 졸업장도 없이 뭘 하겠다고?”
“아르바이트나…… 아니면 회사에 들어가도 되고 내가 돈을 벌면 조금이라도 집안에 도움이 될 거 아니야.”
“허튼소리!”
임동원이 손바닥을 탁 내리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을 안 가긴 뭘 안 가!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너 대학 졸업은 시키고 말 테니까 잔말 말고 네 엄마나 잘 챙겨, 알겠어?”
“그치만 아빠…….”
우리 집에 돈이 어디 있냐고 반박하려던 딸은 그 말을 내뱉으면 더 비참해질 것 같았는지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미향아.”
연애할 때 말고는 거의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불러 주는 이름이었다.
딸과 남편의 말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미향이 플라스틱 유리 벽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응, 여보.”
임동원은 화장기 하나 없이 밋밋한 아내의 얼굴을 조심스레 뜯어 보았다.
예전에는 입술도 부드러운 핑크색이었고, 손을 잡거나 어깨에 팔을 두르면 발갛게 달아오르는 뺨이 통통하니 귀여웠는데, 지금은 생활고에 찌들어 생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옷도 벌써 사오 년은 족히 지난 것이었고 뒤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은 푸석하니 잔머리가 이리저리 뻗쳐 있어 거울을 볼 새도 없이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렇게 예뻤던 아내에게서 순식간에 젊음을 뺏어 버린 것이 저라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심정에 가슴이 옥죄어들었다.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사식이라도 좀 넣어 줄까?”
“됐어. 구치소 안에서 삼시세끼 밥이 다 나오는데 뭐 하려고 돈을 써.”
마음과는 다르게 차갑게 튀어 나가는 목소리가 한없이 원망스럽다.
“그것보다 미향아, 내 말 잘 들어야 해.”
임동원은 의자를 끌어 바짝 앞으로 당겨 앉으며 아내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안방 옷장에 보면 아래쪽에 속옷 놔두는 서랍 있지. 거기 제일 안쪽, 내 양말이랑 팬티 넣어 두는 곳에 손 넣어서 살펴보면 딸애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가 있을 거야.”
“당신 언제 그런 걸 만들어 뒀…….”
“쉿, 일단 먼저 들어. 어쨌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비상금 같은 거니까 그걸로 애 대학교 갈 때까지 생활비랑 학비로 써. 혹시나 돈 있다는 소리 들으면 이상한 놈들 꼬일지 모르니까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고.”
아무래도 아내와 자식들만 생활하게 놔두려니 마음이 불안했다.
요즘 보이스 피싱이 많다던데 마냥 순진한 아내가 홀랑 넘어가 버리며 어쩌나 싶기도 하고, 강도가 들어서 가족이 다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생각이 미칠 때면 당장이라도 구치소 담벼락을 넘어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한테 돈을 주고 일을 시킨 노형석이 다시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 애끓는 속도 모른 채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직 그 안에 든 액수를 보지 못했으니 당연하지만, 미향은 남편이 트럭 일을 하면서 하나둘씩 모은 소소한 금액 이겠거니 하고 여기는 표정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남은 가족들이 꼭 의지하면서 열심히 살아야 돼.”
“그런 소리 하지 마요. 금방 나올 거잖아.”
미향이 결혼반지를 낀 손을 무의식적으로 매만지면서 울먹였다.
옛날 종로에서 두 사람이 돈을 모아 처음으로 맞춘 소중한 결혼반지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가난했던 건 마찬가지였기에 아무런 장식도 없고 심지어 다들 한다는 다이아몬드도 박혀 있지 않은 제일 기본 디자인이었지만, 미향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몸에서 줄곧 떼지 않고 끼고 있었다.
그건 임동원도 마찬가지라 전셋집 보증금 낼 돈이 없어서 여기저기 친구 집을 전전하면서 눈칫밥을 먹고 살지언정 결혼반지를 팔아 어떻게 돈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임동원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여전히 남편인 저를 믿어 주는 아내가 너무나 가여웠다.
“두 사람 다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거야.”
‘그 돈만 있으면 남들 다 하는 거 하면서 살 수 있어.’
임동원은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아내와 딸의 얼굴을 영원히 제 눈에 새기려는 것처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365번, 면회 시간 다 됐습니다.”
쿵쿵,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불청객처럼 난데없이 뛰어들었다.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정해진 15분이 다 끝나버 린 것이었다.
임동원이 떨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의자에서 일어나자 아내와 딸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여보, 조금만 더 얘기하다 가요. 네?”
“아빠!”
시큰해진 눈가에 임동원이 얼굴을 위로 치켜들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았다.
이대로 있으면 아내와 딸에게 못볼 꼴을 보여 줄 것만 같아 그는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면회 다 끝났습니다!”
그러자 제복을 입은 직원이 임동원의 어깨를 붙잡고 구치소 내부로 이어지는 복도를 향해 몸을 돌리게 했다.
뒤에서 여전히 아빠, 여보 하면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임동원은 입안 쪽의 여린 살을 짓씹으며 억지로 버텼다.
“잘된 거야.”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가족들한테는 괜찮다고 했지만 처음 겪는 구치소 생활은 여간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니었다.
서너 평 정도밖에 안 되는 좁은 공간에 온갖 범죄자들과 함께 지내야 된다는 것도 곤욕스러웠지만, 무엇보다 그를 괴롭게 하는 건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었다.
한쪽 구석에 무릎을 세운 채 앉아 머리를 푹 숙이고 얼마쯤 있었을까 교도관이 문밖으로 다가와 큰소리로 말했다.
“운동 시간이다. 모두 나와!”
그러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엉덩이를 털면서 몸을 일으켰다.
운동을 하는 건 자유였지만 접견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밖으로 나가 햇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대부분 빠지지 않고 나갔다.
임동원 역시 같은 감방 사람들을 따라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 길게 줄을 세워 인원을 확인한 교도관들의 지시에 따라 건물을 나서자 흙이 깔린 제법 넓은 운동장이 보였다.
이미 다른 사동에 있던 수감자들이 천천히 운동장 바깥을 따라 걷거나 뛰고 있었고 아니면 친분이 있는 사람들 끼리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눴다.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딱히 운동을 할 마음이 안 들었기에 임동원은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흙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오늘따라 유달리 맑아 보였다.
앞으로 얼마나 높다란 담장에 둘러싸인 이곳에 갇혀 있어야 될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5년, 10년…… 조사 과정에서 순순히 협조를 했으니 판결이 나와 교도소로 옮겨지더라도 수감 생활을 잘하면 감형이나 집행유예로 일찍 나올 수도 있을 거라며 국선 변호사가 해 준 위로가 떠올랐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욕심인지 몰랐지만 큰딸이 사각모를 쓰고 대학교를 졸업하는 모습은 밖에 나가 아내와 함께 보고 싶었다.
“후우.”
그렇게 임동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앉아 있는 모습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는 사내가 한명 있었다.
검찰 조사를 위해 잠깐 여기로 옮겨 온 건지 파란색 수의囚衣를 입고 있었는 가슴에는 사형수를 뜻하는 빨간 명찰이 붙어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매섭게 눈을 번뜩인 사내는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에 꽉 움켜쥐었다.
바로 끝을 뾰족하게 갈아 놓은 쇠 젓가락이었다.
얼마나 날카롭게 해 놨는지 웬만한 나무판자는 그대로 뚫어 버릴 것 같았다.
많은 죄수들이 운동장에 나와 있었으나 각자 짧은 운동 시간을 즐기느라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았고 교도관들 역시 건성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다른 죄수들처럼 운동을 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임동원한테 다가갔다.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 누군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눈치챈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얼굴을 봐도 낯선 이였기에 임동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
“임동원?”
묻는 말에 대답도 없이 다짜고짜 사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맞는데 대체 누구요?”
설마 구치소 안에서 친해져 보자고 온 사람은 아닐 테고 상대의 표정 역시 웃는 낯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일에 임동원이 어딘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 때, 사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도 바깥에 먹여살려야 할 가족들이 있어.”
“……?”
“그러니까 너무 원망하지 말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임동원의 머릿속에서 적색 경보가 울렸다.
위험을 느낀 그가 소리를 치려고 한 것과 동시에 복부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뭔가에 찔린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벌린 입에서는 신음조차 되지 못한 숨소리가 힘겹게 터져 나올 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저절로 다리가 굽혀졌다.
“크, 아…….”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던 임동원은 마지막 힘을 긁어모아 쇠꼬챙이 비슷한 것을 쥐고 있는 사내의 손을 움켜쥐었다.
“……으, 왜…….”
사내는 대답 없이 끈질기다고 중얼거리며 그의 복부를 다시 한 번 깊숙하게 찔렀다.
한계를 벗어난 고통에 눈앞이 하얗게 점멸되었다.
임동원은 눈을 질끈 감고 바깥에서 헛된 희망을 품고 있을 그의 가족들을 생각했다.
‘어차피 좋은 결말이 아닐 건 알고 있었어.’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을 죽인 주제에 편하게 이부자리에서 죽지는 못할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적어도 아내의 웃는 얼굴만은 보고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갈고리처럼 굽혀진 임동원의 손톱이 사내의 손등을 마구 긁어 대었다.
하지만 사내도 필사적인 것은 마찬가지라 이를 악물고 버티자 임동원의 숨이 점점 가늘어지다가 마침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