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of the Alter Lands RAW novel - Chapter 77
77화. 무희와 대장장이 (2)
슬쩍 옆을 보니 절반은 엘라힘을 불쌍하게 보고 있고, 절반은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이거 설마….
남자의 질투도 무섭다더니.
“리스트레토 경은 기사라지만, 망치를 잡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
“공방 안에서는 신분의 차이가 없음을 알고 계실 겁니다.”
뭐, 이 중에는 준귀족이면서도 대장 기술을 배우는 자들이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철저하게 공방에 들어온 순서대로 서열이 정해진다.
실력이 부족한 자들은 차례대로 공방을 떠났다고 하니….
지금은 아마 이 라문이란 자가 도제 중에서 최선임자인 모양.
이게 게헤른의 방침이라니 내가 할 말은 없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가??”
“저쪽에 여분의 대장 도구가 있습니다. 저희 모두, 그리고 스승님께서도 쓰는 물건이니 최소한의 품질은 보장되는 것들입니다.”
라문은 은근히 나를 깔보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그 품질은 천차만별이지만 스승님께 재능을 인정받은 분이시라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내실 테지요.”
라문의 말에 다른 도제들이 흥미를 보였다.
다들 내심 나를 비호감으로 보고 있었던 모양.
뭐, 그럴 만도 하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 년 이상 대가리가 깨져 가며 기술을 배우는데 난데없는 젊은 놈, 그것도 대장장이가 아닌 기사란 자가 와서 물을 흐리니 거슬릴 수도 있겠지.
나는 물끄러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엘라힘을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에게 이러는 건 괜찮다.
어찌 됐든 외부인이니까.
하지만 같은 식구에게까지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대한다고?
이런 놈은 인간쓰레기나 다름없다.
내가 본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물건 중 가장 상등품을 고르라고?
이건 내 물건의 기억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생각하면 너무나 쉬운 일이다.
나는 도제 라문을 향해 슬쩍 물었다.
“그냥 가장 좋은 물건을 골라오면 되는 건가? 너무 쉬운데?”
라문은 나를 어이없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예. 만약 망치, 모루, 연마기까지 모두 최상품을 고르시면 제 권한으로 마법 불꽃 용광로를 내드리겠습니다.”
“라문 님! 그건!”
“조용히 해라. 내게도 그 정도의 권한은 있다. 우리는 스승님의 노예가 아니야. 감히 스스로 장인이라 칭할 만큼은 못 되지만, 모루를 두드리는 자들로서 자존심이 있지 않나! 너도 사실 마음이 편한 건 아닐 테고.”
라문의 눈빛에 엘라힘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러났다.
이들이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라문의 말에 엘라힘의 기세가 조금 꺾였다.
그래도 그 또한 게헤른의 가르침을 받은 도제다웠다.
엘라힘이 벌떡 일어나 라문의 앞을 다시 막아섰다.
그는 어리고 덩치는 작은 편이지만, 제법 깡다구가 있는 편인 듯했다.
생각해 보면 거의 모든 대장장이가 그런 편인 것 같기도 하고.
정작 싸움을 벌인다면 압도적으로 다 때려눕힐 수 있을 테지만….
지금도 사방에서 풍겨 대는 기세에 섬찟섬찟하다.
전부 한 분야에서 최고를 노리는 자들이라 그런가?
기백만큼은 인정할만하다.
“라문 님… 스승님은 리스트레토 경을 손님으로 대하라 하셨습니다! 저희는 스승님의 말씀을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야. 나도 스승님의 말씀을 거역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다.”
자기 팔을 붙잡는 엘라힘을 일단 제지한 라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라힘, 네가 우리 중 가장 어리고 늦게 공방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런 너조차도 밖에 나가면 어엿한 장인 대우를 받겠지.”
틀린 말은 아닌 듯 엘라힘이 머뭇거렸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라문이 팔짱을 끼고 나를 돌아보았다.
두꺼운 근육이 위협적으로 꿈틀댄다.
갑자기 이들이 무기를 든다 해도, 웬만한 전사쯤은 찜쪄먹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 공방이 마치 용담호혈처럼 느껴졌다.
하긴 망치도 무기 아닌가?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스승님은 우리에게 항상 제작품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생각이 없는 무생물을 어떻게 이해한다는 말이지?”
라문은 온몸을 쥐어짜듯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것 같이.
“스승님이 하루에도 열두 번을 칭찬하는 재능, 그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나는 ‘두드리는 자’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부러움, 시기, 질투… 온갖 감정이 그에게서 흘러나온다.
웃긴 놈이군.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간다.
라문은 딱 봐도 야장술에 삶을 바친 것 같으니까.
갑자기 그가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냥 불쌍한 놈이었군.’
지금 그는 벽에 막혀 있는 게 분명했다.
가레스도 한때 저런 상태였으니까.
바로 내가 비전 검술을 처음으로 구현해 냈을 때 말이다.
다만 가레스는 내 능력을 인정하고, 심복으로 키우는 것을 택했다.
그 결과, 베르트 공작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내 의견은 이런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솔직히 스승님이 인정하신 재능의 소유자가 어떤 안목을 가졌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게헤른은 내게 대장 기술을 가르치고 싶다며, 공방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게헤른 소유의 공방이라지만 실질적인 업무는 전부 이 도제들이 하는 편.
당연히 그들에게도 충분한 발언권을 준다고 했다.
가끔은 게헤른도 도제들의 진언을 따라 자신의 의견을 굽힐 때도 있다고 말했었으니까.
그만큼 그의 도제 한 명, 한 명도 뛰어난 실력의 대장장이인 것이다.
“나는 라문의 말에 찬성한다.”
“엘라힘, 솔직히 우리도 의문이 많았다.”
한 도제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 누군가를 그렇게 칭찬하시는 건 처음이었지. 나도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라문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직접 무기를 만들어 겨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손님께는 실례일 테니. 이 정도면 우리도 양보할 수 있다.”
엘라힘이 곤란한 얼굴로 나를 본다.
나는 그냥 웃으며 말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공짜로 아이템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
이미 결과는 내 승리로 정해져 있다.
단지 저들 스스로가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저들의 미래가 달라질 뿐.
* * *
엘라힘을 앞세우고 공방 뒤쪽 창고로 향했다.
“이게 다 창고라고?”
공방 뒤쪽은 본 적 없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뒤쪽 건물 전부가 창고였다.
…바르둠의 가장 큰 대장간이 백화점이라면 여긴 명품관이라 할 만했다.
“예. 왕실에서 요청하면 납품을 할 때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판매하는 물건들은 아닙니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주문판매 방식.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물건들이 아니다. 아마 이곳 장인들의 실험작인 듯, 하나하나의 기세가 남달랐다.
아, 금속 특유의 까끌까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만져 봐도 되나?”
“예.”
그러고 보면 이들은 나를 무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한 명의 대장장이로 대하고 있었다.
사실 내 실력이야 별것도 없는데 말이지.
당연히 뭔가 만들어 내는 건 상대가 안 되지만….
고르는 거야 쉬운 일이지, 라고 생각했다.
“흠.”
“왜 그러십니까?”
“아니… 다들 자신이 있어 할 만하군.”
내 말에 엘라힘이 약간 뿌듯해한다.
바위처럼 단단해진 다른 장인들에 비해 어려서 그런가, 감정의 노출이 빈번하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이거 안 좋아 보이는 물건이 없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계속 창고를 맴돌기만 하자 엘라힘도 이상을 눈치챘다.
“음… 카민 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웬 도움?
나는 엘라힘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부담스러우시겠지요. 이런 역할은.”
뭔 소리야, 갑자기.
엘라힘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저희의 성장이 지지부진한 건 스스로도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은 답답하시겠죠. 이런 식으로 저희를 자극하는 역할을 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라힘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주절댔다.
알고 보니 게헤른, 그 노인네가 별수를 다 써서 이들의 의욕을 자극해 왔다고 했다.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그는 이번에도 게헤른이 벌인 기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내게 재능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는 뜻이다.
라문을 비롯한 다른 고참들과는 달리.
주절대는 엘라힘을 나는 어이없이 쳐다봤다.
그는 내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채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어째 얘가 제일 나쁜 놈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곳에서 가장 최상품은 저기 있습니다. 저희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신 라문 님께서 만드신 모루죠.”
엘라힘은 바닥 한구석에 놓여 있는 모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옆에는 고무를 두른 쇠망치도 하나 놓여 있었다.
“연마기는 이것입니다. 코어를 넣어야 작동하긴 하지만 대신 코어가 날을 보호하기 때문에 갈아 끼우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바르둠 마탑과 협업해서 실험적으로 생산한 물건이죠.”
엘라힘이 눈가를 쓱 닦아 냈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가 엘라힘이 알려 준 도구들을 확인했다.
흠… 엘라힘의 말대로 좋긴 좋은데.
쓱 손을 대보니 다른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분명 라문이 만들었다는 말대로, 다른 것보다 나아 보이긴 했다.
금속의 재질이 조금 더 좋았던 것.
이 세계에는 원소 분석기 따위가 없으니, 장인의 열처리 실력에 따라 우수한 고농도의 탄소강이 나오니까.
그때, 완전히 녹이 슨 모루 하나가 눈에 띄었다.
“카민 님. 그건 골동품입니다. 오래전부터 창고에 있던 물건이죠. 스승님께서는 버리라고 하셨지만….”
오래전?
그러면 더 좋지.
한번 볼까.
자리에 주저앉아 모루를 쓰다듬었다.
확실히 녹이 슬어서 까끌까끌하다.
오래된 것 특유의 느낌이 가득하다.
엘라힘은 그런 걸 왜 살펴보냐는 둥 제멋대로 지껄였다.
신경 끄고 가만히 모루의 기억을 살피던 나는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걸 택하겠다. 망치도 이 옆에 놓인 걸 고르지.”
* * *
라문은 녹이 슨 모루를 들고나오는 카민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꼭 저런 자가 있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자들.
겉멋에 찌들어서 뭐라고 미사여구를 붙여 떠들어 대겠지.
“고른 게 결국 그 물건입니까?”
“그렇다.”
카민은 녹이 슨 모루를 쿵 내려놨다.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게 울림으로부터 느껴졌다.
하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몇몇은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한심하군요.”
다른 장인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저 모루는 쓸 수 없는 물건이다.
기본적인 자격부터 미달이다.
카민은 그런 분위기를 무시한 채, 두 손을 펼쳐 바닥에 놓은 녹슨 모루를 가리켰다.
“이것이 최고의 모루다.”
라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한 겁니까?”
헛소리를 내뱉는다면 당장 윽박지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카민은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고의 모루란 게 뭘 말하는 걸까.”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카민이 씩 웃었다.
그의 몸에서 엄청난 자신감이 뿜어져 나왔다.
“내구도가 높은 모루?”
“가장 단단한 금속을 다룰 수 있는 모루?”
카민은 질문을 던지고는 스스로 답을 했다.
“아니다. 가장 훌륭한, 최상품의 모루는 바로 어떤 걸 벼려 냈느냐에 따라 정해진다.”
“아니, 그게 무슨….”
라문은 카민의 궤변에 당황했다.
하지만 다른 장인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무기가 아닌 모루는 품질의 고하를 따지기 어렵지.”
“그렇다면 저자의 의견도 일리가 있어.”
“맞아. 장인의 실력 고하를 어떻게 비교하나? 결국, 이름난 무기를 만들어 낸 자가 최고 아닌가.”
대장장이들의 의견을 들은 라문이 신음을 흘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를 냈다.
고만고만한 최상품 사이에 무엇을 골라도 문제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트집을 잡으면 딱히 벗어날 방법도 없다.
라문은 카민을 막다른 곳에 몰아넣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 모루가 저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바로 최고의 무기 중 하나를 만들어 낸 물건이니까.”
“예?”
“최고의 무기?”
카민은 속으로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분명히 이 모루는 창고 안의 어떤 것보다 튼튼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까.
모루와 세트인 망치도 마찬가지다.
망치 자루가 낡아 썩어 있을 지경이니.
“아직 이해를 못 했군. 다시 한번 말하지. 이 모루와 망치가 바로 ‘레비아탄’을 벼려 낸 물건이다.”
가불기를 시전한 카민은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다들 침묵에 휩싸인 채였다.
스승의 망치를 벼려 낸 물건이 최고가 아니라 말할 자 누가 있을까?
그건 도제들에게는 패륜을 저지르는 것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