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4
4화.
4화
“학생, 미안해요. 잠시만 들어 줘요. 휴지, 휴지가 어디 있더라 내 가방에 있는데. 아우, 전화. 전화.”
휴지가 들어 있다는 여자의 가방 속에서 비트가 강한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상자에 양손이 묶인 여자는 휴지든 핸드폰이든 찾을 수가 없다. 한혁이 제 배낭 속에서 티슈를 꺼내 박스에 묻은 흙탕물을 닦아 냈다. 깨끗해진 상자를 여자가 들고 있는 박스들 위로 올리는 동안에도 핸드폰 벨은 끈질기게 울렸다.
“아욱! 전화. 좀 기다리라고. 제발, 가고 있다고!”
손이 묶인 여자는 어깨에 멘 가방 속에 있을 핸드폰을 눈으로만 쏘아볼 뿐이었다.
“학생, 미안한데요, 여기 여기요. 가방 안에 핸드폰 보이죠 그거 좀 꺼내 줄래요 ”
턱까지 차오른 박스 옆으로 비스듬히 얼굴을 빼내고 오로지 가방 속 핸드폰만 보면서 여자가 말했다. 한혁은 어이없는 기분으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동그란 해에서 길게 뻗어 나는 햇살이 눈을 찌른다. 오늘 해가 나면, 햇빛 같은 친절을 베풀리라 장담했던가. 한혁은 여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무슨 뜻인가 잠시 멈칫거리는 기색도 없이 여자는 재빠르게 박스들을 한혁의 팔 위로 옮겨 놓았다.
“고마워요, 학생.”
그런데 이 여자가 나를 계속 뭐라고 부르는 거야. 학생 얼떨결에 뻗은 팔 위로 놓인 박스가 시야를 반쯤 가렸다. 학생이라. 피식 웃음이 나온다. 유달리 동안인 얼굴이 며칠 전 미용사의 실수로 짧게 커트된 덕분에 더욱 어려 보일 테고, 스웻셔츠에 헐렁한 청바지 차림이니, 두어 살은 아래로 보이는 여자에게 학생이라 불릴 법도 했다.
“내가 이 전화를 꼭 받아야 해서. 그리고 미안한데 잠시만 잡고 있을게요. 내가 어지러워서.”
서진이 한 손으로 가방을 휘저으면서 한혁의 스웻셔츠 소맷자락을 잡았다.
“왜, 혹시 내가 이거 들고 튈까 봐 ”
“아, 아니, 아니에요. 내가 너무 뛰었더니 어지러워서. 저혈압이 있거든요. 설마, 학생처럼 친절한 사람이 그럴 리가요.”
어설픈 변명을 하며 서진이 스웻셔츠 자락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아우우, 이거 어디 갔어 ”
허둥거리며 커다란 쇼퍼 백 속에 손을 넣어 휘젓지만, 마음만 급하고 핸드폰은 도통 잡히지 않았다.
“알았다고, 알았어. 그만 좀 전화하라고!”
잠시 멈췄나 싶더니 다시 시작되는 벨 소리는 가방을 헤집는 동작에 맞춰 작아졌다 커졌다 하였다.
“거 되게 시끄러워.”
한혁은 어깨를 살짝 움직여 흘러내리는 가방을 추슬렀다.
“네 ”
여자는 여전히 커다란 핸드백 속으로 머리를 처박다시피 하고 있었다. 턱 아래까지 차오른 박스 때문에 눈에 들어오는 건 그녀의 작은 머리통뿐이었다. 여전히 시끄러운 벨 소리와 함께.
“당신이랑 벨 소리. 핸드폰 빨리 찾아.”
“뭐 ”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았다. 다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미꾸라지 같던 핸드폰을 잡았나 보다. 여자가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후우 불더니 핸드폰을 귀에 댔다.
“저예요. 지금 정문 근처예요.”
의외로 고운 말투라 한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자의 얼굴을 이제야 제대로 보았다.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지만 연신 뱉어 대던 말투와는 다르게 지적이고 차분한 매력이 있는 얼굴이었다. 비록 땀에 약간 젖어 있기는 했지만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앞머리와 달리 꼭꼭 하나로 멋없이 묶은 뒷머리 덕분에 갸름한 얼굴선이 시원하게 드러나 있었다. 살짝 찡그린 눈썹 아래 유난히 맑은 눈이 인상적이다. 맑은 눈…… 찬찬히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소리 없는 웃음이 터졌다.
‘번번이 기록적인 친절을 베풀게 하는 여자로군. 윤서진.’
얼굴에 머물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서진의 모양새가 한눈에 들어왔다. 단정한 테일러 슈트에 실크 블라우스와 스카프까지, 아침에는 꽤 신경 써서 매치했을 법한 차림이었다. 하지만 몸에 잘 들어맞는 짙은 슈트재킷은 앞단추가 풀어져 스커트 위로 비죽 삐져나온 블라우스 자락이 드러나 보이고, 실크 블라우스 위의 스카프는 이미 줄줄 흘러내려 목에서 바닥으로 떨어질듯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어지간히 이 박스들을 들고 씨름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박스들의 부피도 그렇지만 무게도 만만치 않다. 그제야 턱밑까지 올라온 박스에 꽝꽝 박혀 있는 브랜드 로고를 보았다.
“아, 지금 바로 앞이에요. 정문. 들어갑니다. 뭐라도 대접하고 계세요. 네, 네에, 그럼요, 네!”
마지막까지 안정된 톤을 유지하던 서진이 홱 핸드폰을 가방으로 던지며 덧붙였다.
“젠장할……. 아우, 미쳐 미쳐. 이 사람들이 날 도로 한복판에서 뺑 돌아 버리게 만드는구만.”
서진이 입을 동그랗게 내밀어 앞머리를 훅훅 불었다. 땀에 젖은 머리가 말을 듣지 않자 손으로 함부로 넘겨 버렸다. 서진이 여전히 한 손으로 가방을 뒤지더니 봉투 한 장을 찾아 박스들 위로 올렸다.
“갑자기 당황했죠 고마워요. 이거 여기 백화점 위층 새로 오픈한 햄버거집 식사권이에요.”
봉투에 보내는 사람이 프린트된 스티커가 붙어 있다.
한혁은 직함을 눈으로 읽으며 피식 웃었다.
어이없군, 세림유통이라.
“봉투에 적힌 게 내 이름이에요.”
서진은 그제야 한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학생.”
기억을 하기는커녕 또 학생이다. 무어라 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한혁의 얼굴은 처음부터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녀의 관심사 전부는 그의 팔에 얌전히 놓인 박스였다. 서진이 양손을 펴며 팔을 내밀었다. 가느다란 손목에는 걸고 있는 봉투 줄이 만든 붉은 흔적이 선명하다. 서진이 조심성 없이 박스 아래로 손을 뻗었다. 순간 균형을 잃고 제일 위에 올려진 박스가 미끄러진다.
“이봐, 조심해.”
“아아, 이제 됐어요. 제가 들게요.”
서진은 박스 아래로 손을 대고는 한혁을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응 하고 묻는 서진의 눈동자에 못마땅한 기운이 스친다.
“미안해요. 이제 보니 학생은 아닌가 봐요. 모자 쓰고 있어서…….”
“응, 학생 꼬리표 뗀 지 오래야.”
아하, 그러시구나. 서진은 입술을 슬쩍 비죽거렸다.
“근데요, 도와주는 건 고마운데 왜 아까부터 반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나이도 내가 훨씬 더 많을 텐데 ”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빙긋 웃었다.
“당신 손이나 조심해 줘. 꽤 자극적이거든.”
“네 ”
“내가 좀 예민해. 상자 떨어뜨리면 안 되잖아 ”
서진이 후욱 짜증을 감추지 않는 숨을 내뱉었다.
“아우우, 오늘 일진이 왜 이러지. 여보세요. 아까 보셨다시피 제가 오늘 안 그래도 정신이 나갈 지경이거든요 빡! 하고 나가기 직전요.”
낯선 남자와 허튼 말장난할 기분은 아니었다. 서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끝을 그의 아랫배와 박스 사이에 깨끗하게 밀어 넣었다.
“박스 내놔요. 이제 당신이 어떻게 얼마나 짜릿하게 자극을 받든 말든 이 박스들은 바닥으로 안 떨어질 거니까.”
남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심장을 파고드는 낮고 허스키한 그의 웃음소리, 말려진 입가. 눈앞에 서 있는 애송이 같던 어린 남자가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윤서진 씨, 미안. 농담해서.”
진지한 목소리에 서진은 잠시 움찔했다.
“가. 들어 줄 테니까.”
“왜 자꾸 반말해요 ”
“서진 씨도 반말하세요.”
“아, 됐거든요. 저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막 반말하고 그러는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빤히 쳐다보던 서진이 박스를 제 쪽으로 당기려 힘을 주었다.
“난 예의 없다 소리 되게 많이 듣는데.”
한혁은 박스들을 가볍게 끌어 올리고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기꺼이 한 번 더 햇빛 같은 친절을 베풀기로 한다. 아니, 이번에는 친절이 아니라 관심과 호기심 때문이다.
‘기어가든 굴러가든 제 일이에요.’
톡 쏘는 말투까지 변하지 않았다. 짓궂은 말에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것도, 그에게 한 올 개인적인 관심이 없는 것도, 투명한 겨울 공기 같던 그녀의 눈빛도 여전했다.
기훈을 남자 친구라 부르며 웃어 보이던 앳된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가 왜 서울 바닥에서 명품 박스를 나르고 있을까.
“이봐요! 그거 들고 어디로 가냐구요!”
서진은 어이없는 남자의 행동에 잔뜩 약이 올라 목소리를 높였다. 남자가 멈춰 서더니 반쯤 뒤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것들, 트럭으로 줘도 안 훔쳐 가. 이 백화점 가는 길 아니었어 ”
남자가 턱으로 세림백화점을 가리켰다.
“맞아요.”
사실, 뻐근한 팔에 저 박스들을 다시 올리고 뛸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케팅팀이 기획한 VVIP 한정판 신품 초대장에 차질이 발생하였다.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어 죽을 지경이라는 백화점 매장 직원의 말에 옆 건물 세림인터내셔널로 달려갔다. 막 도착한 상품들을 담아 들고는, 택시를 타고 ‘아저씨 제발 빨리빨리요.’를 미친 사람처럼 외쳐 댔다.
백화점 건물이 멀리 보일 즈음,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앞으로 꽉 늘어선 차들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차라리 내려 뛰기 시작했었다. 뾰족한 하이힐이 발도 다리도 아주 징그럽게 지치게 했다. 단단한 박스 안의 핸드백과 구두는 상당히 무거웠고 빗물로 더럽혀진 바닥에 혹시나 떨어뜨릴까 봐 긴장하고 안았던 팔은 후들거렸다. 그 와중에 계속 울려 대는 핸드폰을 받으려 한 손을 박스 아래에서 빼는 순간 제일 위에 둔 박스가 떨어져 바닥에 처박혔다.
박스를 주워 주고 오염을 닦아 준 남자는 구세주였다. 택시 안에서 동동 발을 구를 때 그 옆을 유유히 지나쳐 가던 사람이었다. 희고 작은 얼굴, 시원하게 깎은 스포츠형 머리 덕분에 잘 만들어진 이목구비가 선명했다. 얼핏 보면 남동생 서훈의 대학 때 모습 같아 눈길이 간 남자였다. 앞뒤 가릴 틈 없이 남자에게 물건을 들게 하였으니 결례를 따질 입장은 아니다.
한혁은 백화점 정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유리문에 제 모습이 비친다. 모자를 쓰고 캐주얼한 옷차림이지만 혹여 본사 이사진 중 제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알아챌 수도 있다.
세림에 들어가도 될까.
한혁이 뒤따르던 서진을 쳐다보았다.
“아, 오른쪽이에요.”
서진이 열린 문으로 그를 먼저 지나치면서 말했다. 서둘러 움직이는 서진의 걸음이 불편해 보였다. 멈춰 서서 후우 한숨을 쉬고는 허리를 한 손으로 쓸었다. 다시 빠르게 걸었지만 한쪽 다리를 표시 나지 않게 조금씩 절룩거린다. 한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박스를 든 채 서진의 뒤를 따랐다.
누군지 알아채면 또 무슨 상관.
평소 같으면 향기까지 고급스런 조용한 분위기의 명품 매장이었겠지만 세일 기간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점원들은 붐비도록 들어찬 사람들을 감당하느라 버거운 눈치였다. 서진은 곧장 매장 안쪽으로 들어섰다. 세일 제외 품목인 신제품 코너 안쪽으로 화려한 원피스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길고 매끈하게 빠진 다리를 비스듬히 꼬고 앉아 있었다. 짜증과 분노를 온몸으로 확실히 드러내듯이 팔짱 역시 단단히 꼬고 앉은지라 청록과 옥색이 묘하게 섞인 깊이 팬 원피스 위로 도드라진 가슴이 더욱 드러나 보였다. 그녀 옆에서 우물쭈물 서 있던 숍마스터가 서진을 보자 살았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어맛, 지금 오시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서진을 곁눈으로 내려 보던 여자가 팩 하며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제품 도착 날짜에 착오가 있었습니다.”
서진이 한 번 더 머리 숙여 인사하였다. 여자가 잔뜩 골이 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있지도 않은 상품이 있다고 사람을 불러 놓고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경우는 대체 뭐죠 국내에 하나씩 먼저 들어오고 총 세 개 깔린다면서요. 상품, 다른 사람에게 먼저 빼돌린 거 아니에요 ”
“아니에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본사에서 직접 들고 뛰어왔어요.”
“됐고, 제니스 회원을 이런 식으로 취급해도 되나요 ”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머리 숙여 인사하자 여자는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건이나 꺼내 봐요.”
“네.”
그제야 서진은 한혁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차, 하는 미안한 표정이다. 박스를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다. 직원이 다가와서 박스를 열고 물건을 꺼내었다. 서진이 한혁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감사합니다. 제가 사례를 해야 하는데.”
백화점 밖에서 성마르게 날뛰던 모습과는 달리 속삭이듯 말하였다. 한혁은 뻐근한 어깨를 가볍게 돌리며 대꾸했다.
“왜, 햄버거 상품권 줬잖아.”
“그거 말고요. 너무 죄송해서.”
서진은 뭔가 다른 걸 찾으려는 듯 가방을 뒤적였다.
“당신 가방 보물 상자야 또 뭘 찾으려고. 그렇게 뭘 많이 넣어 두니 핸드폰도 빨리 못 찾잖아. 성격도 급하고 덤벙거리지. 혹시 잘 넘어지지는 않아 ”
홱 올려다보는 서진을 향해 빙글 웃었다.
나를 기억 못해 전혀